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믿음(信) 편 4

종교는 경험이나 분석을 통해 옳고 그름이나 사실여부를 판단하는 체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하는 체계다. 종교가 지식이 아니라 불완전한 믿음의 체계라는 점에서 볼 때 어느 정도의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 잘못된 신앙으로 사람들을 이끌게 되면,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영생을 외치면서 집단자살을 행한 모 종교단체의 행위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신앙을 좀 더 냉철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질적으로 유치한 신앙이 아니라 성숙한 신앙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신비주의자로 알려진 구제프(Gorge Gurdjieffㆍ1877~1949)에 의하면 믿음에도 질적 구분이 있다고 한다. 그는 신앙을 기계적 믿음(mechanical faith)과 정서적 믿음(emotional faith), 그리고 자각적 믿음(conscious faith)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먼저 기계적 믿음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기계적으로 종교를 믿는 유형이다. 기계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디자인하고 만든 사람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교회나 성당, 절 등을 왔다 갔다 하는 유형이다. 이런 신앙은 자기 성찰이 결여됐다는 점에서 매우 유치하다고 할 수 있다. 구제프는 이런 믿음을 어리석음(foolishness)이라고 하였다.

정서적 믿음 역시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문제의식과 성찰이 부족한 유형이다. 사람들은 종교가 지니는 정서에 영향을 받아 귀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사찰의 고요한 분위기가 좋아서 불교를 믿기도 하고, 교회 성가대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에 매료되어 개신교를 믿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유형에서 주연은 종교적 정서가 되며 우리 자신은 조연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구제프는 정서적 믿음을 노예(slavery)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자각적 믿음은 내가 왜 종교를 믿는지, 종교가 내 삶에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하는 유형이다. 이는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깨어있는(conscious) 믿음이다. 구제프는 자각적 믿음을 자유(freedom)라고 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신앙을 통해 우리는 어리석음과 노예적 사유에서 벗어나 진정한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는 종교를 주체적으로 신앙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될 믿음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신앙도 성장하고 익어간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나 절을 다닐 때의 신앙과 어른이 되어 종교를 믿는 수준이 같을 수는 없다. 어릴 때는 교회나 절에 가서 기도만 하면 성적이 오르거나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어머니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신앙의 수준에 머문다면 이는 문제가 된다.

몸은 어른으로 성장했는데 지적 수준이 어린 아이의 상태라면,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어른으로 성장했는데도 불구하고 신앙이 어린 아이의 수준에 머문다면 종교적 삶이 유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은 없고 오직 기복만 남게 된다.

입시철만 되면 우리나라 교회나 성당, 사찰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나 붓다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종교 집단에서는 이런 마음을 이용해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신앙에도 분명 질이 있다. 내가 믿는 종교가 내 삶에 어떤 내용과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유치하고 위험할 뿐이다. 어른다운 신앙, 자기 성찰이 담긴 신앙, 제대로 익은 신앙에서 인격의 향기가 나는 법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수준에 있을까? 어리석음의 잠으로부터 우리의 삶(生)이 깨어날(覺) 수 있도록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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