산문 밖의 禪- 정원 스님(천안 평심사 주지)

정원 스님은… 1969년 일우 스님을 의지해 출가했으며, 1980년까지 일우 스님으로부터 선교를 배웠다. 1984년 8월 천안 광덕면 매당리에 평심사를 창건하고 11년 간 칩거하며 〈고려대장경〉 〈대정신수대장경〉 〈대일본속대장경〉 〈한국불교전서〉 〈조선불교통사〉 등 내전을 두 차례 열독했다. 이후 〈현구집〉을 비롯해 〈태화당수세록〉 〈대장사원(大藏辭苑)〉 〈선림송구집(禪林頌句集)〉 〈선문염송집표주(禪門拈頌集標註)〉를 간행했다. 2014년 6월에 〈태화선학대사전〉을 한문본으로 출간했으며, 2016년 〈선종천자문〉을 발간했다. 올해 1월에는 〈태화선학대사전〉을 증보·한글화 한 〈국역태화선학대사전〉을 10권으로 완간했다.

사전(辭(事)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사와 함께 했다. 어문을 익히는 데 기본이 되는 단어의 의미·품사·용법·어원·표기법 등을 해설하거나 일련의 사상에 대한 분석과 정보들을 사전은 제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전은 인류 지식의 요체를 모은 결집이면서 확장을 도모하는 교보재이기도 했다.

불교에도 이 같은 사전들이 고래(古來)로 존재했다. 송나라의 선향(善鄕)이 선지식의 어록에서 어려운 낱말 2400여 개를 꼽아 풀이하고 그 출전을 밝힌 〈조정사원(祖庭事苑)〉은 일종의 불교 선학 사전이다. 근현대에 들어오면서 불교가 학문 체계를 받아들이면서 불교사전들이 발간되기 시작했음에도 유독 〈조정사원〉과 같은 선학사전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선학사전’이라는 대작불사
〈국역태화선학대사전〉 10권 완간
2014년 태화선학사전 증보·韓譯
1만 페이지·4만 2천여 사목 자랑
경전·어록 근거 예문 3만 4천條
中·日 사전보다 방대·질도 우수

매일 평균 14시간 간경·번역 작업
디지털 문서·조판 직접… 1인 4역

내가 사전을 만든 이유는
1992~2002년 대장경 등 2차례 열독
의문 해결할 좋은 사전 없어 시작
원문 복기 안되는 경전 번역은 잘못
정신·물질 힘들어도 후학위해 노력

진짜 선학사전이 나오기까지
하지만, 근자에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세계 최대 규모의 선학사전인 〈국역태화선학대사전〉이 10권으로 완간됐다는 것이다. 이를 편찬한 사람은 천안 매당리 평심사라는 작은 사찰의 주지인 정원 스님이다.

스님이 편찬한 〈국역태화선학대사전〉은 2014년 내놓은 한문본 〈태화선학대사전〉을 증보·한글화 한 것으로 무려 5년에 걸친 역경불사였다.

10권에 걸친 분량만 10,024쪽에 달하며, 사목(詞目)은 42,235항(項), 예문은 34,068조(條)이다. 보주(補註) 역시 1,315목(目)에 이른다.

이는 중국과 일본에서 나온 선학사전을 뛰어넘는 분량으로 스님 스스로 세계 최대 규모라고 자부하는 이유가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제 일본의 〈선학대사전(1985)〉과 중국의 〈선종대사전(2010)〉은 표제어도 없고 분량도 1800여 쪽과 614쪽 정도다.

정원 스님은 〈태화선학대사전〉이야말로 선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돕는 중요한 사전임을 강조했다.

“불교를 공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전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쉽게 정보를 찾아볼 수 있게 됐음에도 선학 관련 사전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중국과 일본에 사전이 있기는 하나 너무 빈약합니다. 하지만 〈국역태화선학대사전〉은 한글뿐만 아니라 원문 예문과 출처가 함께 있어서 한자문화권 사람이면 누구나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정원 스님은 2014년 〈태화선학대사전〉까지만 불사를 할 생각이었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태화선학대사전〉 발간에 도움을 준 이철교 前 동국대 출판부장이 이번에도 불을 붙였다. 그는 한음순(韓音順)으로 정렬한 사전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스님은 결국 고민 끝에 한글화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늘 그렇지만 스님의 출판 불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터뷰뿐만 아니라 서문에도 밝히고 있지만, 스님의 출판은 모두 어느 누구의 도움없이 사찰 요사채 안에서 혼자 작업해 이뤄진다. 편역, 수교는 물론 컴퓨터 문서 작업과 조판까지 모두 혼자서 한다. 세납이 70세지만, 어지간한 젊은 사람보다 컴퓨터 문서 작업에 능숙하다. MS워드와 한컴오피스의 장단점까지도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다.

“혼자서 하니까 너무 힘들죠.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하루 평균 14시간을 작업해서 지금의 국역본 사전을 편찬할 수 있었습니다. 자금이 없으니 학자나 출판업체에 맡길 수 없습니다. 1만여 쪽에 대한 타자 작업 비용만 1억 5천만 원이 들어요. 제가 편역부터 컴퓨터 조판까지 1인 4역을 하는 이유입니다.”

컴퓨터 앞에서 조판을 하고 있는 정원 스님. 편역, 수교, 타자, 조판 등 출판 작업을 모두 혼자 진행한다.

공부는 좋은 스승과 사전 있어야
혼자서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함에도 정원 스님이 사전 편찬 불사를 오롯이 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부는 좋은 사전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평소 스님의 지론 때문이다. 스님은 공부에 가장 필요한 것이 첫째는 ‘좋은 스승’이고 둘째는 ‘좋은 사전’이라고 생각한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회자되는 이야기이지만 정원 스님은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1년 동안 〈고려대장경〉 〈대정신수대장경〉 〈일본속장경〉 〈한국불교전서〉 〈조선불교통사〉 등을 2회 열독했다. 대장경 등 내전을 2차례 읽어가는 데 선학 쪽 용어가 막혔다. 그래서 사전을 찾았는데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전 편찬 계기를 묻는 질문에 스님은 이렇게 짧게 답한 것이다. “내가 답답해서. 답답해서 못 살겠더라.”

정원 스님은 대장경과 어록을 보면서 출처와 예문들을 모두 정리했고 이는 국역에 앞서 내놓은 2014년 한문본 사전에 모두 담겼다. 사전 안에 “쓸데없는 말이 없다”고 자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 사전에는 경전과 어록에 대한 출전과 원문 예문까지 친절하게 수록돼 있다.

그렇다면 장장 11년동안 두문불출 내전을 간경한 계기는 무엇일까. 스님은 경전 역경을 꼽았다. 출가 이후 경전 번역을 시작했지만, 하다보면 오류가 많은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대장경을 통독하자는 원력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30년 전부터 경전 번역을 했죠.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으니 모두 붓으로 썼습니다. 대장경 간경을 발원하고 〈고려대장경〉을 구해 읽었는데 이는 오픈게임이었어요. 〈고려대장경〉을 다 읽었는데도 모르는 것이 나와서 〈대정신수대장경〉을 구해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대정신수대장경〉은 오자도 많고 어록도 부족했어요. 그래서 〈속장경〉을 구해서 읽었어요. 이를 반복한 것입니다.”

스님의 번역은 직역이다. 시문이나 소설은 의역이 가능하지만, 불교 경전은 의역을 하면 안된다는 게 정원 스님의 주장이다. 한 글자(一字)의 해석만으로도 다툴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원문을 복기할 수 있어야 잘된 번역이라고 본다. 그래서 스님은 이번 국역 사전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한문불전의 역한가(譯韓家)들은 직역하는 자가 드물게 있다. 그러나 많이들 이르기를 나는 직역한다 하거니와 정원이 이르나니 만약 능히 번본으로 방불하게 원본을 복기(復記)하지 못한다면 직역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오번이 있을까 염려스럽다고 이른다.”

“불립문자? 공부 포기한 사람이 하는 말”

나의 수행·원력의 뿌리는 스승
일우 스님을 은사로 1969년 출가해
첫 배움 선문염송… 선·교 모두 중시
붓 1천 필 소모한 사경 수행도 시작
좋은 스승 만난 것도 사전 편찬 도움

한국불교, 공부 좀 하세요
옛 스님들 경전 통달… 교학에 밝아
10년 집중해야 깨달음 일켠에 이르러
“옷은 새 옷이, 책은 고전이 좋습니다”
사부대중 모두 고전에 관심 갖기를

정원 스님이 발간한 역·저서들. 가장 오른쪽의 〈국역태화선학대사전〉은 스님의 원력이 총집합된 결정체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스승에게 배웠다
11년간의 간경 안거부터 사전 편찬, 요즘에는 드문 직역체의 번역 스타일. 이는 모두 스승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정원 스님의 은사는 일우 스님이다. 오두막 한 칸에 기거하며 수행한 일우 스님은 당시 숨겨진 선지식으로 회자되고 있었다고 한다.

정원 스님은 1969년 일우 스님을 친척 소개로 찾아가게 된다. 이미 불교에 뜻이 있던 터라 곧장 질문을 던졌다. “스님, 생사는 열반이죠.” 그러자 일우 스님이 “이놈아 말은 누가 못하냐”고 일갈하며 폭포수 같은 법문을 쏟아냈다. 당시 속인 정원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 결국 일우 스님을 쫓아다니다가 출가를 하게 됐다.

출가한 정원 스님에게 스승은 사집이나 율장을 가르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던져준 것이 〈선문염송〉이었다. 스승이 번역하면 제자를 이를 받아썼다. 이는 정원 스님에게 선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 직역 스타일의 번역도 당시 스승에게 배운 것이다.

또한 일우 스님은 제자 정원 스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선문염송〉 30권을 모두 사경하면 깨달을 수 있다.” 이를 믿고 정원 스님은 1978년부터 사경 수행을 시작했다. 〈선문염송〉은 물론 〈금강경〉을 1000번을 서사했고, 이후에는 여러 경전과 어록을 사경했다. 이를 통해 약 1000필의 붓이 닳아 없어졌다.

“사경 수행의 이익은 집중입니다. 모든 수행은 오롯이 10년을 집중해야 합니다. 은사 스님도 그러셨습니다. 기도가 들어오면 1주일 간 잠도 자지 않고 염불을 하셨습니다. 석달 정도는 자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고 하셨고요. 스승님의 이 같은 모습을 배우고 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선사가 더 경전을 보았다
경전과 선 수행을 모두 강조했던 일우 스님의 가르침은 정원 스님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그래서 정원 스님은 경전을 보지 않는 현재 한국불교의 상황에 대해 비판적으로 본다. “뛰어난 선사가 되고 대강백이 되려면 대장경을 봐야 한다”고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불교 공부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경전과 어록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옛 스님들에게는 일상이었지만, 지금의 한국불교는 이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당장 일본불교의 재가자들은 〈벽암록〉 원전을 찾아봅니다. 한국은 이를 보지 않아요. 가르쳐달라는 사람이 없으니 스님들도 배우질 않는 것이죠. 안 보니 불교 수준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원 스님은 옛 선사들이 박학다식한 부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제가 사전에 유교나 도가 등의 주석을 단 이유는 선어록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옛 선사들은 경전뿐만 아니라 외전까지도 지식이 있었던 것이죠. 분양선소는 대장경을 6번 보았고, 영명연수도 3번을 보았다고 하죠. 선사도 강사보다 더 경전을 보았습니다. 선종을 공부하면서 교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부만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방편이다
정원 스님은 자신이 발간한 모든 역·저서들을 인터넷에 공개했다. 한 명이라도 더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어차피 사는 사람도 없어요. 굳이 자료를 가지고만 있을 이유는 없습니다. 이렇게라도 공개하면 한국불교 대중이 좀 읽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대중들이 고전을 봤으면 합니다. 옷은 새옷이 좋고 책은 고서가 좋은 법입니다.”

인터뷰의 말미, 불교는 무엇인지 물었다. 스님은 ‘방편(方便)’이라고 곧바로 대답했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을 의미하는 방편이 왜 불교일까?

“정해진 것은 없어요. 맞고 옳은 것도 없습니다. 이를 알면 시비가 사라집니다. 방편을 몰라 시비하고 우열심을 갖는 것입니다. 깨우치겠다는 것도 집착입니다. 깨우치면 좋겠지만, 못 깨우쳐도 상관없습니다. 그에 맞춰 부처님은 방편법을 설하셨습니다.”

스님은 자리에 앉아 다시 조판 작업을 시작했다. 책상의 한 켠에는 스님의 손때가 묻어 이제는 해어진 낡은 사전이 있다. 어쩌면 스님은 사전과 저서를 통해 후학들에게 선학을 배우기 위한 방편을 전하고 있을지 모른다.

창밖으로 풍경소리가 들린다. 스님이 던진 일구(一句)를 다시 곱씹어 본다. “깨닫기는 쉬워도 깨닫지 않기는 어렵다.(若悟卽易 不悟卽難, 대정신수대장경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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