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코쿠 순례 매력은 ‘사람’에 있다

27번 코노미네지 대사당에서 예불을 올리는 일본의 단체 순례자들. 순례길의 매력은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새벽녘 목청껏 우는 닭 울음에 눈을 떴다. 나름 번화한 시내인데 대체 어디서 우는 건지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알람을 맞춰둔 것보다 1시간 반이나 이른 5시 30분이다. 침낭 속에서 좀 더 꾸물대다 부스스 일어났다. 지난밤은 다행히 모기가 많지 않아 편안히 잘 수 있었다.

지도를 가늠해보니 오늘은 여기서 31km 정도 떨어진 젠콘야도까지 걸어야 한다. 평지라면 무난한 거리지만 27번 코노미네지(神峰寺)가 산 정상 근처라 체력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해가 떨어지기 전엔 도착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아침 6시, 오늘도 걷기를 시작한다. 아침운동을 나온 주민들이 인사를 건네 온다.

“오헨로상!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부터 이르네요, 조심해서 순례하세요!”

시코쿠 순례길은 언제나 이런 친절들이 아름답게 반짝인다. 순례자라는 이유 하나로 수많은 은혜를 입는다. 에히메현에서 하룻밤 함께 노숙했던 나이든 순례자는 이렇게 말했었다.
“시코쿠 순례란 건 참 묘해. 보통 나 같은 늙은이가 길가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인사했다간 ‘저 영감님 노망났나’고 하겠지. 하지만 이곳은 아니야. 모두가 눈을 맞추고 ‘오헨로상’하고 웃어준단 말이야. 난 아직 ‘세상이 따뜻하구나’하고 감동했어요.”

산 정상 27번까진 고난의 행군
친절부터 자기중심적 사람까지
다양한 인간군상들 체험하기도
순례길엔 다채로운 얼굴 있어


아침 해가 떠오르고 새벽의 찬 공기가 모두 물러갔을 무렵 27번으로 향하는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27번으로 향하는 순례는 까마득한 산길이다. 3.5km의 산길을 하염없이 올라야 한다. 오르막이 제법 가파르고,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와야 하니 짐을 등산로 입구의 민가에 맡기거나 벤치에 풀어두고 사찰을 다녀오는 경우도 있다. 등산로 입구의 벤치에는 어느 순례자가 이미 다녀간 듯 배낭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일단 벤치에 앉아 미숫가루로 아침을 먹으며 잠시 생각해보니, 아침부터 힘을 뺐다가는 오후에 걷기 힘들 것 같아 나도 짐을 풀어두고 몸만 오르기로 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시골길이라지만, 배낭을 아무렇게나 풀어놓고 오르기엔 조금 불안하여 근처 민가에 짐을 부탁하기로 했다.

“실례합니다. 계십니까?”
집 안쪽에서 대꾸하는 말이 들리더니 잠시 후에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신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시코쿠에서 이런 눈치를 받은 건 또 처음이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입니까?”
“27번으로 향하는 순례자인데, 혹시 배낭을 여기 잠깐 맡길 수 있을까 해서요.”
“상관없지만, 잃어버려도 난 책임 못 져요.”
“아, 괜찮습니다. 어디에 두면 될까요?”
“저기 헛간 안에 두세요.”

할아버지는 내가 헛간에 배낭을 두고 감사 인사를 할 때까지 빤히 나를 쳐다봤다. 눈치가 보였지만 일단 최대한 웃는 얼굴로 인사하면서 27번으로 향했다. 사실 할아버지의 태도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아침에 출발할 때만 해도 시코쿠의 친절에 감동하며 걸었던 터라 갑자기 싸한 응대에 연신 갸웃갸웃하며 길을 올랐다.

차도를 따라 오르다가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는 순례길에 접어들었다. 순례길은 구불구불한 차도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산길이다. 순례길을 오른 지 얼마 안돼서 나처럼 빈 몸의 순례자가 길을 내려온다. 등산로 벤치에 있던 배낭의 주인인 것 같았다. 일단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도보 순례자인가요?”
“네, 배낭은 아래 민가에 맡겨두고 왔어요.”
“아 그렇군요. 혹시 올라올 때 벤치에 배낭 하나 있지 않던가요?”
“네, 무사히 있어요.”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의 코보대사상. 흔히 수행대사(修行大師)로 불리는 모티프이다.

잠시 숨을 고를 겸 서로 길에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배낭을 맡기며 경계의 눈초리를 받은 이야기를 하자 그 순례자가 웃으며 설명해 줬다.
“그럴 만 해요, 요즘 순례자를 가장한 노숙자나 강도사건이 종종 있습니다. 배낭을 맡아 달라며 대량의 짐을 놔두고 하루 종일 나타나질 않거나, 예를 표하겠다며 집안에 무턱대고 들어오곤 해요. 그래도 당신처럼 젊은 사람은 드물어 반신반의하며 배낭을 맡아 줬을 거예요.”

설명을 듣고 나니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순례자라는 신분을 믿고 친절을 베푸는 시코쿠의 사람들, 그리고 그 친절을 악용하는 사람들. 이 순례길도 다양한 인간군상이 모이는 곳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나 역시 그 호의에 너무 기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또 반성하게 된다.

“그래도, 나처럼 벤치에 그냥 둔 채로 온 것 보다는 훨씬 안전해요. 잠깐 배낭을 두고 다녀온 사이에 배낭 통째로 도난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도보순례자들은 보통 현금이나 돈이 될 만한 물건들을 배낭에 가지고 있으니까 쉽게 표적이 됩니다. 특히 순례가 끝나가는 에히메나 카가와현이 위험해요. 배낭에 있는 납경장이나 납경족자를 도난당했단 이야기가 많습니다. 납경이 많이 된 것들은 수집가들이 비싼 값에 사들이기 때문이죠.”

순례자는 나에게 아무리 순례길이라도 주변단속을 철저히 하라고 충고하곤 길을 내려갔다. 왜 할아버지께서 그리 경계하셨는지 의문이 풀렸기에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오를 수 있었다. 1시간 남짓 헐떡대며 오르막을 오르자 27번의 산문이 나타났다.

산문을 기점으로 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왼쪽은 27번 코노미네지, 오른쪽은 코노미네 신사(神峰神社)로 가는 길이다. 코노미네지는 원래 신사와 절이 함께 있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도량이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 분리되긴 했지만 아직도 산문을 같이 쓰는 것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산문을 들어서고도 좀 더 나아가자 납경소와 요사채가 나오고,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이 계단을 올라야 본당과 대사당이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는데 또 계단을 오르려니 머리가 아찔했다. 일단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납경소 앞의 평상에 앉았다.

평상 옆으로는 시원한 석간수가 폭포가 되어 솟아나고 있었다. 사찰의 명물인 ‘코노미네노 미즈(神峰水)’라는 샘이다. 산 아래 마을에서 중병을 앓던 여인이 코보 대사의 현몽으로 이 물을 마시자 곧바로 병에서 완쾌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여러 병을 치유하는 약수로 유명하다.

잠시 땀을 닦고 물을 받아 마셨다. 물맛이 달고 시원했다. 순례를 오기 전에는 ‘물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했는데, 매일 같이 물을 끊임없이 마시니 미묘하게 다른 물맛을 알게 됐다. 거기다가 이곳의 물은 산 정상 근처의 석간수다보니 물에 암기(巖氣)도 느껴졌다. ‘차 내리기 참 좋은 물’이라고 생각하며 물통에 가득 물을 받았다.

산문 쪽에서 시끌시끌하게 단체 순례자들이 오는 것이 보였다. 단체 순례자들이 오면 아무래도 여유롭게 참배하기 힘들어 바로 본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미 본당에도 단체 순례자들이 한 팀 예불을 준비하고 있었다.

헌데 단체팀을 이끄는 센다츠(先達, 순례지도자)가 촛대를 슥 보더니 켜져 있는 초를 뽑아서 꺼버렸다. 순간 놀라서 가만 보고 있으니 자신이 이끄는 순례자들에게 빈자리에 초를 켜라고 안내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빈자리가 없어도 그렇지, 다른 사람들이 기도한 초를 아무 주저함도 없이 꺼버리곤 자기 사람들에게 초를 켜라고 하는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이진 않았다.

참배를 마치고 납경소에 내려가니 아니나 다를까, 단체 순례자들이 먼저 납경을 받고 있었다. 납경장에 족자까지 못해도 60여 개는 넘어보였다. 어쩔 수 없이 납경장을 들고 문가에 서있으려니 직원이 나에게 말을 건다.
“도보 순례자인가요? 그렇다면 납경장을 먼저 주세요. 도보 순례자부터 먼저 해드리고 있습니다.”

단체 납경장을 한 쪽으로 밀어두고 일필지휘로 써주신 납경장을 다시 받아 들고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다시피 산을 내려갔다. 배낭을 맡겨둔 집에 도착해 보니 배낭은 처음에 두었던 그대로 있었다. 배낭을 둘러메고 감사인사를 하려고 집안을 향해 여러 차례 말을 걸었지만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아마 밭일을 하러 나가신 듯했다. 오사메후다에 감사 메시지를 써서 문틈에 끼워두고 순례길로 돌아왔다.

이제 오늘의 숙소인 젠콘야도까지 부지런히 걸어갈 일만 남았다. 길을 걸으며 싱숭생숭한 마음을 진정하기가 힘들었다. 오늘 아침부터 사찰을 순례하고 내려오기까지, 하루 반나절 만에 꽤 많은 사건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나눈 친절한 인사들, 배낭을 맡기는 나를 경계하던 할아버지, 짐을 조심하라며 충고하던 순례자, 초를 주저 없이 꺼버리던 센다츠. 시코쿠 순례길도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27번으로 들어가는 산문과 신사로 올라가는 갈림길.

TIP
- 힘들다고 짐을 풀어두고 사찰을 참배하거나, 왕복하는 길을 다녀오는 경우 도난사고가 생길 수 있으니 짐 단속에 주의하자.
- 코노미네지를 오르기 전에 짐을 맡기는 것이 좋긴 하지만, 순례기처럼 하기는 어려움이 많다. 만약 전날 숙소를 잡고 순례했다면 숙소에 부탁해 짐을 맡기고 다녀오는 것이 좋다. 실제 많은 일본인 순례자들이 쓰는 방법이다.
- 코노미네지도 츠야도(순례자 숙소)가 있긴 하지만, 납경시간이 마치는 오후 5시경에 도착한 순례자만 받는다. 츠야도를 폐쇄하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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