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부유한 사람이 참된 부자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 참된 부자
  • 임종욱 소설가
  • 승인 2019.01.3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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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일등(貧者一燈)과 자행속수(自行束脩)

가난 속에서 꽃피는 따뜻한 인정

이백의 말마따나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바람을 쐬고 싶을 만큼 무덥던 여름이 언제인가 싶게 지나갔다. 이제는 내가 사는 남녘 땅 남해에서도 밤이면 한기가 느껴질 만큼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음양의 이치는 서로 상응하는지라 더운 여름에 값하는지 올 겨울은 유난히 춥게 느껴진다. 살을 에는 혹한이 몰아친다면 넉살 좋은 이백도 이빨이 깨지도록 덜덜 떨면서 평형(烹刑)이라도 당하고 싶다며 너스레를 떨지도 모르겠다.

가르침에 차별을 두지 않은
부처와 공자, 빈곤 아픔 치유
상대적 빈곤 여의고 행복 찾자

몸이 추운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마음이 추우면 괴로움을 넘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누구는 질리게 잘 살아 더울 때는 춥게 살고 추울 때는 덥게 살면서, 부유함을 당연한 혜택으로 알며 살아간다. 그러나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이들은 더위도 끔찍하고 추위는 지옥살이다. 열탕(熱湯) 지옥이란 말은 있어도 혹한(酷寒) 지옥이란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사람에게는 추위보다 더위가 더 고통스러운 것인가 보다. 그러나 열대야에 허덕이다 죽었다는 사람은 없고 강추위에 동사했다는 사건은 접하니, 추위가 더 큰 고통이 아닐까?

추위가 야금야금 에워싸는 이 즈음이면 늘 떠오르는 작품이 있으니, 오 헨리가 쓴 〈경찰과 송가〉란 단편소설이다. 추위를 피해 감옥에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다 다 실패하고 이제는 사람답게 살아야겠다고 개심(改心)하니 덜컥 경찰에 잡혀 3개월 구류형을 선고받는다는 얘기다. 누구보다 인생의 추위를 톡톡히 맛본 오 헨리여서 그런지, 그는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 얘기를 많이 풀어놓았다. 물론 주제야 가난이 인간을 결코 불행하게는 못한다고 역설하는데, 위로는 되지만 대안일 수는 없다. 누가 가난을 대물림하면서 살고 싶겠는가. 옛날 선비들은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역설했고, 〈성경〉에도 보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면서 “부자가 천국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기보다 힘들다”고 했지만, 어찌 보면 다 배 부른 자들의 궤변처럼 들린다.

그러나 적빈(赤貧)의 삶과 지족(知足)의 삶이 평범한 사람들과 동떨어진 거룩한 수행자의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사람의 욕망은 한이 없어 아무리 부유해도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진짜 가난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가난해지기 때문이다. 위만 보고 사는 건 발전의 디딤돌이 되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을 가난의 나락에 떨어뜨리는 썩은 동아줄일 뿐이다. 가난한 이들도 진실로 평등했던 시절, 아니 가난했지만 삶을 긍정하면서 이웃과 인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세상, 그런 시절과 세상에서 살던 사람은 없었을까?

가난한 난타가 가장 부유했다는 역설

그럴 때 누구나 한번쯤 머릿속에서 그렸을 법한 이야기가 ‘빈자일등’이 아닐까? ‘가난한 사람의 등불 하나’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현우경(賢愚經)〉의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에 나온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의 어느 정사(精舍)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위대한 각자(覺者)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그곳 사람들이 저마다 정성을 다해 값지고 화려한 예물을 준비했다. 그러나 정성은 하늘보다 높아도 품에는 동전 한 닢 없는 사람도 있었다. 떠돌며 구걸로 살아가던 가난한 여인 난타(難陀)가 그랬다. 난타는 맥이 빠져 털썩 주저앉아 슬프게 중얼거렸다.

“나는 전생에 저지른 업보 때문에 가난하고 천한 몸으로 태어나 삶이 부끄러운데, 죄업을 씻을 기회가 왔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모처럼 고마우신 스님을 뵙게 되었는데도 공양을 드릴 게 아무 것도 없어. 너무나 슬픈 일이야.”

심성이 고운 여인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일어나 하루 종일 시장과 골목을 떠돌며 구걸해서 겨우 한 푼 돈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 돈은 한 종지 기름을 얻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기름집 주인이 혀를 끌끌 찼다.

“여인이여. 이 돈으로는 맑은 물 한 그릇도 살 수 없네. 가난한 그대가 어디에 쓰려고 기름을 찾소?”

어깨가 축 처진 여인이 힘없이 대꾸했다.

“오늘 우리 마을에 부처님께서 오셨어요. 그분의 법문을 듣고 축복을 받으면 다음 생의 제 삶이 이렇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정성으로 드릴 게 제게는 아무 것도 없답니다. 이 돈이 제가 가진 재산 전부인데, 기름 한 종지도 살 수 없으니 어쩌면 좋을까요?”

여인의 애를 끊을 듯한 넋두리를 들은 기름집 주인은 여인의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저 여인보다 만 배는 더 부유할 텐데, 마음 씀씀이는 만 분의 일도 못 되는구나. 저 여인을 돕지 않는다면 나는 분명히 지옥에 떨어질 거야.”

한 푼 돈을 받은 기름집 주인은 가장 좋은 기름을 넉넉하게 떠서 여인에게 주었다.

기름을 받은 여인은 예쁜 등을 하나 만들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바쳤다. 부유하고 권력 있는 사람이 바친 것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여인에게는 세상에 하나뿐인 등불이었다. 갈 곳이 없는 여인은 등불의 꽃밭 곁을 지키면서 합장한 채 밤을 지새웠다.

그날 밤 그곳에 매서운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람을 이기지 못한 등불은 하나둘 꺼졌고, 밤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그런데 그 수많은 등불이 다 앙상한 심지를 보였어도, 가난한 여인 난타가 바친 등불만은 흔들림 없이 새벽까지 남아서 홀로 세상의 어둠을 지워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허! 이 등불은 무슨 신령한 힘이 있어 풍파에도 불꽃을 잃지 않는가? 너무나 갸륵한 일이구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부처님도 밖으로 나오셨다. 동녘에서 떠오르는 햇살보다 더 환하고 더 멀리 한 등불이 빛나고 있는 거룩한 광경을 보셨다.

“부처님, 정말 신통방통하네요. 밤새 그 바람몰이에도 이 등불만 제 구실을 다합니다.”

부처님은 대자대비한 미소를 머금은 채 등불을 바라보았다. 그때 난타도 무슨 일인가 싶어 무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랬더니 바로 제가 올린 등불이 부처님의 전신을 묵묵히 비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느꺼운 마음과 송구한 마음을 아로새긴 채 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제가 올린 등불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빛을 잃지 않은 걸까요?”

사정을 소상하게 들은 부처님은 감격에 몸을 떠는 여인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대중을 보며 말씀하셨다.

“누구의 등불인들 고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바람이 불면 꺼지는 것이 등불이지만, 이 여인의 등불이 담은 빛은 기름만 타올라 세상을 비추는 게 아닙니다. 이 여인은 이미 부처가 되었어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가난한 여인 난타를 거두어 비구니로 받아들였다. 가장 불행했던 여인이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진실한 평등과 삶을 긍정하면서 인정을 잃지 않으면 가난한 삶에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이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가난한 여인 난타만큼이나 기름집 주인의 선행도 잊을 수 없다. 넉넉하게 기름을 희사한 기름집 주인도 참된 부자였고 거룩한 사람이었다.

가난도 배움의 열정을 꺾지는 못한다

〈논어〉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논어〉 ‘술이편’과 ‘위령공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 그것이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한 묶음의 포를 예물로 가져온 사람이라면 내가 그를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노라.”(子曰 自行束脩以上은 吾未嘗無誨焉이로라)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일단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되느니라.”(子曰 有敎면 無類니라)

부처님과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공자 역시 참된 삶의 길을 열었다. 공자 문하에는 3000명이나 되는 제자가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 많은 제자가 다 부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배움의 열정이 떨어질 리는 없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원하는 배움의 길을 가지 못한다면, 그런 세상은 축생들이 사는 지옥일 것이다.

위에 나오는 속수(束脩)는 보잘것없는 예물을 말한다. 수(脩)는 포(脯), 즉 가늘게 썬 고기를 말하는데, 그 가는 고기 열 개를 하나로 묶은 것이 속(束)이다. 한 속의 포라면 아주 작은 양이다. 공자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물품이라도 배움의 정성을 보여준다면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가르침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과연 ‘속수’의 정성을 보여 문하에 들어온 제자가 누굴까 떠올려본다. 먼저 ‘안빈낙도’를 실천했다는 안연(顔淵)이 생각나지만, 그보다는 번지(樊遲)라 불린 제자가 장본인일 것이라 믿는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았던 번지는 그리 총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배움의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가난한 번지가 들고 갈 수 있는 예물은 속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제자로 받아들여졌고, 스승의 수레를 모는 역할을 맡았다.

가난했지만 세상 누구도 가질 수 없었던 행복을 찾은 이들이 있다면 가난한 여인 난타와 가난한 학생 번지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살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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