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충실하게 하루하루 하루살이로 살라
그대로 충실하게 하루하루 하루살이로 살라
  • 대행 스님
  • 승인 2019.01.30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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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선 안 됩니다

여러분과 오늘, 새해에 또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 어떻게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을 해서 굴림을 굴리는지 한 번 더 생각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잘못된 건 고치고 잘되는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더랍니다. 당시 중국에 있어서는 우리 조선이 소국이었죠. 그런데 중국에서 탄압을 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에 의인이 있나 없나를 알아 가지고 오라고 사신을 많이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건너와야 하니까 그때에 우리나라에서는 마중 나가는 사람을 잘 뽑아서 내보내야 했었죠. 이건 국운이 달린 일이라 때에 따라서는 소신껏 하지 않고는 안 되게끔 돼 있었거든요.

이 몸뚱이 자생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제도가 돼서
보살로 화하게 되면 이 물주머니, 공기주머니에서도
다 탁 트인단 말입니다, 자유스럽게.

그래서 지금으로 치면 시라면 시, 또는 군이면 군에서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어 봐서, 입이 무겁고 아주 청렴하고 이 마음공부에 정말이지 집념을 가지고 노력을 하는 사람을 뽑았죠. 뽑아서 그 사람을 안내자로 내보냈는데 사신들이 강을 건너자마자 새참으로 떡이 나갔더랍니다. 그래서 모래사장에 가지고 나간 상을 놓고서 떡을 차려 놨는데 그쪽 사신이 거기서부터 시험을 하기 시작해요. 한번 시험해 보고 자기한테 하치않게 여겨지는 사람이라면 나라 전체를 그냥 하치않게 보거든요. 아주 제일 중요한 자리죠. 거기서 안내자로 나간 사람이 시장도 하고 그러니깐 떡을 냉큼 다섯 개를 집어 먹었죠. 그런데 그쪽에서는 떡을 먹다 말고 손가락을 세 개를 척 들면서 아무 말 없이 무언(無言)의 질문을 딱 던지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은요, 그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세 개를 먹었느냐?” 하는 줄 알고 “난 떡을 다섯 개를 먹었다.” 하고 다섯 손가락을 탁 내밀었단 말입니다. 하하하…. 다섯 개를 탁 내미니까 그쪽에서는 ‘허, 삼강오륜을 그냥 통달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고선 가슴이 뜨끔해서 깜짝 놀라면서 또 이렇게 (네모 모양을 그려 보이시며) 하거든요. 아, 그러니깐 “너는 네모반듯한 떡을 먹었느냐?” 이렇게 묻는 줄 알고 또 “동그란 떡을 먹었다.” 하고선 이렇게 (동그라미 모양을 그려 보이시며) 그렸단 말입니다. 하하하…. 얼마나 재밌는 얘깁니까?

그런데 그렇게 한 이유가 어딨느냐 하면 여러분은 알는지 모르겠지만, 육신으로 먼저 태어나고 나중에 정신계의 ‘참나’가, 뿌리가 태어나야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사람은 어언간에 내면에서 뿌리가 살아난 거예요. 살아나서, 확연히 깨치진 못했어도 거기서 뜻을 일러 준 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그 떡 먹은 걸로 그냥 돌려서 일러 준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퍼뜩퍼뜩 생각을 했지. ‘아, 떡을 반듯한 거 먹었느냐 묻는구나.’ 그러고선 “동그란 거 먹었다.” 그러고 “셋을 먹었느냐?” 하니까 “다섯 개를 먹었다.” 이렇게 한 거죠.

우리가 지금 이런 얘기를 왜 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이 마음공부를 한다면 망하게 만들려고 가는 길을 스스로 이 안에서 흥하게 돌릴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내가 모든 거를 다스려서 완벽하게 주장자를 만들어 놓는다면 그 자체의 주장자는 자기 몸을 마음대로 이끌 수 있는 겁니다. 이 몸속에 뭉쳐 있는 모든 악업 선업 그 자체들은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거는 피치 못해요. 그 모든 걸 한마음으로 모아서 주장자가 된 것은 자기 몸뚱이를 그냥 이끌고 가는 겁니다. 마음으로 그 마음을 먹게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 사람도 그렇게 마음을 떡을 먹는 걸로 생각을 나게 해 준 겁니다. 그 사람이 농부가 돼서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중국에서 조선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어 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네들이 ‘야! 안내하는 사람도 이러하니 저 안에서야 어찌 감히 말이나 물어보랴.’ 해서 그냥 떨려서 한마디도 묻지 못하고 슬슬 돌아다니며 구경만 하곤 갔답니다. 가서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조선에는 의인들이 많아서 안내하는 사람까지 그냥 하늘을 알고 땅을 알고, 삼강오륜을 알고 아주 무불통지했더라.” 하고 얘기를 하니까 혀끝을 척 차면서 하는 소리가 “야! 그 나라를 치게 되면은 우리나라가 망하겠구나. 그러니까 치지 못하겠다.” 하더랍니다.

그 뜻을 아십니까? 이 마음공부 하시는 양반들! 하하하. 법이 법이라는 이름이 따르는 것은 그것이 항상 평등공(平等空)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둘이 아니다, 생명이 둘이 아니고 모두가 둘이 아니게 돌아간다 하는 평등공!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까 공(空)! 그래서 평등공에서 나오는 법은, 즉 말하자면 방망이가 오면 철퇴가 들어간다는 얘기예요.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이 무궁무진한 법을 우리는 이 몸 떨어지기 전에 잘 알아서 행할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만한 것 하나도 허술히 듣지 말고 허술히 행하지 말라, 업신여기지 말고.

옛날에도 얘기했죠. 두 친구가 가다가 석존께서 설법하시는 걸 듣고 한 사람은 사기라고 생각을 했고, 또 한 사람은 나라마다 전체 왕들을 모아 놔도 저렇게 이익하게 말씀은 못하실 거라고 너무나 기쁘게 생각을 하면서 ‘나도 저런 설법의 뜻을 받아서 모르는 나라에서 좀 펴 봤으면….’ 했더랍니다. 그랬는데 웬걸요, 사기라고 생각을 한 사람은 그날 술을 잔뜩 먹고, 옛날에는 수레가 백 대씩 이렇게 장으로 나가는 행렬들이 있었죠. 그런데 술을 먹고 쓰러져 가지곤 수레에 치여서 죽고, 한 사람은 친구가 죽으니까 집으로 갈 수가 없어서 물건을 짊어지고선 배에 실어 가지고 어떤 섬나라로 갔더랍니다. 이런 말은 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나오네요. 하하하.

그때 그 나라의 인군이 돌아가셔서 새 인군을 뽑는데 그 나라는 어떻게 된 일인지 국민이 뽑는 게 아니고 말이 뽑아요, 말! 그 인군이 타고 다니던 말이 금으로다가 옷을 해서 척 걸치고선 나와서 뽑는 거죠. 그런 나라예요. 그 사람이 짐들은 어디다가 맡겨 놓고 조그마한 보따리를 하나 짊어지고 팔 양으로 사방을 다 구경을 하고 다니다가 어느 곳에 이르렀더니, 양쪽으로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찼는데 슬슬 그 말이 오더랍니다. 그 말이 어떻게 영명한지 떡 오더니만 고개를 돌려서 그 보따리 낀 사람을 척 보더니, 이쪽 보고 저쪽 보고 하다가, 다시 고개가 이쪽으로 들어오더니 사람 틈에 낀 그 사람을 엉덩이로 자꾸 밀어서 그 사람이 물러나게 하더랍니다. 그러고는 자꾸 피하니깐 자꾸 쫓아 들어가요. 그러니까 주위에 그 말을 쫓아오는 사람들이, 정승들이나 뭐, 이런 사람이겠죠. 이런 분들이 ‘아, 여기 인군 될 분이 있나 보다.’ 그러는데 이 사람을 태워도 팽개치고 저 사람을 태워도 또 팽개치더니 그 보따리 낀 사람을 태우니깐 그냥 턱 타고 가게 하거든요.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그 말을 타고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인군이 되니까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아, 여기도 부처님을 모셔다가 설법을 듣게 해야겠구나.’ 해서, 부처님을 모셔다 설법을 듣게 해서 그 나라를 왕성하게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냥 빼먹기도 하고, 귀찮으니까. 하하하….

그랬듯이 우리가 마음을 잘 써야 된다는 겁니다. 아까 법사 스님이 물러서지 않는 정진력과 실천력과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어떠한 살림을 살든지, 운동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내가 있기 때문에 종교도 있고 상대도 있고, 집안도 있고 부모 자식도 있고, 형제도 있는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두가 첫째도 마음이요, 둘째도 마음이요, 셋째도 마음이에요.

또 그 마음이 처음에 왈딱 일어날 때에 탁 놔야지 그게 벌어져 가지고 얽히고설킨 이후에 놓는 것은 놓는 게 아니라고 법사 스님이 그러셨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말도 조심해야 하고, 남이 언짢아할지 좋아할지 미리 알아서 말을 하는 것이, 싸움을 붙이지도 않고 가정도 화목하게 가져올 수 있어서 아주 효과가 크죠. 또 우리가 살아나가는 가운데 닥치는 일이 어디 한두 건입니까? 그렇지 않죠. 바깥에서나 안에서나, 애들하고나, 가지가지 상황들이 얼마나 찰나찰나 닥쳐오는지, 또 어떤 때는 즐거움도 닥쳐와요. 뭐, 어려움만 닥쳐오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즐거움은 잠시 잠깐이고 그냥 어려운 일만 많이 닥치죠. 그러니까 그 어려움과 즐거움을 송두리째 놓으라고 했죠. 즐거움은 감사하게 놓고, 어려움은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어려움이니까 어렵지 않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어.’ 하고 되돌려서 맑은 물로 대치해서 쓰라고 하는 말을 수차에 했을 겁니다, 아마.

그러니까 생활하는 물질세계가 50%라고 한다면 정신세계가 또 50%가 된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정맥 동맥이 같이 둘 아니게 돌아가듯,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 아니게 같이 돌아가느니만큼 정신계를 무시하면 안 되죠. 정신계로 돌아서 현실계로 나오는 거니깐요. 어차피 그렇게 돌아 나올 거라면 먼저 거기다 넣어서 돌아 나오게 만들어야죠. 용광로에다 헌쇠를 넣으니까 재생돼서 새 걸로 나오지 않습니까? 연탄도 부서진 거 갖다 넣으면 재생돼서 새로이 나옵니다. 방편으로 그런 표현을 해서 안됐지만요, 하치 못한 방편이라고 우습게 생각하지 마세요. 크나 작으나 방편은 똑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저 부처님을 숭배만 할 줄 알았지, 그리고 숭배를 합네 하면서 이만큼 고(苦)덩어리를 그냥 갖다가 집어넣고는 그거를 감해 달라고, 우리 남편 잘되고 자식 잘되고 뭐, 일가친척까지도 모두 잘되게 해 달라고 그냥 잡다하게 빌 뿐인데,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죠. 내가 항상 얘기하죠.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모든 에너지가 흡수돼서 올라간다고요. 그리고 나무는 태양열과 공기, 그 어떠한 에너지도 다 아래로 내려보내서, 이렇게 오르락내리락해야 물바퀴가 저절로 돌아가듯 샘물이 저절로 돌아서 양식으로 먹을 수가 있고 푸르르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뿌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 나무가 만약에 딴 나무에서 에너지가 나와서 도와줄 줄 알고 딴 형상한테 빌고 딴 이름을 믿고 기도하고 빈다면 거기서 에너지를 그리로 보내 줄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자기 나무의 자기 뿌리만이 서로 상응하면서 서로 이익을 주고 공덕을 줍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이 육체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생명들이 들어 있고, 나무에는 이파리들이 헤아릴 수 없이 있습니다. 요 향나무 이파리 같은 거는 헤아릴 수도 없어요. 그렇듯이 우리네 내면, 그 육체 안에 생명들이 각계각층 모습을 가지고 천차만별로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것이 수억 광년 전부터 진화돼서 바뀌어서 모습을 바꿔 가지고 나왔다는 증명서예요, 증명서. 내 몸뚱이가 증명서라고요. 그러니 어찌 안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몸뚱이를 배로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는 너무 커서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다의 중간에 떠 있는 겁니다. 이게 중세계예요. 중간에 서서 배를 타고 가는 셈이란 얘깁니다. 이 몸뚱이를 배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중생들이 그 속에 잔뜩 탔단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선장이 노를 젓고 가는데 이 배 안에서 이러쿵저러쿵하고 울근불근해서 배가 뒤집히면 너와 내가 다 죽어요, 선장이고 뭐고.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중생은 선장의 말을 들어야 하고 선장은 내 몸 안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한마음으로 다스리면서 ‘그 한 구멍에서 나오는 거니 한 구멍에서만이 대치할 수 있다. 한 구멍에서 병을 내보냈으니까 한 구멍에서만 병을 낫게 할 수 있다.’ 하는 겁니다.

그건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자동적인 컴퓨터에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 있거든요. 그래서 그 인연의 악업 선업이 영혼과 부착이 돼 가지고 부모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나오거든요. 그러니 거기서 나오지 딴 데서 나오는 게 하나도 없어요. 딴 데서 오는 거라곤 없어요. 안의 악업 선업에서 좋고 기쁘게 나올 수도 있고 아주 악으로 나올 수도 있는 거지, 다른 데선 올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거기에서, 일을 할래도 수없이 안되는 수도 있고 잘되는 수도 있고, 해 보려고 하면 망하고, 허허허…, 좀 살 만하고 조금 모였다 하면 다 나가고 하는 문제들이 말로는 다 할 수 없이 건건이 생기곤 하죠. 그것이 바로 선악업에서 나오는 까닭이거든요. 그러니 들어오는 거마다 불바퀴에다 놓으라고 하죠. 오는 대로 그냥 거기 집어넣어라. 그러면 타 버린다. 닥치는 대로 ‘너만이 할 수 있어.’ 하는 것이지, 그냥 ‘아이고, 버리자.’ 그러고 놓는 게 아닙니다. ‘네가 이렇게 나오게 했으니까 안 나오게도 할 수 있지 않아.’ 하고 놓고, 상황에 따라서 또 ‘너로 인해서 생긴 거니까 네가 모든 걸 막아야 하지 않아.’ 하고 또 놓고 ‘이것은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어.’ 하고 놓고, ‘너만이 집안을 화목하게 할 수 있어.’ 하고 놓고, 그 건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이 잘못됐다거나, 잡혀갔다거나, 병이 들었다거나, 공부를 안 하고 나가서 논다거나, 건건이 말입니다. 장애인이 돼서 애로가 많은 집들도 있고, 정신분열증으로 식구들이 전부 애를 쓰는 집들도 많고 이런데, 그거를 어떻게 다 대치를 해야 옳으냐는 겁니다. 우리가 시급한 게 지금 그거지 딴 게 있습니까? 내 몸과 가족들과, 모든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때에 바로 내 성취도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몸뚱이 속의 자생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제도가 돼서 보살로 화하게 되면, 이 세상 물주머니, 공기주머니에서도 다 탁 트인단 말입니다, 자유스럽게. 그러니 안 하고 배기겠습니까?

지금 세계적으로 볼 때 정신계와 물질계의 교차로에 서 있으면서 정신계를 받아들이려고 무척 애를 쓰고들 있습니다, 정신계를 돌아서 이렇게 나오니까. 의학계에서도 볼 때에, 대뇌를 통해서 소뇌를 통해서 중뇌에서 책정을 해 가지고 사대(四大)로 통신이 되는 겁니다. (앞줄에 앉아 있는 의사를 보시며) 안 그렇습니까, 의사 나으리? 그, 약을 파는 사람 보고 뭐라고 그러지? 약사? 응, 난 이름도 몰라요. 약사나 의사도 이런 공부를 안 한 사람 다르고 한 사람이 달라요. 안 한 사람은 그냥 건건이 걸려요. 우리 절에도 산부인과 하는 분들도 많이 있고 그런데요, 하나도 걸림이 없이 치료하기 때문에 그 애로가 많았던 게 다 없어졌대요. 무슨 까닭일까요, 그게? 대치가 되니까 그 문제들이 모두 해결이 되는 거죠.

그리고 그저 아주 몹쓸 감기가 들어도, 폐가 나빠질 감기라도 소화제를 먹고 그냥 낫는단 말입니다. 이건 무슨 까닭이냐 이거죠. 약을 주고받는 그 순간에 바로 직속으로 통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바로 낫는 겁니다. 그러니 눈앞에 그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보이지 않는 데가 더 무섭다는 걸 아셔야 돼요. 보이지 않는 데가 묘법이라는 걸 아셔야 돼요.

우리가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됩니다. 왜 내가 법사 스님을 다달이 이렇게 모시느냐 하면, 나는 위에서부터 내리 그냥 그 뜻을 배워 나왔거든요. 이렇게 아래에서부터 차차 올라가면서 배운 게 아니에요, 저는요. 아예 그냥, 그냥 돼 버려서요. 그러니 이 현 시점에서 사회의 물질적인 부분에서의 예의나 그런 것들을, 내가 혹시나 모르면 대치해 주십사 했던 거죠. 그래서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법사 스님이 말씀하시는 거와 내가 말하는 게 둘이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가 살림살이하는 것이 전부 그 마음에서 나오는 거니까, 정신계에서 나오는 거니까, 정맥과 동맥 이 둘을 놓고 이것이 아니다, 이것이 맞다 이럴 수가 없어요.

그렇듯이 정신계와 물질계는 동일하게 같이 지금 찰나찰나 고정됨이 없이 돌고 있거든요. 나로서는 부족하든지 부족지 않든지 간에 온 힘을 다해서 자세히 하려고 해도 자세히 못할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이 뜨이고 귀가 떠져야 내가 자세히 안 해도, 컵만 들어도 벌써 ‘저건 무슨 소리야.’ 하고 알게끔 돼 있습니다. 소가 음메 해도 벌써 무슨 소린지 알게끔 돼 있고요. 개가 멍멍 짖어도 무슨 소린지 알게끔 돼 있어요. 꽃이 바들바들 떨어도요, 꽃도 살아 있거든요. 말을 하고 있다고요. 그런 거 한번 보셨습니까? 아침에 해가 떴을 때는 꽃이 아주 기지개를 착 펴고요. 저녁나절이 되면 하나하나 오므라져요.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예전에 산에 다니다 보면요, 무엇이든 딱 닿았다 하면 탁 말아 들이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옷이든 뭐든 말아 들일 뿐만 아니라, 벌레가 오면 모두 말아 들여서 그냥 삼키고 말아요. 껍데기만 남아요. 그런데 어떻게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걸 보고 느끼고 알 수 있으니 모두 스승이지 어디 업신여겨 볼 만한 게 뭐가 있습니까? 돌 하나가 굴러가더라도 그것을 보면서 ‘그 돌이 참 똥 덩어리처럼 굴러가네.’ 하고 웃기도 합니다. 또는 물이 흘러갈 때에 바위가 가로막고 있으면 돌아갑니다. 그것이 다 말없이 가르치는 소중한 스승입니다, 전부가. 바다를 내려다보십시오. 바다가 내가 이럭한단 말이 없어도 수많은 물줄기가 다 그리로 흘러가고, 비가 쏟아지면 빗물, 똥물이면 똥물, 악취 나는 물, 구정물 뭐,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가도, 오만 게 다 들어가도 여여하게 말없이 받아들이고 있어요. 받아들였다 하면 그 흔적은 없어지죠. 그러니 모두가 스승이 아니라고 볼 수 없겠죠.

불교라는 것이 부처님이 계셔서만 불법이 아니고, 머리를 깎고 목탁을 쳐서만 불교가 아닙니다. 일체 만물만생의 생명이 불(佛)이요,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통신과 통신이 통하고, 말과 말이 통하고, 이렇게 일체 만물이 다 서로 끝없이 전달하고 돌아가는 이 자체가 바로 교(敎)입니다. 그리고 스님들이 왜 머리를 깎는 줄 아십니까? 나오면 깎아 버리고 나오면 깎아 버리는 원인이 어딨을까? “살아나가는 모든 게 찰나찰나 바뀌고 화해서 나투니, 지나간 것도 없고 앞으로 다가올 것도 없고 그대로 영원한 오늘이다. 그런데 오늘도 공했으니 세월과 네월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대로 충실하게 하루하루 하루살이로 살아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한 무명초를 다 깎아 버리면 또 나고, 그게 정상이죠. 깎아 버리고 아주 안 난다면 정상이 아니죠. 나고 또 깎고, 나고 또 깎고, 우리가 한 발짝 딛고 또 딛고, 한 발짝 딛고 또 딛고, 밥 먹고 또 먹고, 똥 누고 또 누고 이러니까 끝없이 우리가 이어지는 거죠. 이게 불교예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만사가 다,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하는 게 다 그냥 불교죠. 그런데 불교 안에 종교가 있는 거지 불교가 따로 개별적으로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외국에 가서도 “가톨릭교 기독교 따로따로 나누지만 불교 안에 종교가 전부 있는 거다. 그 불교 안에서 걸상 하나 이쪽으로 놓고 내 걸상, 저쪽으로 하나 놓고 내 걸상 하는 것이니 그것은 너무 옹졸한 짓이야. 지구 안에 우리 생물들이 다 살고 있는데, 그 안에서 요리 피하면 뭘 하고 저리 피하면 뭘 하냐? 그리고 공동묘지에 가 보니까 케네디 대통령 묘에는 불이 밤이나 낮이나 항상 나오게 만들어져 있었어. 그 불의 뜻을 아느냐? 세계 전체, 이 우주 전체가 모두 불바퀴가 헤아릴 수 없이 있다. 그게 불이 둘이냐? 생명이 또 둘이냐? 모습은 다 다를지언정 어찌 생명이야 둘이겠느냐?” 하고 얘기하니까 고개를 끄떡거리고 그렇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거기서 모여서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아, 들어 주니까 재미있데요. 그 사람네들은 다 가톨릭교 기독교거든요. 하하하…, 어느 스님이 들어갔다 내쫓겼다면서 신도들이 내게 들어가지 말라고 그랬거든요. 초청을 해 놓고 트릿하면 그냥 내쫓는대요.

그래도 사람들이 강당에 꽉 찼는데 들어가서 (주먹으로 법상을 치는 모습을 보이시면서) 꽝꽝 치고 얘기했죠. 허허허…. 그랬더니 팥 넣고 찰밥을 해서 이런 들통으로 하나를 하고요, 찌개를 그냥 한 솥을 해서 들고 노비까지 가지고 왔어요. 쫓겨나지 않고요. 허허허…. 그래서 편도 가르지 않았고, 또 진리가 편이 갈라져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참 좋았습니다. 그래도 그 말귀를 알아듣고 그렇게 해 주시는 그 마음도 역시 동일하고요. 뭐, 기독교니 가톨릭교니 그런 것도 없이 아주 평화스럽고 좋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4년 1월 2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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