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덕산시중화 평창 3

[評唱 3]

只如 法眼拈道 “大小德山 話 作兩右” 可謂據款結案. 圓明拈道 “大小德山 龍頭蛇尾” 也是看孔著楔. 如今作?生會這公案. 若做兩右會 且得沒交涉 便作龍頭蛇尾會 且得沒交涉. ?不恁?會 畢竟作?生. 且道 二老宿 ?什?却如此拈. 諸人試著眼看.

그건 그렇고, 법안(法眼)이 염(拈)해서 말하기를 “별 것 아닌 덕산의 말이 두 개의 말뚝이 되었다”고 했으니, 가위 법령에 의거해서 판결을 내렸다고 할 만하다. 또한 원명(圓明)이 염해서 말하기를 “별 것 아닌 덕산이 용두사미가 되었구나!”라고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구멍을 보고 쐐기를 박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이 공안을 알고 있는가? 만약 두 개의 말뚝으로 알아도 전혀 관계가 없고, 용두사미로 알아도 전혀 관계가 없다. 그렇게 알지 않는다면, 필경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자, 말해보라! 두 노숙(老宿)이 어째서 이와 같이 염을 했는가? 모두들 시험 삼아 착안(著眼)해보라!

古人道 “獅子咬人 狂狗逐塊” 如今作?生見得德山去. 所以 拈古十箇 拈做十般 要須出他古人意 方喚作拈古. 只如 傅大士道 “夜夜抱佛眠 朝朝還共起 要知佛去處 只這語聲是” 看他玄沙拈道 “大小傅大士 只認箇昭昭靈靈” 又靈雲見桃花便悟云 “自從一見桃花後 直至如今更不疑” 玄沙云 “諦當甚諦當 敢保老兄未徹在” 且道 他意在什?處.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사자는 사람을 물지만, 미친 개는 흙덩어리를 좇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덕산을 보았는가? 그래서 (이에 대해) 염고(拈古) 열 개를 열 가지로 염하더라도, 모름지기 저 고인의 뜻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니, 그래야 염고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 대사(傅大士)가 말하기를 “밤마다 부처를 끌어안고 자며, 아침마다 함께 일어난다. 부처가 간 곳을 알고자 하는가? 다만 이 말소리가 그것이다”고 했는데, 저 현사(玄沙)가 염해서 말하기를 “별 것 아닌 부 대사가 다만 소소영령(昭昭靈靈)한 것을 알았을 뿐이다”고 한 것을 보라! 또 영운(靈雲)이 복숭아꽃을 보고서 바로 깨닫고는 말하기를 “복숭아꽃을 한 번 본 이래로 지금까지 다시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현사(玄沙)가 말하기를 “확실하고 아주 확실하다. (하지만) 감히 보증컨대, 노형이 아직 철저하지 못했다”고 했다.

자, 말해보라! 그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사자는 사람을 물지만, 미친 개는 흙덩어리를 좇는다(獅子咬人 狂狗逐塊)는 말은 전등록 제 6권, ‘월주(越州) 대주(大珠) 혜해(慧海) 선사’ 편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물었다. “무릇 경·율·논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읽고 외우며 가르침에 의지해 받들어 행하는 것인데, 어째서 성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선사가 말했다. “마치 미친 개는 흙덩이를 좇지만, 사자는 사람을 무는 것과 같다. 경·율·논은 자성의 용이고, 읽고 외우는 것은 성품의 법이다.”

부 대사(傅大士, 497~569)는 무주선혜(挽州善慧), 쌍림(雙林) 대사, 동양(東陽) 거사라고도 한다.

현사사비(玄沙師備, 835~908): 설봉의존의 법을 이었다.

영운지근(생몰 미상): 위산영우의 법사. 경덕전등록 11권, ‘복주 영운 지근 선사’ 편에 오도송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30년을 검객을 찾았으니 낙엽지고 새싹이 돋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 복숭아꽃을 한 번 본 이래로 지금까지 다시 의심하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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