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덕산시중화 평창 1

지금부터 제 1칙 ‘덕산시중화’에 대한 원오 선사의 평창(評唱, 해설과 비평)을 살펴본다. 〈격절록〉 100칙 가운데 본칙이 가장 자세하고 내용이 길어서 4회에 걸쳐 소개한다.

[評唱 1]

師云. 古人一機一境 皆明此事. 且世尊未花已前 是箇什道理. 後來所以 買帽相頭 相席打令 如今只管記憶千端萬端 打葛藤 有什了期. 多知多解 轉生煩惱. 古人或 拈古頌古一則因緣 須是出得他古人意 方可拈.

고인의 일기일경(一機一境)은 모두가 이 일(此事)을 밝힌 것이다. 자, 세존이 아직 꽃을 들기 이전,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 뒤에 왔다는 이유로 그저 모자를 먼저 사놓고 머리를 재거나 규칙이나 정해놓고 맹목적으로 따라가면서 지금 단지 천 가지 만 가지 일을 기억해서 말(葛藤)만 늘어놓는다면, 무슨 끝마칠 날이 있겠는가! 많이 알고 많이 이해할수록 번뇌만 더할 뿐이다. 고인이 혹시(그러할 리는 없지만 만일에) 일칙인연에 염고를 하고 송고를 한다면 모름지기 저 고인의 뜻에서 나와야 문제를 제기해서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只如 德山本是西蜀 講金剛經座主. 聞南方禪宗大興 他云 “南方魔子如此盛 遂罷講散徒 擎將疏 欲破禪宗” 及至龍潭 言下大悟. 後住德山 三日一回搜堂 凡見文字 時燒却 十二時中 打風打雨. 後來出巖頭雪峰 如龍似虎相似. 到他 打葛藤時 自有奇特處.

그건 그렇고, 덕산은 본래 서촉(西蜀) 사람으로 〈금강경〉을 강의하던 좌주(座主)였다. 남방에 선종이 크게 흥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남방에 마구니들이 이와 같이 성행한다니 곧장 강의를 그만 두고, 학인들을 해산하고 소초(疏)를 들고 나아가서 선종을 부숴버리고 말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용담(龍潭, 용담숭신)에 이르러서는 말 한마디에 크게 깨닫게 되었다. 그 뒤에 덕산에 머물렀는데, 3일에 한 번씩 승당을 뒤지면서 문자(경전이나 어록)를 보기만 하면 바로 태워버렸고, 하루 종일 (방망이로) 바람을 치고 비를 치듯 했다. 뒷날 암두(巖頭, 암두전활)와 설봉(雪峰, 설봉의존)이 여기서 나왔는데, 마치 용과 같고 호랑이와 같았다. 덕산에 이르러 말을 할 때는 기이하고 특이한 곳(奇特處)이 있었다.

一日示道 “汝但無事於心 無心於事 則而靈 寂而妙” 又道 “捉空追響 勞汝心神. 夢覺覺非 覺亦非覺”

하루는 (덕산이) 대중에게 법문을 했다.

“그대들이 다만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으면 텅 비어 신령스럽고 고요하면서도 오묘하게 된다.”

또 말했다.

“허공을 잡고 메아리를 좇으니, 그대들의 심신만 수고롭게 하는구나. 꿈에서 깨어나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음 또한 깨달음이 아니다.”

일기일경(一機一境)은 선사들이 눈썹을 치켜 올리거나, 눈을 깜빡거리거나, “할!” 을 하는 등의 미묘한 언동을 뜻한다.

拈(염철): 원래는 어떤 물건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주무르는 것을 의미. 선어록에서는 문제로 제기하여 이야기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상석타령(相席打令)은 규칙을 정해놓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용담숭신(龍潭崇信, 782~865)은 천황도오(天皇道悟)의 법을 이었고, 덕산선감의 스승이다.

암두전활과 설봉의존, 그리고 흠산문수 3인은 선가에 도반으로 유명하다. 앞의 2인은 덕산의 법을, 흠산은 동산양개의 법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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