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사·고엔카로 이어진 수행 여정

자이푸르 고엔까 선원의 전경. 필자는 박사 논문 제출 후 이곳에서 집중 수행을 했다. 이곳을 건립한 고엔까는 미얀마로 간 인도불교 수행법을 다시 인도로 복원시켰다.

먼저 미얀마 수행처에 앞서 선정에 집중했던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필자의 불교 인연은 선정 체험에서였다. 그때까지 생각해 볼 수 없었던 경험이었다.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해 줄곧 선정에 관심을 뒀다. 초기경전에서 사선과 사념처 등의 선정 사상은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하지만 1980년대만 하더라도 초기불교 선정론은 주목받지 못했다. 불교대학에서조차 이를 설명해 주는 과목이나 교수는 없었다. 당시는 중국 선종 분위기에 압도되어 초기불교경전의 선은 단지 소승선으로 치부되어 주목받지 못했다. 대학 밖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홀로 독습할 수밖에 없었다.

청화 스님에게 직접 지도받아
당시 선정 체험, 지금도 도움

고엔까 건립 담마아란야 선원서
집중 수행… 일일 평균 11시간
미얀마로 간 인도 불교 수행을
인도에 복원시킨 현장 ‘목도’

그러다가 대학 4학년에 들어 청화 스님(1923~2003)의 〈정통선의 향훈〉을 접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사선 등 불교의 근본 선정 개념을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 간화선 위주의 도서와는 달랐다. 경론에 나타나는 선정 사상의 기본 개념을 스님의 법어집을 통해 정리할 수 있었다. 마침 스님이 주석하는 태안사에는 시민선방이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여름 방학과 함께 시민선방 ‘정중당(淨衆堂)’에 입방하였다. 주지 스님께 편지를 드리고 기말시험을 마치고 바로 내려갔다. 광주 도착 후 곡성까지, 다시 군내 버스를 타고 펼쳐지는 섬진강 자락은 아름다웠다. 다시 걸어서 태안사까지는 단풍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는 쉬지 않았다. 오후 늦게 도착하니 방사 소임의 스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방을 정해주었다.

청화 스님은 일반인도 선정 공부를 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산중에 시민선방을 건립하였다. 많은 재가자들이 시민선방을 찾았고 나 또한 이곳에서 집중적인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정기적으로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었고 스님의 토굴에 찾아가 법을 묻기도 하였다. 방학 2달 동안 처음으로 선방 규칙에 따라 집중적인 좌선을 할 수 있었다. 새벽 예불만을 간단히 마치고 선방 2층에 오르면 50분 좌선에 10분 경행과 휴식이 반복되었다. 다시 아침식사 후 점심식사까지, 그리고 저녁식사 이후 저녁 9시까지 대략 하루 8시간에서 10시간의 공부였다.

당시 실제 앉아보는 경험을 통해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선정 사상과 체계를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문제 삼아 오는 사념처의 염(念, sati)과 지관(止觀)에 대한 논의도 이때의 경험이 바탕 된 것이다. 나날이 이치가 밝아져와 신심과 환희심이 절로 일었다. 이전에 체험해 볼 수 없었던 깊은 수준의 안정과 집중 그리고 생생한 의식상태가 유지되었다. 현재까지 불교공부를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 된 것이다.

특히 초기경전의 사념처 위빠사나와 사마타 광명관(光明觀)은 현재까지 나를 지속시키는 불교 행법이다. 특히 초기경전의 광명관은 청화 스님의 염불선과 통한다. 청화 스님은 당시 한국불교의 가르침과는 사뭇 다른 입장이었다. 예를 들면 당시 참선 공부법의 일반은 처음부터 느낌과 상상 그리고 기억을 배제하고 단절해야하는 것으로 강조되었는데 스님은 그러하지 않았다. 오히려 느낌과 상상 그리고 기억과 관련된 사마타 위빠사나 관법을 원통불법이라는 이름으로 설법하였다.

사실 초기불교에서 대승에 이르기까지 느낌과 상상 그리고 기억은 처음부터 금지하고 지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정 과정에 있어 활용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스님은 경론에 나타나는 관법과 함께 수행 위차(位次)를 비교적으로 제시하여 안목을 넓게 해주었다. 위차는 점차차제의 수행단계를 말한다. 이러한 수행론은 선정 이해를 다양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태안사 시민선방 ‘정중당’의 전경. 이곳에서 대학시절 청화 스님에게 수행 지도를 받았다.

이후의 집중 과정은 인도에서다. 1998년 박사 논문을 제출한 후 고엔까(S.N Goenka, 1924~ 2013)의 담마 아란야(Dhamma Aranya)라는 위빠사나 선원에서였다. 라자스탄(Rajasthan)주, 자이푸르(Jaipur) 산을 배경으로 건립된 선방의 외관은 미얀마 황금탑 양식이다. 이는 상당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원래 파고다는 불사리탑으로서 사리를 봉안하고 내부를 꽉 채운다. 이에 반해 고엔까는 파고다 내부를 채우지 않고 대신 대중 선방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불사리탑 안에서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의 법신사리를 구현해 내는 일로 만든 것이다. 선원의 도량에는 산에서 내려온 공작새가 여기저기 한가로이 거닐거나 아름다운 깃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빨간 부겐베리아 꽃과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자귀나무 등이 어우러진 도량의 군데군데에 개인 처소(kuti)가 마련되어 있다. 마치 별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개인 처소는 미얀마의 빠옥 총림과 비슷한데 원래는 초기불교경전에 나온다. 인도 불교 기원의 개인 거주 수행처의 이름이다. 그렇지만 처소 내부는 2인 1실로 중간 통로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침대가 배치된 것이 전부였다. 이를 독일인 요기(yogi)와 함께 사용했다. 인도나 미얀마에서는 요즘에도 선정 수행자를 요기라 부른다.

선원은 오전 4시에 기상해 4시 30분까지 대중 선실로 입실해야 했다. 2시간 동안의 아침 좌선 이후 오전 6시 30분부터 아침식사를 한다. 이후 오전 8시까지 자유 시간을 갖고 다시 대중 선실에서 오전 11시까지 약 3시간 동안의 좌선과 11시에 점심을 든다. 이후 오후 1시까지 휴식을 취하고 다시 오후 5시까지 한 시간 단위로 좌선을 한다. 오후 5시에도 미얀마와 달리 첫 입문하는 요기에는 간단한 종류의 음식이 주어졌다. 그리고 다시 오후 6시부터 9시30분까지 좌선과 고엔까의 법문을 오디오와 비디오로 시청하였다. 오후 9시 30분 이후부터 개인 처소에서 취침하여 다음날 새벽 4시에 기상하는 반복적인 일상이었다. 수행 시간은 새벽 2시간,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 그리고 밤 3시간이면 매일 11시간 정도이다.

고엔까는 인도 출신으로 미얀마에 살면서 재가자인 우 바킨(U Ba Khin)으로부터 위빠사나 수행을 전수받았다. 인도로 돌아와 1976년 세운 수행처를 인도인은 물론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찾는 선원으로 발전시켰다.

수행은 10일 단위로 과정이 올라가는데 입방과 함께 오계에서 팔재계의 수지와 묵언을 해야 한다. 경행보다는 좌선을 위주로 한다. 단체 좌선시 같은 공간에서 남녀가 구분되어 앉는다. 대략 100명 정도로 남녀가 반반이었다. 약간 어두운 조명에 남녀가 줄을 맞춰 앉고 맨 앞에는 남녀 지도자 두 명이 약간 높은 자리에 앉아 대중을 바라보며 지도하였다.

일상으로 좌선과 방선을 규칙적으로 행한다. 좌선 중심에서 처음 3일은 출입식념과 이후 6일 동안은 출입식념에 따른 삼매력으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감각을 관찰하도록 한다. 이때 몸을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서 차례로 관찰하게 하는데 이전부터 해왔던 익숙한 행법이어서 반가웠다. 이는 초기경전에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 맥락에서 설해지는 행법이다. 더 나아가 반복적으로 신념처와 수념처에 집중하도록 이끌었다. 기본적으로 좌선 위주의 위빠사나인 것이다.

입정과 출정 시 고엔까의 ‘자비 게송’을 녹음기로 틀어준다. 이 ‘자비 게송’은 초기경전에 나오는데 아직도 그 여운이 귓가에 남아 있을 정도로 부드럽고 감미롭다. ‘자비 게송’은 늘 편안하고 안정적인 마음 상태로 연결시켜주었다. 언제나 자연스럽게 입정하고 자연스럽게 출정하도록 도와주었다.

고엔까 지도의 수행은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편하고 안정된 마음 상태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이를 바탕으로 신념처와 수념처 중심의 위빠사나로 발전시킨다. 특히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반복적인 자비관은 매사를 자비롭게 받아들이고 보내는 높은 수용력의 마음 상태로 만든다. 마지막 날은 모든 존재에게 행복이 확장되기를 염원하는 자비관 회향으로 마친다.

고엔까 수행처에서 첫 입문자는 미얀마와 달리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밤 시간이 되면 여기저기에서 트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오후 불식하는 미얀마 수행처에서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다.

고엔까 선원은 대중 선방 이후 마지막 과정이 가까워지면 1~2평가량의 1인 공간의 좌선실이 주어진다. 마치 어두운 소굴같이 느껴졌다. 옆방 젊은 인도 요기는 혼자 계속해서 떠들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이 같은 경우에서 어떤 한국의 한 수행자는 옆방에서 나는 방귀소리와 하품소리를 세어 보았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처음 며칠 동안은 하루 내내 하품소리만 내던 사람이 며칠 지나니 차츰 조용해지고 참선을 하더라는 것이다.

고엔까 수행처는 기본적으로 숙식을 포함한 거주 비용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는 인도와 미얀마불교의 전통이다. 초기경전에서 ‘(설)법은 댓가(돈)로 거래될 수 없다’는 부처님의 정신을 따른 것이다. 이 때문에 기본적으로 수행처에 입방한 누구나 무료인데 자율적으로 기부는 가능하다. 입방과 함께 조건부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순순하다. 또한 유럽과 미주 등지에서 여행경비를 아끼려는 배낭여행자들도 많이 온다고 한다.

하지만 고엔까 수행처는 공부했던 선배 수행자들의 보시에 의해 문제없이 유지된다하니 놀랍다. 고엔까의 법력은 대단하다. 45년 이상의 활동으로 감화를 받은 지도자들은 계속 배출되었다. 이제 그의 수행처는 세계 방방곡곡에 퍼져 수행되고 있다.

오늘날 고엔까 이름의 선원은 아시아는 물론 유럽, 미주, 아프리카, 호주 등에서 행해진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스님들은 물론 일반인도 고엔까 위빠사나 덕을 입었다.

고엔까의 불법 포교와 활동 역량은 실로 위대하다. 아마 인도불교사에 있어 스리랑카 출신으로 인도불교 부흥운동을 전개한 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1864~1933)와 함께 인도 출신 고엔까는 불교를 빛낸 인물로 길이 평가될 것이다. 그들 모두는 재가의 몸으로 전세계를 무대로 불교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고엔까는 미얀마로 간 인도불교의 수행법을 다시 인도로 복원시켜 세계로 펼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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