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소욕지족(少欲知足)

‘작은 것’, ‘적은 것’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少(적을 소)’는 ‘다(多, 많다)’의 상대어로 수량, 정도를 가리키는 한자이다. 그리고 글자 모양이 거의 비슷해서 때론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 ‘小(작을 소)’는 ‘대(大)’의 상대어로, 크지 않다는 뜻으로 부피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욕지족(少欲知足)’은 ‘작은 것’보다는 ‘적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에 더 가깝다. 즉 ‘넉넉하지 못함’, ‘적음’, ‘모자람’, ‘부족함’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적은 재산, 적은 수입으로도 만족하게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너무 욕심이나 물욕이 많으면(多慾) 조금은 천박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물신주의의 천박한 가치관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소욕지족(少欲知足)은 〈불유교경(佛遺經)〉에 있는 사자성어다. 부처님의 ‘유언’ 또는 ‘유훈’이라는 경전인데, 내용이 좀 길지만 그 어떤 글보다 잠언이라서 읽어보았으면 한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많은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고뇌도 많다. 그러나 욕심이 적은 사람은 욕심이나 욕망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근심이 없다.

욕심이 적은 사람(少欲之人)은 남의 마음을 사려고 아첨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욕심이 적은(少欲) 사람은 두려움이나 걱정이 없다. 하는 일마다 항상 마음이 평온하다. 욕심이 적은 사람, 그는 번뇌의 불을 꺼버린 니르바나(열반, 寂靜)의 경지에 이르게 되나니, 이것을 일러 ‘소욕(少欲, 소욕지족)’이라 한다.

만약 모든 고뇌(苦惱)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소욕’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少欲知足). 만족할 줄 아는 것(知足之法), 그것이 곧 마음이 풍족한 안온(安穩)의 경지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땅 위에 누워 있어도 안락하지만,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천당에 있을 지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족할 줄 모르는 자는 부유해도 가난한 사람이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해도 행복하다. 만족을 모르는 자는 재산, 이성, 식탐, 명예욕, 장수 등 오욕(五欲)에 지배를 당한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知足之人)은 그런 사람을 가련하게 여긴다. 이것을 ‘지족(知足)’이라고 한다.”

욕심, 욕망의 끝은 없다. 역사상 몰락한 군주나 정치인들 대부분은 지나친 욕심, 욕망 때문에 패망했다. 이성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 돈에 대한 욕심이 개인은 물론 한 나라를 망친 경우는 너무나도 많다.

중국 문명사에서 황금시대를 열은 왕조는 당(唐, 618-907) 왕조이다. 그런 당 왕조가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6대 황제인 현종 때부터다. 현종은 처음엔 정치를 잘 했으나 양귀비를 만나 비극적인 사랑, 운명적인 애정 행각에 올인했다. 그 결과 ‘안사(安史)의 난’으로 머나먼 촉 땅까지 피난을 가야 하는 쓰라린 맛을 보았다. 뒤늦게 통한했지만 후회의 속성은 후행성, 엎어진 물그릇은 도저히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 유명한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는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시가(詩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욕심과 욕망 때문에 한 순간에 몰락의 길을 걷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인간의 욕망은 본능적인 것인지, 끝이 없다. 돈, 출세, 미인 등 소유욕 앞에서는 이성(理性)이 정지되는 것 같다. 제동능력을 상실하고 종착역을 향하여 질주한다. 비극이 눈앞에 나타나야 멈춘다.

욕심이나 욕망을 억제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理性)과 감성이라는 두 가지를 갖고 있다. 너무 감성에 올인하면 그 결과는 대개 비극을 낳고, 너무 이성에 올인하면 때론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낳는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 그것이 곧 ‘소욕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