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계율대로/이정범 지음, 김종도 그림/운주사 펴냄/1만 7천원

이 책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대각회 이사장, 대한불교조계종 대종사, 종단단일계단 전계화상, 동국역경원장 등을 맡으며, 현대 한국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자운 율사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부처님의 가르침(계율)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한평생 올곧게 수행한 자운당 성우 대율사. 그의 삶과 수행을 오롯이 소설과 그림으로 담아냈다.

자운 스님은 1911년 강원도 평창서 태어나, 1927년 17세에 해인사서 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92년 1월 4일 해인사 홍제암서 열반하니 세수 82세, 법랍 66년이었다.‘眞性圓明本自空(진성원명본자공) 光照十方極淸淨(광조시방극청정) 來與淸風逍遙來(내여청풍소요래) 去隨明月自在去(거수명월자재거)’라는 임종게를 남긴 다음 합장하고 단정히 앉아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명하면서 조용히 입적했다. 해인사 연화대서 조계종 원로장으로 다비식을 거행하였으며, 은행크기의 사리 19과와 녹두크기의 사리 5천여 수가 나왔으나 큰 것만 수습해 이를 해인사, 감로사, 경국사에 나누어 봉안했다.


조계종 계단 확립한 장본인
계율과 정토수행 일치 제창
매일 10만 번 ‘아미타불’ 염불

 

현대 한국불교 계율의 중흥조
1939년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서 매일 20시간씩 용맹 정진으로 문수기도를 하던 중, 99일째 되는 날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계척과‘견지금계 불법재흥’의 감응을 받았다. 그래서 1940년부터 2년여 동안 매일 국립중앙도서관을 오가며 卍속장경에 들어 있는 오부율장과 그 주석서들을 모두 필사하고 연구하였다.

1948년 봉암사 결사에서 처음으로 보살계 수계법회를 봉행한 이후 1991년 조계종단 단일계단 수계법회까지, 출·재가 10만 불자에게 수계를 주었으며, 조계종의 계단을 확립했다.

한편 스님은 〈비구계본〉 〈비구니계본〉 〈사미율의〉 〈사미니율의〉 〈범망경〉 등 많은 율서를 우리말로 번역, 지속적으로 펴내고 보급했다.
 

참선 수행에도 혼신을 다한 선사
1929년 범어사 선원에서의 안거를 시작으로 순천 선암사, 해인사, 표훈사, 울진 불영사, 문경 김룡사, 통도사, 울산 학성선원, 금강산 마하연 등서 수선안거 했다. 특히 불영사서는 3년 동안 장좌불와로 결사했으며, 1938년 도봉산 망월사서 용성 선사에게 오도송을 읊고 전법게와 의발을 전해 받았다. 해방 후에는 봉암사 결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성철, 향곡, 청담 스님 등과 함께 한국불교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켰다. 
 

평생 염불과 예참을 실천한 염불 수행자
스님은 1957년부터 계율과 정토수행이 둘이 아니라는 계정일치행을 제창하였으며, 〈무량수경〉 〈아미타경〉 〈십육관경〉 〈정토심요〉 〈자비도량참법〉 등 정토와 관련된 다양한 경서를 펴내고 유통시켰다. 그 실천으로 해인사서 염불만일회, 서울 보국사서 대동염불회를 결사해 정토수행을 진작시켰으며, 스스로를 상참괴승(常慙愧僧), 즉 항상 참회하는 부끄러운 중이라고 칭하였다. 스님은 열반할 때까지 매일 10만 번의 ‘아미타불’ 고성염불과 〈아미타경〉 48편 독송, 미타예경 1,080배, 염불진언과 일종식 등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실천했으니, 가히 정토 수행자로서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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