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믿음(信) 편 3

인간은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존재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다. 이런 개인적 욕구뿐만 아니라 특정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욕구도 있다. 평소에는 생각이 안 나는데 설날이 되면 떡국이 먹고 싶고 추석이 다가오면 송편이, 동짓날엔 팥죽이 먹고 싶다. 서구인들은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면 칠면조 요리가 먹고 싶을 것이다. 사회문화적 욕구가 발동하는 것이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욕구는 충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배가 고픈데도 먹지 않으면 굶어죽고 설날인데도 떡국을 먹지 않으면 마음에 뭔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온다.

세속적인(俗) 삶에서 벗어나 거룩한(聖) 삶을 추구하는 종교적 욕구도 마찬가지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주말이면 교회와 성당, 사찰 등에 간다. 종교적 욕구도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종교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종교적 욕구 또한 개인적, 사회문화적 욕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능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적 욕구가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아무리 건강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유한한 실존 앞에 무력감을 느끼지만,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기도 한다. 여러 종교에서 영원한 삶, 즉 영생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종교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종교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하는 유형을 건강형(Healthy minded)과 병적인 형(Sicked minded)으로 구분하였다. 건강형이란 친구나 부모를 따라 교회나 성당에 가는 것처럼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종교란 삶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에 속한다. 반면 병적인 형은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유한성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하는 유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생사의 문제는 삶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부를 차지한다.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종교가들은 대개 병적인 형에 속한다. 석가모니 붓다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왕자로 태어나 화려한 삶을 살다가 성문 밖에서 늙고 병들고 죽은 사람과 마주한다. 그리고 생로병사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실존이라는 병에 걸린 것이다. 그는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하고 6년간의 처절한 고행을 한다. 마침내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 문제를 해결한다. 종교적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킨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처럼 생사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을 자력(自力)이라 부른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 불교는 기본적으로 어느 누구의 힘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력신앙이다. 스스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입장이다.

이와 달리 기독교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스스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은 지음을 받은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사를 해결하는 주체도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이처럼 신의 절대적인 힘에 의지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를 타력신앙(他力信仰)이라 한다.

자력이든 타력이든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나고 죽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강력한 종교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타력신앙의 전통에서는 종교적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키고 영생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 한다. 반면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해결하는 불교와 같은 전통에서는 깨달음이나 열반 혹은 해탈이라 부른다.

아무리 위대한 학문이라도 이러한 생사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종교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가리켜 ‘으뜸가는(宗) 가르침(敎)’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이 종교를 믿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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