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설날’이다.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설날’은 그야말로 ‘설렘’의 날이었다. 설날은 온 마을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하는 새해의 첫 출발을 기리는 축제였다. 

설날은 ‘삼가는 날(愼日)’이라 한다. 지난해의 불행과 잘못은 몽땅 섣달 그믐날 밤의 화톳불에 날려 보내고 설날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엄숙한 날이다. 그래서 목욕 재개하고 새 옷으로 단정하게 갈아입고 새 음식으로 조상님께 차례를 지낸다.
 

예로부터 설은 ‘삼가는 날’
지난날 반성·새로운 삶 다짐
그래서 설날은 ‘설렘’의 날이다

현재 설날, 이벤트만 난무해
신년 계획, 잘 지키고 있는가
설맞아 재시작 결심 많이 해

현재가 바로 출발의 원점이다
지금 오늘이 바로 설날 아닌가
현재를 ‘설렘의 설날’처럼 살길


그리고 집안과 마을의 어른들에게 세배로 인사드리며 새해의 새 삶을 다짐한다. 새해의 거룩함 속에서 즐거움이 따르는 축제가 같이 했다. 설날은 거룩한 축제의 날이었고 환희의 날이었다. 불교 신자들은 사찰을 찾아 부처님 앞에 조상을 기리고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새 삶을 다짐했다. 그래서 설날은 ‘설렘’의 날이다.

그런데 지금의 설날은 설렘은 사라지고 이벤트만 난무한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태양력이 공식화됨에 따라 양력 설날이 등장했다. 신정이 설날이 되었고 우리의 전통적인 설날은 ‘민속의 날’이라는 민망한 이름을 가지기도 했다. 

1989년 음력 정월 첫 날이 설날로 다시 자리 잡았다. 이제 양력의 1월 1일은 그냥 새해의 첫 날인 신정이 되었고, 음력의 첫 날은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고 설날을 전후한 3일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현대과학에 의하면 시간은 오직 빛으로만 측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태양과 달의 운행을 보고 시간을 측정하여 달력을 만들고 그 달력과 함께 산다. 달력이 일상생활의 나침판이다. 

나의 청소년 시절이 새삼 기억난다. 1월 1일 신정이 되면 이런 저런 계획들을 세우고 일기장을 사기도 한다. 며칠 못가 무너지면 구정, 즉 설날까지 유예하다가 설날에 또 큰 결심을 한다. 그러다가 또 무너지고 삼일절을 재출발의 날로 정하고 미룬다. 생일도 중요한 새 출발의 날이 된다. 재출발의 단위는 주간단위로 단축되어 월요일이 되기도 하였다. 마치 바위를 굴리며 산을 오르다 떨어지고 다시 오르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이런 경험은 아마도 많은 사람이 공유하지 않을까한다. 

붓다의 무기(無記)설법이 생각난다. 붓다의 가르침은 바로 ‘지금, 여기서’ 살아 숨 쉬는 것이다. 세계가 영원한지, 영혼과 육체의 관계는 어떤지, 내생은 있는지 없는지의 등 이론적 호기심에는 침묵하면서 지금 여기서 독화살을 맞은 중생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다. 

방영준 성신여대 윤리교육과 명예교수

현재는 과거와 연속된 현재이고, 미래로 연속될 현재이다. 현재는 스스로 있으면서 동시에 이미 없는 과거와 아직 없는 미래를 존재로 전환하고 그 존재를 서로 연결한다. 

그 중심에 깨어 있는 의식인 ‘나’가 있다. 나는 시간의 주체다. 현재는 미래를 기획하고 과거를 새롭게 만든다. 

현재야말로 바로 출발의 원점이다. 그러니 바로 지금 오늘이 설날이 아닌가? 바로 지금 현재를 설렘을 가지고 설날처럼 지낸다면 우리 모두 행복할 것이다. 설날의 설렘을 노래한 안도현 시인의 ‘닭이 울어 해는 뜬다’의 시구로 글을 마감한다.
   

저 먼 동해 수평선이 아니라 일출봉이 아니라/ 냉수 사발 속에 뜨는 해를 보자/ 첫닭이 우는 소리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세상의 끝으로/ 울음소리 한번 내질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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