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이 어떻게 생활에 적용이 되는지요  
질문 저는 불교를 공부하고 싶은데 저희 생활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라 절 근처만 맴돌곤 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의 생활 참선에 대한 법문을 보고 용기를 내서 선원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종교가 수승하다 할지라고 생활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늘 생각해 왔거든요. 그렇다면 참선이 어떻게 생활에 적용되는지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게 뭣고?’ 하고 열네 날 있어도 뭐는 뭡니까? 그냥 뭐지!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전에 선지식들께서 표현하시기를 “수박을 놓고 이게 뭐냐고 아무리 돌려 가면서 봐도 맛은 알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조그만 거든지 큰 거든지 내가 실험을 통해서 관찰하고 내가 체험을 해 봐야 그 맛을 알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참선입니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일하나 행하는 것을 좌선, 입선, 와선, 행선이라고 합니다. 그 네 가지가 다 한꺼번에 돌아가는 것이 바로 생활입니다. 그래서 생활 참선이라고 합니다. 생활이 그대로 참선이자, 이 세상 돌아가는 일체 만물만생이 다 공안(公案)이 될 수 있고, 만물만생이 살고 있는 이 자체가 바로 도량이 될 수 있고, 내 앉은 자리가 될 수 있다 이겁니다. 

어디로 찾아다닌다, 또는 모르는 게 있으면 경전을 들춰 본다고 해서 그 진의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든 알든, 못났든 잘났든, 내가 길을 가다가 엎드러졌으면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죠. 땅을 짚고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야 다리 절름뱅이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거죠, 정상적인 사람이…. 우리는 50% 무(無)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절름발입니다. 그래서 다리 한 짝을 마저 일으켜 세우는 도리를 공부하는 겁니다, 지금. 그리고 눈은 애꾸입니다. 눈 한 짝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한 짝을 마저 뜨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겁니다, 지금. 이 마음자리에서만이 일체 만법이 나고 들고 나고 들고 하는 거니까요. 그것을 지켜보고 관찰하면서, 실험하면서 체험을 안 한다면 그건 참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내 몸으로나 가정으로나, 모든 것을 습득을 해서 모든 관습을 놓고 실험을 하는 겁니다, 하나하나. 알고 보면 상당히 쉬운 일인데도 자기를 자기가 못 믿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못 믿고 뭘 그렇게 알아야 하고 따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잘 배웠고 잘났고, 똑똑하고 못났고, 못하고 못 배웠고 이런 거를 몽땅 다 놓는 겁니다. 놓는 거라고 하니까 놓는 거에 또 걸리지 마십시오. 내 육체를 나라고 하거나, 내가 했다고 하거나, 내가 가졌다고 하거나, 모든 걸 나라고 일으켜 세운다면, 모두 둘로 보이기 때문에, 상대로 보이기 때문에 잘했다 못했다가 연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는 겁니다. 그리고 업이 녹질 않아요. 과거에 입력된 것이 살살 나오는 위에다 또 자꾸 업을 지어서 미래에 나오게끔 입력하는 겁니다. 지금 입력되는 거는 미래에 가지고 나올 것을 미리 저장을 하는 거죠. 저장 아닌 저장이죠. 여러분이 그 업을 안 지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이건 자동적으로 되는 거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노예가 되면 세세생생 벗어날 수 없다
이 마음의 공부를 증득해서 넘어갈 수 있다면
삼천대천세계를 한 손가락에 꿰서 굴릴 수 있는
그런 자유인이 된다.

그러니까 하여튼, 여러분이 각자 자신을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은 육을 끌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래, 내 신을 두고 남의 신을 찾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자신(自神)을 두고! 자신은 정신계에 속하고, 육은 현실계에 속하는 겁니다. 항상 육은 끌려다닙니다, 마음의 주인한테. 그러니 잘못 돌아가는 거는 거기다 되놓고 잘 돌아가게 해서 서로가, 누가 더 높고 얕음이 없이 상통하면서 같이 작용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래는 같이 작용을 하는데, 지금 유심(有心)에서는 도저히 정신계와 물질계가 한데 작용을 하는 걸 모르기 때문에, 그걸 새삼스럽게 말하는 건 아니지만 현재 그렇게 가고 있으니 그걸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뭣고? 이렇게 되는 거지, 저렇게 되는 거지! 이게 틀리지, 이게 옳지!’ 이런다면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믿고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이끌어 갑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따져야 하는 마음이 생기십니까? 자기한테 자기가 따지는 겁니다. 아무리 따져 봤자죠. 그러니 ‘이렇게 해야 맞지, 저렇게 해야 맞지!’하고 자꾸 잔소리가 심하고 이론이 많아지고 그런다면 전자와 전자가 어떻게 마주 붙어서 불이 들어옵니까? 네? 자기한테 자기가 따지려고 드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좀 심사숙고해서 여러분은 진짜로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믿어야 합니다. 자기 주먹만을 믿고 주먹에서 나오는 거 주먹에다가 도로 놓는 마음! 이 세상을 다 지닌 한자리, 그 주먹 아닙니까? 허허허.

어머니와 화합하고 싶어요 
질문 저는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어머니도 저도 마음공부를 한다고는 하는데 무슨 인연인지 사사건건 마찰이 생깁니다. 어떻게 공부해야 어머니와 화합해서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을는지요. 

답변 여러분이 부부지간에 살든지 자식과 부모와 형제들과 살든지 또는 회사의 직원으로 살든지 사장으로 살든지, 선생님으로 살든지 학생으로 살든지 어떻게 살든지 각자 여러분의 탓이지 남의 탓이 아닙니다. 모든 잘못을 남한테 전가를 하고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그놈이 잘못해 가지고 집안이 그냥 어수선하고 이렇게 되었다.” 그러거든요. 자식이 학교에서 잘못해서 부모가 성가시면 “어이구! 저놈의 자식으로 인해서 그렇다.” 이러거든요. 자식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일체가 다 남으로 인해서 잘못된 게 아닙니다.
여러분, 저 상점에 가 보십시오. 깡통은 깡통전에 깡통끼리 모여 있습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이 과거로부터 자기가 지은 대로 차원대로 만나는 것입니다. 자식도 인연이 바로 그런 것이고 부부지간도 인연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깡통끼리 만나니까 그렇게 얼그렁덜그렁 하죠? 소리가 납니다. ‘넝마는 넝마전에 모여 있고’하는 그 차원이라면 그것끼리 또 모입니다. 그러니 서로 고생을 하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증오하고 서로 그냥 욕하고 때리고 온통 ‘이년 저년, 이놈 저놈, 이놈의 새끼 저놈의 새끼’ 온통 이 야단입니다. 왜 그런가? 그게 아수라장이거든요.

이거 보세요. 세상에 이 몸뚱이로 태어나 가지고 철모를 때 빼고 잘 때 빼고 늙었을 때 빼면 몇 푼어치나 산다고 그렇게 얼그렁덜그렁 하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즐겁고 패기 있고 자유스럽게, 좋으면 껄껄 웃어도 보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조그만 거 가지고 보잘것없는 것 가지고도 싸우거든요. 참 이상해요. 내가 가만히 보면요, 조그맣고 아무것도 아닌데 오만상을 찌푸리고 말입니다. 그걸 보면 그냥 난 우스워 죽겠어요. 정말입니다. 어떤 때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요, 어떤 때는 그냥 웃음이 납니다.
오늘도 차를 타고 오는데 차마다 노랫소리가 흘러나와요. 그게 바로 부처님의 소리가 그렇게 퍼져 나오지 않느냐, 울려 나오지 않느냐 이거예요. 부처님의 소리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부처님의 도량이 아닌 데가 하나도 없고 도인 없는 데가 하나도 없고요. 오면서 보니까 네 살 먹은 애가 차에 치여 죽지 않으려고 빨리 뛰어가더라고요. 고것도 도인이더라고요, 하하하…. 여러분! 글쎄, 생각해 보세요. 개도 불성이 있는 겁니다. 없다고 해도 있는 거고 있다고 해도 없는 거고, 사람에 따라 차원에 따라 그거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겠죠. 왜 그러냐? 여러분이 부처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개도 차가 오는가 안 오는가 이리저리 둘러보고선 차가 오니까 딱 서는 거예요. 그러곤 차가 딱 지나가니까 쏜살같이 건너가요. 그렇게 하고 있으니 개도 도인이 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부처가 아니라고요?
그러니 부처 노릇을 하시려면 오늘부터라도 그 하치않은 거 가지고 남의 탓을 하지 말고 성내지 말고 좋게 사세요. 부부지간에 살면서도 “여보! 당신 오늘 얼마나 노고가 많았소.” 하고 웃고 들어오면 그냥 미안하고 그래서 “여보 당신! 참 얼마나 일하시느라고 애썼느냐.” 하고 이렇게 말이 좋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당신 하루 종일 뭐 했어?” 이러고 들어오면 “아니?” 이렇게 나오지요. “아니, 뭐?” 이렇게, 하하하…. 그러니까 우리가 조그마한 거 가지고 실랑이하다 보면 이렇게 좋은 법을 못 배워요. 그리고 자유스럽게 못 살아요. 자유스럽게 살아야, 먹을 것에도 착을 두지 않아야 들어와요. 돈도 착을 두고 가지려고 애를 쓰면 자꾸 달아나가요. 병고도 탁 놓고 ‘네가 업보로 인해서, 인과응보로 인해서 모두 뭉치게 한 거니까, 너한테서 나온 거니까 너 알아서 해라.’ 아, 이러고 탁 놓으니까 이게 심심하거든요. 그러니까 ‘아이고! 난 내 그릇이나 가지고 가야 되겠다.’ 그러고 달아나가는 것입니다.

평등한 마음을 유지하고 싶어요
질문 저는 아침 출근길에 운전을 하다가 다른 차가 끼어들면 어떤 날은 ‘그래, 우리 같이 갑시다.’ 하고 좋은 마음이 나가는가 하면 어떤 날은 바로 험한 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러면서 ‘아, 내 마음에 악과 선이 동시에 들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항상 평등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악과 선을 오가는 제 마음을 어찌 다스려야 하는지요. 

답변 이거 봐요. 악과 선이 어찌 없겠소? 동시에 모두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마음이란 놈이 도둑질도 시키고 좋은 일도 시키죠. 그러니 좋은 일 하는 사람이 좋은 일만 하는 게 아니고 악한 짓 하는 사람이 악한 짓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나타나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찰나찰나 화해서, 착하던 사람도 앞에 딱 닥치면 어쩔 수 없이 나쁜 짓을 하게 되고, 또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딱 닥치면 좋은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러니까 좋은 일 하는 사람, 나쁜 일 하는 사람, 이것을 참선에서는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니까 말입니다. 어떤 것을 나쁘다고 하고 어떤 것을 좋다고 하겠느냐. 마음을 바로 쓸 때는 이렇게 되고, 또 나쁜 상황이 앞에 딱 닥치면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옛날에 한 강도가 어느 수풀 속을 지나가는데 어느 여인이 어린애를 안고 업고 걸리면서 엉엉 울고 가더랍니다. 밥도 못 먹였는지 “엄마, 밥 줘! 밥 줘!” 하고 울고 가는데, 참혹해서 볼 수가 없었더랍니다. 그래서 강도가 아닌 척하고선 “어린애가 배고프다 그러는데 먹을 게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먹을 것도 없거니와 남편도 붙잡혀 가서 영 오지 않고, 그렇게 되니까 집도 오막살이 있던 거를 뺏기고 어디로 갈 데도 없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돈을 뺏어서 전대를 해 가지고 있던 거와 먹을 거를 좀 훔쳐 뒀던 거를, 전대 돈은 가서 오막살이라도 하나 장만해서 먹고살라고 주고, 자기 먹으려고 집어 온 거는 그 애들을 주고 그렇게 좋은 일을 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허허허 웃으면서 ‘도둑질을 하는 놈 위에 또 나는 놈이 있구나.’ 아니, 얼마나 그것이 기가 막힌 말입니까?

또 한 가지 요거, 잠깐만 얘기하죠. 우리 신도가 집이 없어서 남이 금방 지어 놓은 집을 빌려서 “팔릴 때까지 들어가 살아라.” 그래서 들어갔답니다. 집은 좋지만 그냥 자기는 보따리 보따리 해서 다락에다 넣고선, 내일 아침에 애들 학교 갈 때에 먹일 것도 없고 차비 줄 것도 없어서 엄마가 그냥 속상해서 부글부글 속을 끓이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그 집이 좋으니까 도둑이 들어왔더랍니다. 하하하. 뛰어넘어 가지곤 다락을 통해서 방에 들어오려고 다락에 뛰어올라 갔는데, 거기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보따리 보따리만 있고 속을 풀어 보니까 헌 누더기 뭐, 이불 나부랑이 살림 나부랑이 뭐, 이런 거거든요. 다락에서 도둑이 가만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간 안에서 “아이, 내일 아침에 애들 밥은 어떡하며, 차비는 어떡하면 좋은가?” 하고 타령 소리가 들리거든요.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주인공, 당신만이 이 애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고 당신만이 먹일 수 있다.”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이 도둑이 들을 때에 ‘주인공은 뭐고?’ 허허허…. 주인공은 뭔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에 당장 어린애를 보내지를 못하고 먹이지 못한다는 소리에 그만 이 도둑이 가슴이 좀 안됐다 이겁니다. 그래서 도둑질을 첫 번, 두 번째 해 가지고 와서 세 번째 들렀는데, 그 도둑질해 온 거를 다락문을 가만히 열고는 거기다가 내놓고서는 다락문을 또 타고 나가면서 하는 소리가 “아이고 참, 기가 막혀! 이것은 도둑질하러 들어왔다가 되뺏기고 가네!” 이러더랍니다. 하하하. 그러니 도둑놈이 어찌 도둑놈만이겠느냐 이겁니다. 

그 사람이 이튿날 아침에 와서 깔깔 웃으면서 “스님! 주인공이 이렇게도 살리는 수가 있습니까?” 하는 겁니다. 세상에, 도둑이 도둑질한 걸 갖다 줘서 애를 무난히 학교에 보내고 쌀 한 가마니 사고 또 연탄 사고 애들 등록금도 주고 이랬다는 겁니다. 이럴 수가 있느냐 하니까 “그러게 도둑놈을 도둑놈으로 보지 마라, 음? 모두가, 그저 죄가 뭐가 죄겠어? 다 모르는 게 죄고 순간순간 나오는 대로, 업식에서 나오는 대로 하는 거지. 그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야. 그리고 그 환경에 닥치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도 많아. 그러니까 외려 더 불쌍하지. 뭐가 나쁘고 좋고가 따로따로 있겠느냐?”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악과 선은 없습니다. 허허허….

저도 자유인이 되고 싶은데…
질문 이 마음공부를 하다 보니 자기에 대한 믿음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걸림이 많습니다. 마음에 걸림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답변 여러분은 자기가 살면서도 자기를 못 믿어요. 다른 이름을 믿고 형상을 믿고 허공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왜 자기는 못 믿습니까?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끌고 가는 그놈을 자기가 왜 못 믿습니까? 배가 고파서 밥 먹게 하는 놈, 듣게 하는 놈, 보게 하는 놈, 말하게 하는 놈, 일을 하게 하는 놈, 하기 싫게 하는 놈, 싸움을 하게 하는 놈, 성이 나게 하는 놈, 이 모든 놈들이 전부 한 놈입니다, 한 놈! 그거를 표현을 하기를 “아버지가 될 때 내가 나라고 할 수 있나, 또 남편이 됐을 때 나라고 할 수 있나, 자식이 됐을 때 나라고 할 수 있나, 사위가 됐을 때 나라고 할 수 있나?” 했던 겁니다. 자동적으로 돌아가면서 말도 뜻도 행도 그렇게 바꿔지면서 돌아가는데 어떤 딴 놈이 또 있습니까? 그러니 일체 만법이 다, 각자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벌어진 겁니다. 그놈이, 한 놈이 그렇게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벌어진 것을 용도에 따라서 들이고 내는 데는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그대로니까. 그 한 놈이 누구입니까? 그 한 놈이 바로 우주를 싸고 여여하게 돌아가는 그 자체입니다.  

전에도 우주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 직결돼 있다고 얘기했죠? 일체 만물은 연결 연결 연결돼서 바로 공생(共生)으로서, 공용(共用)으로서, 공식화(共食化)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가설이 돼 있는 것이라고요. 각자 마음마다 가설이 돼 있다고요. 그렇게 말씀드렸죠? 부처님 법이라고 생각하면 둘이 되죠? 그러나 부처님 법이 따로 없이 우리들의 법이 부처님 법이라고 놓을 때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노예가 되면 세세생생에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도 그렇게 얘기했지만 지옥이나 천당이 달리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제일 무서운 것은, 돼지같이 살면 돼지의 모습을 가지고 나올 것이고, 뱀같이 살면 뱀 모습을 가지고 나올 것이고, 개같이 살면 개의 모습을 가지고 나올 것이고, 사람같이 살면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공부를 증득해서 넘어갈 수 있다면 삼천대천세계를 한 손가락에 꿰고서 굴릴 수 있는 그런 자유인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질문 저희 아이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지금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급한 마음에 주인공에 맡기고는 있으나 너무 힘이 듭니다. 관도 제대로 안되고 집중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이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있을까요?
답변 죽고 사는 거를…, 그건 개널럴래같이 생각하세요. 나는 솔직하게 얘기해서 오늘 죽고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그거 겁 안 냅니다. 그런 게 겁나면 나질 않았게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아이, 이게 안 되면 죽는데….’ 이런 착을 버리시란 말입니다. ‘우리 식구가 다 죽는데….’ 이런 걸 버리시란 말입니다. ‘다 죽는데’ 하고 지금 심부름꾼 자기가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그건 주인이 걱정할 거죠. 주인이 알아서 하는 거지 내가 걱정을 한다고 그게 일일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급하다고 그냥 허덕지덕 허덕지덕한단 말입니다. 그럴 땐 어떤 때는 “급하면 좀 참아라.” 그러고 어떤 땐 좀 기다리라고 그럽니다. 좀 기다리라는 시간에, 절을 천배, 삼천배 하고 이러기 이전에 내 마음 한생각을 잘 돌리면 죽고 사는 거를 다 그냥 거기다 포기해 놓고 ‘너만이, 살릴 수 있다면 너만이 살릴 수 있고, 또 이 몸을 옷을 벗게 하려면 네가 벗게 해라. 네 손에 모든 게 달려 있다.’ 하고 맡겨 놓고, 또 그렇게 맡겼는데도 안 돼서 진짜 식구들이 죽게 됐을 때도 ‘어, 죽게 하는 것도 너야!’ 이러고 놔 봐요, 좀. 패기 있게! 용맹하게!
사람이 어떠한 기술을 배워도 한 고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하물며 이런 만사 만생을 다 이끌어 가지고 나갈 이런 공분데 그런 고비도 없겠습니까? 또 착을 붙이지 않고 잘하는 사람일수록 또 이런 게 붙습니다. 자기를 발견을 해 가지고 나가는 사람들에 한해서 하는 얘깁니다. 발견을 했어도 어떻게 이게 흐리마리하게 발견이 됐는데 인제는 자꾸 안 되는 겁니다, 또. 그렇게 솔솔 되다가. 그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 되다가 안 되는 거 말입니다. 그것이 딴 데서 또 안 되는 게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수천 번 수만 번 그런 경험을 했어요. 아하! 처음에는 안 되는 게 물론 ‘아, 내가 이거 잘못해서 그런가.’ 하고 의심을 하고 또 부르르 뛰어오겠죠. 

그러나 그걸 한번 뒤집어서 잘 생각을 해 보신다면 딴 자리에서 팥죽 방울이 나올 리가 없잖아요. 팥죽 솥에서 팥죽 방울이 나오지, 딴 데서 들어와서 팥죽 방울이 생길 리가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아, 요 안 되는 것도 바로 내가 어떻게 생각하나 볼 양으로 테스트하는 거로구나.’ 하고 ‘아하! 요거를 뒤집어서 또 나를 가르치는구나.’ 하고 그거를 딱 집어서 거기다 되돌려 놨을 때 세상만사가 태평하고 껄껄거리고 웃음이 날 정도로 되는 겁니다. 이렇게 자꾸자꾸 하다 보면 그게 진짜로 그 바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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