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 선수(하)

1994년 10월,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에 갈색 진돗개 동상이 세워졌다. 그 옆에는 김일 선수 공덕비도 함께였다. 일본에서 외로운 투병생활을 하던 김일 선수가 한국으로 귀국한지 9개월 만의 일이었다. “고향에 진돗개 동상을 세우고 싶다”는 김 선수의 소원이 이뤄진 그 순간, 나는 마치 내 소원을 이룬 것처럼 기뻤다.

그로부터 1년 전, 나는 박치기왕의 딱한 사연을 우연히 듣고 무작정 후쿠오카로 떠났다. 그때 김일 선수는 지인들의 원조가 점점 끊어지고 있었다. 낡고 작은 서민병원에서 비참하게 죽어갈 운명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와의 인연으로 김 선수의 남은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진돗개동상 사연 특종 보도돼
‘김일 돕기 운동’ 각계 확산
사형수 영치금 등 성금 답지
병원 이사장 후원으로 귀국
13년 요양하며 자선활동 활발


진돗개에 얽힌 김 선수의 사연을 듣고 어떻게든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다짐은 했지만, 사실 나는 막막한 심정이었다. 나는 김 선수에게 비행기 표 값을 주고 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 선수를 도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나의 경제적인 형편도 문제였지만, 김 선수를 한국으로 데려온다고 해도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김 선수의 몸 상태는 병원에 입원해 매일 치료를 받아야하는 상황이었다. 비싼 치료비는 더욱 감당할 길이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친하게 지내던 모 기자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주요 일간지에 김일 선수의 근황과 딱한 사연을 신문에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모 기자는 특종감이라며 내 제보를 반겼다. 왕년의 박치기왕의 소식은 대서특필됐다. 

나는 다시 한 번 언론의 힘을 실감했다. 국민들은 김일 선수의 기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사람들은 예전 모습을 잃어버린 박치기왕 사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에서 곧 안타까움으로 바뀌어 퍼져갔다. ‘우리의 영웅이 이럴 수가….’ 대국민적 관심은 ‘왕년의 박치기왕을 도웁시다’로 일파만파 번졌다.

김 선수를 돕기 위해 가장 먼저 나선 이는 사형수였다. 사형수 차준석 씨는 교화활동 중 만난 사이였다. 차 씨는 김 선수 소식을 듣자마자 영치금으로 모은 백만 원을 전해달라고 했다. 차 씨는 차마 받기를 망설이는 나에게 “나도 힘들지만 다른 힘든 사람을 돕게 해 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나는 눈물겨운 영치금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갔다. 김 선수에게 차 씨의 성금을 전하고 돌아오니,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김 선수를 후원하고 그의 귀국을 돕겠다는 이가 나타났다. 김 선수의 열성팬이라는 그 후원자는 박준영 씨였다. 박 씨는 서울 을지병원의 설립자이자 이사장이었다. 박준영 이사장은 자신의 병원에서 김 선수가 평생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연락해왔다.

후쿠오카 방문 3번째 만에, 김일 선수는 귀국했다. 1994년 1월 13일 한국으로 돌아온 김 선수는 제 2의 인생을 살게 됐다. 13년간 특실서 요양하며 신체·정신적 건강을 회복하는 한편, 다른 이를 돕는 일로 각계에서 보내준 성금에 대한 고마움을 보답했다.

그 즈음 나는 주지로 지내던 자비사 주최로 ‘김일 선수 돕기 자선전시회’를 부산서 일주일 간 열고, 모인 전시 수익금을 김 선수에게 전달했다. 성금을 받자마자 김 선수가 한 말은 뜻밖이었다.

“사형수로서 죽기 전 마지막 선행을 하고 싶다며 절 도운 차준석 씨가 대구교도소 수감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돈으로 보내준 돈인지 알면서도 염치불구하고 도움 받을 수밖에 없었죠. 이젠 제가 돌려줄 차례입니다.”

귀국한 지 4일차였다. 김 선수는 주치의의 적극 만류에도 불구하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부산에 왔다. 전시회에 참석한 차 씨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김 선수는 차 씨가 보내줬던 금액에 50만원을 더해 차 씨의 딸에게 성금을 되돌려줬다. 소녀가장 등 학생에게 장학금도 전달했다.
그 해 4월, 김 선수는 병상에서 정부가 수여한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선행들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선수 시절, 김 선수는 전 재산 500만원을 털어 양수기 50대를 샀고, 극심한 가뭄으로 고통 받는 농민들을 위해 농촌에 기부했다. 또 은퇴 후에는 김일장학회를 만들었다. 김일장학금은 불우한 환경의 청소년들을 도왔다.

금산면은 실제로 면 단위 최초로 전기가 상용화된 지역이다. 이 일 역시 김 선수의 역할이 컸다. 김 선수는 전성기 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고향마을에 전기를 놓아달라고 직접 부탁했다고 한다. 진돗개 동상과 함께 세워진 김일 공덕비는 이를 기리기 위함이다. 공덕비에는 지역사회를 위해 애쓴 김 선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다.

사람들은 또 다른 김 선수의 모습을 기억하게 됐다. 지인의 후원이 끊어져 언제 병원에서 쫓겨날 지 불안해하던 예전 삶과는 전혀 달랐다. 김 선수는 그동안의 일들을 회고하며 일간지에 글을 연재했다. 자서전도 출간하게 됐다. 

김 선수의 자서전이 번역돼 일본 유명출판사서 출판을 앞두고 있었다. 〈오오키 킨타로(김일의 일본 이름)-전설의 박치기 왕〉이란 제목으로 출간될 자서전 기념행사 날만 기다리며 들떠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는 나는 물론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도쿄서 열릴 출판기념회에 초대하곤 했다.

서울 보덕사 주지 소임을 맡을 때는 사찰 행사에도 종종 참석했었다. 진신사리 봉안식에 왔다간 그에게 이틀 뒤 전화가 왔다.

“스님,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비보가 왔다. 김 선수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전화였다. 나는 김 선수의 가족과 함께 그의 임종을 지켰다.

2006년 10월 26일, 박치기왕 김일 선수는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끝내 김 선수는 그렇게 기대하던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세상을 달리했다. 당사자 없이 개최된 행사 당일은 기막히게도 김 선수의 49재 날이었다.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비참한 타지생활을 청산한 김 선수는 왕성한 자선활동으로 자신이 받은 온정의 손길을 갚고 생을 마감했다. 김 선수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고, 임종까지 함께할 수 있어서 고마운 인연으로 남아있다. 〈끝〉
 

부산 자비사 주최로 열린 자선전시회 수익금을 불우이웃에 전달하는 김일 선수(왼쪽 첫 번째)와 삼중 스님(왼쪽 두 번째). 김 선수는 영치금으로 자신을 도운 사형수 차준석 씨의 자녀에게 받은 성금에 50만원을 더해 되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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