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 성질 가졌기에 ‘佛’ 될 수 있다

그림-강병호 화백

옛날에 뛰어난 한 선사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불교를 잘 안다는 대학자가 찾아왔다. 스님하고 불교에 대해서 한 번 논쟁해 보겠다고 찾아왔다고 하니 스님은 먼 길을 온 학자에게 차를 대접한다. 차를 따르는데 찻잔에 차가 넘쳐도 계속 따르고 있다. 그것을 보고 대학자가 “스님, 차가 넘칩니다”라고 말하자,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자네가 이것과 똑같네. 머릿속에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어떻게 나하고 불교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인가?”

중생, 부처의 ‘부분집합’ 존재
씨앗·속성 지닌 가능성 지녀
부처되겠다면 스스로 개혁하라
무명→연기 이동 작업이 ‘수행’
수행하는 것만큼 부처가 된다


우리의 목표는 부처되는 것인데 과연 부처될 수 있을까? 불자라면 누구나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을 문제다. 부처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집합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집에서 손자 손녀들이 숫자를 익히고 공부를 한다. 1,2,3,4를 가르쳐 주니까 며칠 만에 100까지 알았다. 한 달 후에는 1000까지 알게 되었다. 100까지 아는 것은 1000에 포함된다. 그러니까 1000을 안다고 할 때 당연하게 100을 안다는 것이다. 100이 따로 있고 1000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1000까지를 안다고 할 때는 100까지 알고 또 1000까지 아는 것이다. 이 부분의 개념은 앞으로 전개되는 불성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서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선불교 경전에 보면 ‘내가 곧 부처다’하는 말이 나오는데, 앞의 예시를 이해할 때 선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100까지 아는 것은 1000까지 아는 부분에 속하는 부분집합이다. 이와 같이 중생은 부처에 포함되는 부분집합일 뿐이다.

돌은 갈아도 거울이 되지 않는다
남악회양과 마조도일의 이야기다. 젊은 스님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회양선사에게까지 들려온다. 그래서 회양선사는 마조도일이 수행하고 있는 수행처를 찾아간다. 마조도일은 산 중턱에 있는 암자에서 혼자 공부하고 있었다. 남악회양선사가 하루 종일 혼자서 참선을 하고 있는 젊은 수행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침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젊은 스님이 바깥으로 나왔다. 소변보러 나오는 젊은 수행자를 남악회양 선사가 한참 쳐다보다가 “젊은 수행자여, 자네는 무엇이 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앉아 있는가”라고 묻자 “부처되기 위해서 수행하고 있습니다”라고 마조도일이 대답한다.

그러자 회양선사가 주위에 있는 벽돌을 하나 집어 들고 법당 앞에 있는 큰 돌에 슬슬 갈기 시작한다. 화장실 다녀오겠다던 젊은 수행자가 한참 쳐다보다가 “스님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하고 묻자 “거울을 만들려고 돌을 갈고 있네”라고 답했다.

그러자 젊은 스님이 웃으면서 “돌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한 마디 거들었다. 이에 남악회향은 젊은 수행자에게 한 마디 한다. “그럼 자네는 앉아 있다고 부처가 되는가.”

남악회향의 말 한 마디는 마조도일을 견성하게 만든 계기가 된다. 돌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즉 돌과 거울의 관계에서 돌이 결국 거울에 포함되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거울이 될 수 있지만, 돌이 거울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죽다 깨어나도 거울이 되지 않는다. 결국은 돌이 거울에 포함되어야만 거울이 된다는 것이다.

無明의 상태가 바로 중생
중생이란 무엇인가? 무명의 상태, 모르는 상태가 중생이다. 중생과 부처는 별개가 아니란 것을 이 부분에서 이해해야 된다. 회향선사와 마조도일의 대화와 어린손자가 공부하고 있는 부분집합을 잘 이해하면 된다. 결국 중생이란 무아와 무상을 모르는 상태이고 연기를 깨달아 알게 되는 상태가 부처이다. 이것이 불교를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불성의 존재에서 중생은 부처의 ‘부분집합’인 것이다.

중생이라는 것은 부처 속에 포함되어 있는 부분이다.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비교해보면, 모르는 것은 항상 아는 것에 포함되게 된다. 중생이란 모르는 상태에 있는 것을 아는 상태에 포함되는 부분집합일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 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래서 부처는 <대승기신론>에서 우주를 덮고 있는 일심이며, <중론>에서 이야기 하는 공이며 무자성인 것이다.

중생이 곧 부처다 했을 때 어떻게 중생이 곧 부처인가? 이런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중생이 곧 부처가 되는 것이고 중생으로서 열심히 노력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중생은 부처의 속성과 부처의 씨앗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하고 깨쳐서 알 것 같으면 부처가 된다. 불성의 존재라는 것은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이다. 결국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어야 삶의 목적을 부처에 둘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의 뿌리는 불안
지금 달나라에서 태어난 누군가가 지구에 온다면 아무것도 모른다. 자기 멋대로 차를 몰고 다니면서 무엇이 주차위반인지 모른다. 모르면 불안하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차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기 때문에 위반인지 아닌지 잘 알고 있다. 하물며 세속의 법도 이러한데 부처님의 법인 무아와 무상을 알고 내가 실천할 줄 모른다면 안 된다. 주차위반을 하거나 신호위반을 하는 사람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위반하지만 아는 사람은 위반하더라도 다음에는 위반 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또 본인이 위반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안해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인식, 감정 등의 기본적인 속성은 불안이다.

몸뚱이가 왜 생긴 것인지 왜 인간 몸을 받은 것인지 왜 죽어야 하는 것인지 하는 문제를 풀어 보면 가장 근본적으로 생기는 감정은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불안과 두려움이 이 몸뚱이를 만들어 낸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 법을 모르기 때문에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르는 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간에 내일 죽는다고 생각할 때 TV 보고 친구를 만나는 등 무한정 살 것처럼 보낼 수 있을까. 오늘 한 시간 노력하는 것은 나이 들어 10년 노력하는 것보다 더 낫다.

은행에 돈 넣어 놓으면 이자가 붙듯이 공부도 똑같다. 우리가 지금 모르니까 이자가 안 붙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금과 같이 이자가 붙는 것이다. 부처님 법도 적금 이상의 복리 이자가 붙는다. 그런데도 확신이 생기지 않으니까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차위반과 신호위반 등은 가능한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내가 손해 안 보기 위해서, 다른 사람한테도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 질서를 지킨다. 결국 연기를 깨닫고 나면 이보다 더 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이 없다. 나에게서 일어나는 자비와 광명이 나한테만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복과 덕이 된다. 나와 더불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와 중생들에게 매우 큰 복과 덕이 되는 것이다.

스님들이 선문답할 때 본래청정이란 말을 자주 한다. 불교의 근본적인 속성은 청정이며 자비광명일 뿐이다. 밝음은 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다. 궁극적으로 내가 다 알고 나면 편안해진다. 이 몸뚱이가 만들어지고 온갖 문제의 해결을 알게 되면 편안해진다. 편안이라는 이 자체가 바로 적정이고 적멸이다. 그래서 무아와 무상을 깨치면 열반적정이 되는 것이다.

자비광명과 열반적정은 반드시 청정해야 한다. 맑고 깨끗하다는 것은 광명을 아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며 적정은 하나의 속성일 뿐이다. 부처님 법을 알게 되면 하지마라 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인 ‘내가 부처다’라고 말할 때 내가 부처될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 무명에서 연기로의 이동
10억 원의 로또 복권이 당첨됐다고 하자. 복권 당첨자가 볼 때는 우연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세세생생 살면서 어떤 경우에는 농사꾼으로서 몇 생을 사는 동안에 일을 해주고 품삯을 못 받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전생에 했던 자신의 노력의 대가들이 우연하게 인연이 잘 맞아 떨어져 이번 생에서 대가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 그냥 된 것 같지만 절대 우연하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일어나는 일들은 필연이다. 전생의 인과들이 있기 때문에 이생에서 그냥 일어날 뿐이다. 기적이라는 것도 우리가 모르니까 기적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목숨을 걸고 기도를 하면 기도는 성취되게 되고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죽어가는 암 환자가 기적적으로 나을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생각 속에서 100% 믿음이 생기면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우리가 기복이라고 치부하고 있는 것은 정말 기복이 아니라 연기를 잘 이해하고 있는 내 속에 있는 인식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다.

<금강경>에는 ‘지극한 마음을 일으킨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마음을 내었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마음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수보리가 부처님께 묻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견성성불’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불교의 목적은 ‘견성’이며 ‘부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순간부터 부처가 되어야 한다. 부처되려고 애를 써야 미래의 삶이 보장된다. 인과는 정확하다. 절대로 엉뚱한 인과는 없다. 본인이 평생 살아왔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가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지었던 업의 덩어리를 이생에 표현하고 가는 것일 뿐이다.

내가 부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바로 이 순간부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한다. 무명에 가깝던 내 삶을 연기 쪽으로 이동을 시켜야 된다. 이동시키는 작업이 바로 ‘수행’이다. 어떠한 상황이든 우리는 이번 생에서 수행을 해야 한다. 하는 것만큼 부처가 되는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