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는 보리요, 생사가 열반이라

중국 안휘성 잠산의 삼조사 도량 입구.

마음은 모자라지도 넘치지 않는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 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 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 올시다.
- 한하운(1925~1975) ‘벌’

한하운 시인은 병으로 고생했고 가슴 저린 명시를 많이 남겼다. 한하운 시인과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수나라 때, 선사가 있었다. 이 선사는 40세 무렵, 2조 혜가 앞에 나타나 말했다. 

“저는 오래전부터 풍병을 앓고 있습니다. 무슨 죄가 그리도 많은 지 스님께서 참제해 주십시오.”
“죄를 가지고 오너라. 그러면 없애 주리라.”
“죄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覓罪不可得).”
“그러면, 너의 죄는 벌써 없어졌다. 앞으로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라.”
“스님이 계시니 승보는 알겠지만, 무엇이 불보와 법보입니까”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다. 부처와 법이 둘이 아니니, 승보 또한 그러하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몸과 마음이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너는 나의 보석이다. 승찬이라 하리라.”

이 이야기는 551년 무렵으로, 앞의 선사는 3조 승찬이다. 승찬(僧璨, ?~606)은 혜가의 법을 받은 3조이다. 승찬은 풍병 환자로서 혜가를 만났다고 했는데, 현대어로 말하면 한센병이다. 오늘날이나 예전이나 가벼운 병이 아닌지라 그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천수경〉에 이런 내용이 있다. “죄에는 본 성품이 없고 단지 그 마음에 따라 일어나니, 만약 그 마음이 멸한다면 죄도 또한 없어지고 죄와 마음, 이 두 가지가 모두 사라지면 곧 진실한 참회이다(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是罪亦忘 罪忘心滅兩俱空 是則名爲眞懺悔).” 이 내용은 단순한 참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 스스로가 만들어낸 두려움, 비굴함, 자괴감, 낮은 자존감으로 자승자박한다.

한센병을 앓았던 3조 승찬
자신의 업보를 혜가에 질문
“죄를 가져오라” 답에 大悟

“누가 그대를 묶고 있는가”
승찬의 경책으로 도신 깨달아
열반마저 없는 본래자리 강조

허상으로 만든 것에 스스로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고 괴로워한다. 죄의식이라는 것도 번뇌가 만들어낸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곧 죄라고 하는 경계와 그 마음에서 만들어낸 두려움, 두 가지에서 모두 벗어나야 자유로울 수 있다. 생각과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어떤 두려움이나 걱정이든 사라질 것이다.

승찬에 관한 생몰연대는 정확한 기록을 알 수 없다. 〈전법보기〉에 의하면, 승찬이 출가하고 수행한 때는 남북조시대(420~589), 5호 16국시대로 왕조의 흥망성쇠가 잦은 난세였다. 승찬은 수나라 문제 때인 590년 무렵부터 서주(舒州) 산곡사(山谷寺)에 머물러 1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수행하였다. 승찬은 법회를 하다가 큰 나무 아래서 합장한 채 서서 열반했다. 선사들은 생사해탈이 자유로운 이들이 많았다. 경허선사의 제자인 혜월도 만년에 부산 선암사에서 소나무 가지를 붙들고 선채로 입적했다. 조선시대 벽송지엄(碧松智儼, 1464~1534)은 〈법화경〉을 강설하다가 ‘방편품’에 이르러 “이 노승은 여러분을 위해 적멸상(寂滅相)을 보이고 가리니, 여러분은 밖에서 찾지 말고 더욱 정진에만 힘쓰라”고 당부한 뒤에 좌선한 채로 입적하였다.  

사람들이 산곡사에 묘를 써서 스님의 법체를 묻어 주었다. 훗날 이상(李常)이라는 사람이 신회에게 물어서 산곡사 도량에 묘를 파서 선사의 유골을 화장하니, 사리가 300여과가 나왔다. 승찬이 열반한지 150년 후 현종이 ‘감지선사(鑑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 이름을 ‘각적(覺寂)’이라고 했다. 현재 중국 안휘성(安徽省) 잠산(潛山) 삼조사 도량 내에 각적탑이 모셔져 있으며, 10여 명의 승려들이 수행하고 있다. 사찰 도량 곳곳에 ‘해박정(解縛亭)’, 승찬이 고행하였다는 동굴 등 선사의 행적을 상징하는 곳들이 있다. 승찬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게송집으로는 〈신심명〉이 있다.

세속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참됨을 구하려 하지도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두 견해에 머물지도 말고 그것을 쫓아 찾으려고도 하지 말라.
잠깐이라도 ‘옳고 그르다’는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신심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바로 신심이니라. 

〈신심명〉의 형식은 4언 절구 운문체로, 총140구 584자다. 절대무위를 설한 영가현각의 〈증도가〉, 대상과 혼연일체가 되는 회호(回互)의 원리를 설파한 석두의 〈참동계〉 등과 함께 예로부터 동아시아 선자들에게 가장 많이 애송하는 선시이다. 〈신심명〉은 승찬의 설이 아니라는 이의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승찬의 작품으로 본다. 이 작품은 깨달음의 본체인 신심(信心)에 새겨놓으라(돌에 새기듯이)는 선사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

호북성 황매 사조사 사조전의 모습

너를 묶고 있는 것은 무엇이던가
선종의 4조 도신은 7세에 출가하여 여러 스승을 섬기다가, 14세 때 서주 완공산에서 3조 승찬을 만났다. 4조 도신이 물었다.

“스님의 자비로서 해탈법문을 하나 주십시오.”
“누가 그대를 해탈하지 못하도록 묶어 두는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묶은 사람도 없는데, 무엇을 벗어나려고 한단 말이냐?(何更求解脫乎)”
-〈경덕전등록〉中

묶임은 외부에서 묶은 것이 아닌 자신이 묶고 있으며, 그 풀음도 자신이 해야 한다. 원래는 묶여 있는 것도 아니건만, 번뇌와 고통이라는 올가미를 스스로 만들어 쓰고 있다. 달마가 혜가에게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나 혜가가 승찬에게 ‘죄를 가지고 오라는 것’이나 승찬이 도신에게 ‘누가 그대를 묶고 있는가’ 등은 모두 본래성불된 그 자리, 공성(空性)에 입각해 있다. ‘불안한 마음자리’는 곧 공성의 측면에서 볼 때, 깨달음의 자리인 것이다. 불안한 마음(번뇌)이 곧 안심(安心[菩提])의 자리인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다. 번뇌를 끊고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을 얻을 필요도 없는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도신(四祖 道信, 580~651)은 사마 씨로 호북성(湖北省) 기춘(?春) 출신이다. 3조 승찬과의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뒤, 13년 동안 스승 문하에 머물렀다. 이후 도신은 여러 지역을 행각하였다.

도신의 선사상은 ‘일행삼매(一行三昧)’인데, 〈문수설반야경〉에 의거한다. 도신이 27세 무렵, 길주사(吉州寺. 현 강서성 길안)에 머물렀을 때, 길주성이 70여 일간 도적떼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성 안의 우물까지 말라 백성들이 곤경에 처했는데, 도신이 길주사에 도착하자, 우물이 솟았다. 또 도신이 백성들에게 ‘반야(般若)’라고 크게 염송을 시켰는데, 갑자기 성의 사방에서 대력사(大力士)들이 나타나자, 도적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는 내용이 〈고승전〉 ‘감통(感通)’편에 전한다. 도신은 여산의 대림사 등 여러 곳에서 수행하다 마지막으로 쌍봉산에 정착하였다.

선사는 호북성(湖北省) 황매현(黃梅縣) 쌍봉산(雙峰山)에서 30여 년간 주석하셨다. 그곳에서 법을 펴고 제자들을 이끌었는데, 이를 동산법문(東山法門, 5조 홍인의 사상까지 아울러 동산법문이라고 함)이라고 한다.

4조 도신이 선풍을 펼칠 때, 천태종의 천태 지의(538~597)가 〈마하지관〉에 의해 선법(禪法)을 일으키며 활동하던 시기와 비슷하다. 달마 이래 선사들은 두타행자였는데 동산법문 때부터 대중생활을 하였다. 동산법문에 500명이 넘는 수행자가 운집했다고 하니, 최초로 선종 교단이 형성된 셈이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집단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당시 천태종만 해도 천태산의 교단을 유지하기 위하여 황제의 원조에 의지한 반면 동산법문 교단은 노동에 의한 자급자족의 체계를 확립하면서 농민층의 신뢰와 지지를 얻어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초기불교에서는 수행자가 노동을 하거나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계율에 위배되지만, 동산법문과 이후 선사들에 의해 발전된 일상에서의 선이 완성되면서 노동은 수행의 연장선으로 발전된다. 이 점이 훗날 백장(720~814)에 의해 제정된 청규(淸規)이다. 여기서 발단되어 현재 한국 승려들이 울력하는 것도 당연시 된 것이다.

당나라 태종이 도신을 뵙고자 세 차례나 입궐할 것을 권했으나 도신은 한사코 거절했다. 화가 난 태종이 네 번째 입궐할 것을 권하며 ‘이번에 입궐하지 않으면, 목을 베어오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도 도신은 이에 굴하지 않고, 쌍봉산을 벗어나지 않았다. 도신의 사찰인 황매현 사조사는 정혜(1932~) 방장이 완벽하게 불사해 마친 대가람이다. 도량 내의 당우를 단순한 문양으로 단청했는데, 10년이 흘렀는데도 뇌리에 각인되어있을 정도이다. 정혜 방장은 허운대사(1840~1959)의 제자이며, 운문종 13세 종통을 계승했으며 임제종 법맥도 함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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