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통 원인은 생각에 있다

주제 :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서울 봉은사(주지 원명)는 2월 10일 경내 법왕루서 혜민 스님을 초청해 특별 일요법회를 봉행했다. 혜민 스님은 “긍정적인 마음먹기를 통해 나에게 일어난 상황을 수용한다면 괴로움을 줄일 수 있다”면서 “생각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안의 불성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혜민 스님은… 1996년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캠퍼스에서 종교학 학사를 받았다. 1998년 뉴욕 불광선원서 출가해 2000년 해인사서 사미계를 수계했다. 이후 하버드대 대학원 종교학 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뉴욕 불광사 부주지, 마음치유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 사진제공=서울 봉은사

상대 변화시키려는 마음
이뤄지지 않으면 고통 돼
받아들이는 연습을 통해
마음의 고요함 느껴보자


우리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 중 하나가 무엇일까요?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수용이 안 되니까 나도 모르게 상대방을 바꾸고 싶어 해요. 그래서 우리 아이, 남편, 직장 상사를 내 마음에 맞게 바꾸고 싶어 하죠.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자기 마음에 맞게 안 바뀐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를 계속해서 바꾸려고 합니다. 우리가 나는 가만히 있는데 누군가가 ‘너는 지금 문제가 있다’ ‘지금 이런 상태로 살면 안 된다’ 등 변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우리는 각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해주길 원하니까요. ‘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길 원하면서 남은 바꾸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들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상황, 상반된 마음 두기
제가 워싱턴 D.C.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어요. 기차를 타러 뉴욕에 있는 역으로 가려는데, 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려고 했어요.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뉴욕 지하철은 24시간 운영돼요.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었고요. 그렇다보니 매우 낙후되고 고장이 잘 나겠죠? 하필이면 제가 타야하는 그 시간에 라인이 고장나버렸어요. 그래서 아주 멀리 돌아서 가야하게 됐어요. 원래 12시 기차를 타야하는데 도착해서 보니까 딱 12시 1분이었어요. 1분 차이로 제가 기차를 놓친 거예요. 제가 마음을 어떻게 잘 먹느냐에 따라서 고통스러울 수도, 수용해서 넘어갈 수도 있어요. 

이 상황에서 많은 분들은 억울해하거나 뉴욕 지하철을 탓하며 화를 낼 거예요. 그러면 결국 나한테만 손해예요. 저는 이때 ‘마음을 잘 먹어야지. 잘못하면 나도 모르게 나를 지금 상황에 피해자로 만들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봤어요. 내가 지금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고요. 그런데 있는 거예요. 생각해보니까 그간 일주일 동안 뉴욕에서 지내면서 운동을 못했어요. 날이 추워서 밖에 나가기가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그날 제가 지하철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엄청 뛰었어요. 덕분에 운동을 아주 제대로 했다고 마음을 먹게 됐죠. 

두 번째는 정시 기차를 탔으면 허겁지겁 타느라고 기차 식당 칸에서 샌드위치 같은 것으로 대충 식사를 했을 거예요. 그런데 다음 기차 시간을 보니 1시예요. 갑자기 1시간 여유가 생겼잖아요. 이건 ‘제대로 밥을 먹으라고 우주가 나를 배려해준 거구나’ 했지요. 그렇게 마음을 먹고 보니까 지금 상황이 수용하지 못할 것도 아니더라는 거예요. 

살다보면 우리에게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가운데 내가 마음을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곳에 두는지, 긍정적인 곳에 두는지 살펴보세요. 어떤 상황이 일어나는 건 내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죠. 날씨나 기차 시간을 내 마음대로 할 순 없어요. 하지만 그 날씨에 대한 나의 반응, 기차 시간에 늦은 내 마음은 나에게 달린 것입니다. 날씨가 많이 추울 때 오늘 날씨가 추워서 ‘안 좋다’라고 부정적인 곳에 내 마음을 둘 수 있어요. 그러면 내 마음도 또한 부정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반대로 오늘 날씨가 춥지만 미세먼지가 없어서 좋다고 생각하면 어떤가요?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뀌는 거죠. 

똑같은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어디에 마음을 두는가에 따라서 받아들일 수도, 못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상황을 수용하지 못하면 내가 고통스러워집니다. 일어난 일들을 내가 바꿀 수 있으면 좋겠지만 바꾸지 못하는 일들이 훨씬 많아요. 

병에 걸렸을 때를 예로 들어볼게요. 병을 없애면 좋겠지만 내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이 때도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서 스스로를 이 상황의 피해자로 만들 수도, 상황을 수용할 수도 있는 거예요. 아플 때 ‘지금 이 정도라서 다행이다’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는데 다행이다’라고 마음먹을 수도 있는 겁니다. 남은 생은 가족들과 여행도 가고 그동안 하지 못한 따뜻한 말도 하고, 평소 말로만 불자로 살았는데 조금 더 제대로 수행이나 기도도 해보고…. 이런 식으로 마음을 돌리면 지금 불행한 것이 오히려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해요. 
 

마음 아닌 생각 알아차리기
물을 보면 물 자체는 아무런 모양이 없어요. 그런데 물을 어느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집니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어떤 모양이 정해져있지 않아요. 내가 마음을 생각이란 어떤 형태에 담는지에 따라 달라져요. 마음을 부정적인 생각에 두면 부정적인 모양으로 바뀌고 긍정적인 생각에 두면 긍정적인 형태로 모양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내 마음이 고생스럽고 힘든 순간도 있어요. 그럴 때는 내 마음이 힘든 이유가 생각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닌지를 관찰하세요. 내 마음의 고통의 원인이 바로 생각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 고통 속에서 나올 수 있어요.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 속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수레바퀴 속에서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을 반복하고 그 생각이 진실이자 현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생각에 빠져있을 때에 힘든 거예요. 눈앞에 일어난 지금 상황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의 일에 대해 생각에 빠져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내가 자꾸 나쁜 생각을 일으키거나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 그게 현실이 아니고 또한 진실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셔야 해요. 이를 알아차리면 고작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됨과 동시에 생각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부담감’으로 괴로워해요. 미래에 ‘혹시나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경우가 많죠. 걱정스런 생각을 떠올려 밤잠을 설치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경험이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인해 불안해지는 거예요. 

심리학자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과 불안감의 95%는 쓸데없는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거나 만약 일어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라고 해요. 불안해한다는 생각이 있을 때마다 고작 내 생각에 불과하지 진실이 아니라고 여겨보면 어떨까요? 생각 속에 빠져있으면 내 앞에 정말 맛 좋은 차나 음식이 있어도, 좋은 사람과 즐거운 이야기를 해도,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어요. ‘아차! 내가 생각 속에 빠져 있었구나.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스스로 생각을 일으켜 불안하게 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앞에 놓은 커피를 마셔보세요. 바로 눈앞에 있는 것에 관심을 두면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돼요. 커피가 맛있다고 느끼면 동시에 생각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또 숨을 편하게 쉬어 보세요. 현재 일어나는 편안한 숨의 감각을 통해 생각을 멈추게 할 수도 있습니다. 스님들이 명상수행을 할 때 처음 숨에 집중하라고 하죠. 숨을 가다듬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수식관이에요. 몸의 감각으로 돌아오거나 숨에 집중하는 방법을 한 번 써 보세요.
 

고요함과 친해져 마음 바로보기
이제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고요할수록 밝아진다는 말을 듣자마자 무슨 뜻인지 딱 감이 오나요? 마음이 좀 편안해지고 고요해지면 생각이 없어져요. 다시 말하면 ‘내가 생각에 빠져있구나’를 알아차리는 순간 생각에서 빠져나와 있어요. 이를 선사들은 성성적적(惺惺寂寂, 깨어있되 번뇌가 없는 상태)이라고 하셨고 다시 현대말로 푼다면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전에 제가 쓴 책 제목 중에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지관(止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진리의 실상을 관찰하는 수행법)을 쉽게 풀어낸 말이거든요. 

불교에서는 아는 것, 알아차리는 것을 빛(光)에 비유합니다. 마음이 밝아진다는 것은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고요하면 마음 자체의 성품을 깨닫게 된다는 거예요. 이를 과거 큰스님들은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했어요. 공적은 텅 비고 고요한, 영지는 신령스럽게 깨닫는다는 의미인데요. 우리 마음의 성품을 알아차린다는 이야기예요. 

마음이 고요해지면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에요. 앎의 작용은 한순간이라도 멈출 수 없어요. 예를 들어 눈 감고 귀를 닫은 채로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소리가 들리지도 깜깜해서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죠. 앎 자체를 멈출 순 없어요. 이미 내가 갖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항상 쓰고 있기 때문이에요. 불성은 마음의 성품이자 곧 앎입니다. 앎은 내 몸 밖에도 있고 몸 안에도 있어요. 그게 여러분의 부처 성품입니다. 내 몸 안의 상태와 밖의 상태를 다 아는 거예요. 이 앎이 가득 차 있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 앎의 상태는 모양이 없어요. 세상으로 몸을 나툰 적이 없어요. 하지만 한 순간이라도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도 아니고 항상 쓰고 있는 것이 불성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불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양이 있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둬요.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나면 그때는 마음이 고요한 채로 앎의 활동이 있는 바탕을 견지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중생은 부처 성품을 갖고 살면서도 모르고 살지요. 그래서 고요함과 친해지셔야 해요. 생각이 사라지는 자리에 마음이 고요한 채로 아는 앎이야말로 여러분들이 찾는 부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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