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믿음 편 5

불교는 과학이 아니라 종교라는 점에서 지식이 아니라 믿음의 범주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이를 간과한 채 불교를 과학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증명하려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이성이나 경험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중세 기독교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믿음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부처님(佛)과 가르침(法), 승가(僧)이다. 이를 가리켜 삼보(三寶), 즉 세 가지 보배라 한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삼보는 불교를 지탱하는 생명과도 같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의식은 삼보에 귀의하는 것(三歸依)에서 시작된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귀의란 범어인 ‘나마스(namas)’를 번역한 말이다. 흔히 ‘나무아미타불’ 할 때 ‘나무(南無)’는 나마스를 음역한 말이다. 이는 목숨 걸고 돌아간다(歸命)는 뜻이다. 삼귀의란 삼보에 돌아가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한다는 일종의 신앙고백이다. 이처럼 부처님과 가르침, 승가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을 별상삼보(別相三寶)라 한다.

반면에 삼보를 ‘하나인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심삼보(一心三寶)도 있다. 불법승(佛法僧)이 마음 밖에 별도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일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귀의는 하나인 마음에 돌아가 살겠다는 간절하면서도 굳건한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의 믿음은 화엄불교나 선불교에 이르러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된다. 〈화엄경〉에는 “마음과 부처,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고 하였다. 우리는 탐진치(貪瞋痴) 삼독에 취해 있어서 중생인줄 알고 살지만, 실은 믿음의 대상인 부처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삼독에서 깨어나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부처다운 삶을 사는 것이 곧 신앙인의 참다운 모습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믿음을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信爲道元功德母)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번뇌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불교의 목적인 깨달음은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믿음과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선불교에서도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임을 매우 중시한다. 이를 언급하지 않은 선사들이 거의 없을 정도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다름 아닌 부처임을 믿고 깨치는 것이 곧 견성(見性)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품을 밝게 비추는 견성은 선불교의 생명이다.

화엄이나 선에서 자신이 곧 부처임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를 대상화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를 대상화하면 나와 부처가 둘이 되어, 나는 ‘여기’에 있고 부처는 ‘거기’에 있게 된다. 따라서 부처를 찾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선이 밖에 있는 ‘거기’로 향할 수밖에 없다. 선불교에서는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으로 돌이키라(返照)고 한다. 그럴 때 부처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음을 깨친다는 것이다. 선사들이 ‘절대로 밖에서 찾지 말라(切莫外求).’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교가 지나치게 기복(祈福) 중심으로 흐르게 되면, 자기성찰의 종교라는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릴 수 있다. 기도도량으로 유명한 전국의 사찰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영험 때문이다. 소원을 빌면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에 기복이 없을 수 없다. 부처님과 여러 보살님들의 위신력(威神力)에 의지해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담을 수 있다. 연등이나 염주 등에 ‘소원성취(所願成就)’란 말이 많이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불교가 왜곡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기복신앙’ ‘귀신장사’ ‘아줌마 불교’, 한국불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용어들이다. 이를 극복하고 자기 성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불교는 어리석은 믿음(迷信)이 아니라 바른 믿음(正信)을 지향하는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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