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안애어(和顔愛語)

‘웃는 얼굴에 부드러운 말씨’ 또는 ‘온화한 얼굴에 따뜻한 말씨’라는 뜻이다.

‘한자(漢字)’는 중국에서 만든 문자이다. 모든 언어와 문자는 장단점을 갖고 있는데, 한자의 장점은 넉 자(四字)를 조합하면 무엇이든지 100%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하드라마 같은 역사적 사건이나 한 시대의 사회상도 넉 자 속에서 해결한다. 넉 자면 무엇이든지 다 담아낼 수 있는 문자는 아마 한자밖에 없을 것이다.

항우와 유방의 ‘장강만리도(長江萬里圖)’ 같은 싸움도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네 글자 속에 압축하고, 오나라와 월나라의 끔찍한 20년 전쟁도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네 글자 속에 집어넣는다. ‘겨자씨 속에 수미산(우주)이 들어간다[須彌入芥子中]’고도 한다.

표의문자인 한자로 압축된 사자성어의 뜻을 우리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화안애어(和顔愛語)’를 ‘웃는 얼굴에 부드러운 말씨’, ‘온화한 얼굴에 따뜻한 말씨’라고 했으나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달리 재주도 없다.

얼굴이 그 사람을 말해 주듯이 ‘첫인상’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백 번 가량 취업 이력서를 냈는데, 내는 족족 서류심사에 합격했으나 꼭 면접에서 낙방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인상 때문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온화하고 너그러운 얼굴, 좋은 인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까칠하고 차가운 얼굴, 우울하고 저승사자 같은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따뜻한 말투로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엇이 그렇게 불만인지 항상 퉁퉁 거리는 말투, 곧 시비를 걸어올 것 같은 까칠한 말투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인상이나 말씨는 그 사람의 사고방식, 삶의 방식, 인격,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말해 주기도 한다.

대체로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 미래지향적인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까칠한 사람, 차가운 사람은 부정적인 사고(생각)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화안애어(和顔愛語)’는 대승경전인 <무량수경>에 나오는 사자성어이다. ‘화안애어’는 법장보살이 쌓은 보살행의 하나로, 곧 불보살의 너그럽고 자비스러운 얼굴을 가리킨다.

우리도 부처님이나 보살처럼 그런 얼굴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못하는 것은 핑계이고 하기 싫어서, 마음을 먹지 않아서일 뿐이다.

우리는 나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을 이해할 줄 모르면 세상을 이해할 줄 모르게 되고, 세상을 이해할 줄 모르는 것은 이기주의, 아집, 자기 중심적 사고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공자는 논어에서 ‘소인’이라고 했다. 소인은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웃음, 유머가 적고 무뚝뚝한 편이다. 친절도 면에서는 불친절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까칠한 말투, 불쾌한 말투를 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왜 그럴까? 불필요한 자존심, 에고가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화안애어’는 품성이고 인격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습관적, 혹은 무심코 내뱉는 까칠한 말 한마디로 인하여 결정적일 때 낭패를 맛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정적인 순간, 언제 그 사람을 또 만날지 모른다. 입버릇이 나쁘거나 말을 함부로 하면 뜻하지 않은 재앙을 만나게 된다. ‘구시화문(口是禍門)’, 될 수 있는 한 우리는 인자한 얼굴, 고운 말씨의 소유자가 되어야겠다. 이유 없이 욕하거나 헐뜯는말을 하지 않아야겠다. 싸늘하고 냉정한 얼굴, 싸움닭처럼 까칠한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내지 않는 얼굴[和顔], 사랑의 말[愛語]은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화안애어(和顔愛語)’는 곧 불보살의 마음과 얼굴이고 자비심의 완성이다. 그런 세상을 경전에서는 불국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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