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글쓰기명상 기본 원리

많은 수행 초보자들을 좌절시키는 한마디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그동안 수도 없이 듣고 본 사실이다.

명상은 생각을 끊는 것이여. 생각이 안 끊기면 명상이 아닌 것이여!’

이 말을 들은 수많은 초보 수행자의 실망에 찬 한숨과 발길 돌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눈을 감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으면 생각이 끊기기는 커녕 없던 생각들도 뭉게구름처럼 부얼부얼 일어나는 것이 왕초보 수행자들의 운명 아닌 운명 아닐까.

생각 끊으라는 선사들 조언
초보 수행자에겐 막막할 뿐
글로 감정상태 마주해보면
자기 생각과 언어가 보인다

생각을 끊어라!’

말씀인즉슨, 틀린 말은 아니다. 열반에 이르는 선정 중에서 궁극의 단계에 상수멸정(想受滅定)이 있다. 생각과 느낌이 끊기는 자리이다.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생각과 느낌이 모두 박살난 자리를 목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상대는 혼자 눈감고 척추 세워본 기억이 거의 전무한 수행 초보자의 몸이다. 말하자면, 죽도록 생각을 굴리면서 살아야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남들 어깨를 비집고 겨우겨우 고개 좀 들이밀 수 있지 않을까 하여 틈만 나면 검은 동공과 생각을 눈덩이 굴리듯이 굴리면서 살아오신 분들이다. 한마디로 생각 중독자! 지금을 사는 우리 대부분은 알콜 중독이나 흡연 중독보다 더 지독한 생각 중독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을 끊어라는 말을 듣는 즉시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스프린터처럼 질주한다.

아니! 생각이란 게 끊기기도 한단 말이야?’

그것은 마치 알콜 의존자가 술을 끊어라는 말을 듣는 즉시 푸르게 빛나는 소주 한 병을 떠올리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생각한다.

, 역시 나는 수행할 팔자가 아니야. 나처럼 번뇌 망상이 많은 사람이 수행은 무슨!’

명상하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고 난 사람들이야. ! 생각을 끊으라잖아. 그까짓 생각이 뭐라고, 그것도 못 끊는 자가 무슨 명상은 명상이냐고!’

마음이 열려야 보인다
글쓰기명상은 그래서 생겨났다. 생각을 끊기 위해서라도 생각을 보고 알아차려야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을 보고 알아차리는 힘이 약한 나부터 구제할 방법은 없을까.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보고 알아차림으로써 창궐하는 생각들을 끊어내는 시스템이 있을 거야.’

알고 보면 붓다 또한 모든 중생의 생각을 스스로 드러내어 알아차리게 하신 분이다. 붓다는 당신을 찾아온 모든 대중의 내면에서 떠도는 생각들이 충분히 드러나는 환경을 조성해주셨다. 대중의 말을 경청하시고 반드시 그가 한 말을 토씨 하나 틀림없이 반복하셨다. 경전을 보면 정말,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신다. 대중은 붓다의 입을 통해 방금 전에 자신이 일으켰던 생각을 다시 듣는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붓다에게 온전히 수용됐음을 앎으로써 그는 비로소 생각을 그치기에 이른다. 이런 조건을 만든 후 붓다는 비로소 설법을 시작하셨다.

붓다 설법의 원리는 수용이고 경청이다. 글쓰기명상은 자신의 생각을 마음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문자라는 수단을 통해 보다 선명히 드러내고, 붓다가 그러하셨듯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토씨하나 틀림없이 확인하는 방편이다. 그럼으로써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먼저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마음이 열려야 자신의 생각과 언어가 보인다.

현대 심리학은 이런 마음의 메커니즘에 수용과 공감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내 생각이나 기억,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 있는 그대로 공감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더 이상 소모적인 생각 굴리기를 그치게 하는 명약임을 증명하는 학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스티븐 헤이즈(Steven C Hayes)는 자신의 생각을 수용하는 심리 시스템을 응용하여 수용전념치료라는 개념을 만든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애쓸 때 오히려 그 고통에 휘말리게 된다.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은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글쓰기명상은 혹시 당신에게 있을지 모를 고통을 수용하고, 그것을 글로써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글쓰기명상은 혹시 당신에게 있을지 모를 혼란을 수용하고, 그것을 온전히 글로 드러내어 살펴보는 것이다.

여기 이렇게 드러나 있는 나의 고통이나 혼란이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바람이나 구름 같은 일시적 현상인가.’

써놓고 보라. 오늘 보기 싫으면 내일 보라. 쓸 때의 상황이나 감정, 생각들이 그대로인지 아니면, 어딘지 낯설고 이런 감정이 있었나 싶기도 한지, 가만히 들여다보라.

글쓰기명상의 태도
태도(態度)’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취하는 마음가짐을 일컫는다. 여기서는 글쓰기명상에 대해 당신이 취하게 될 몇 가지 마음가짐을 풀어보자. 언급하는 몇 가지 마음가짐을 통해 글쓰기에 대한 당신의 가슴이 조금 더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글쓰기명상에 대한 마음가짐 첫째는, 쓰고 있는 자신을 믿는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쓰든 완벽한 글이라고 믿어라. 지구상 70억 인구 중에서 경쟁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당신이 쓴 글을 누군가 읽을 일도, 읽혀줄 일도 없는 바에는 정말, 내가 지금 쓰는 글이 지구상 최고의 문장이자 최후의 문장이라고 믿어도 하등에 꿀릴 일 없지 않은가.

둘째, 쓰레기 같은 글을 써도 좋다고 생각하라. 허접하거나 찌그러졌거나, 그림도 아니고 상형문자도 아니거나, 아무 상관이 없다. 내 친구는 글 쓰레기 산을 만들어도 좋다는 정신으로 글만 써댔더니 어느 날 작가가 됐다고 한다. 그 친구에게 욕을 한바탕 해줬는데, 다행히 둘 다 유쾌했다.

셋째, 가급적이면 손을 계속 움직여라. 마음이 먼저인가, 몸이 먼저인가. 이런 질문은 부질없다. 먼저인 놈이 먼저다. 어차피 나뉘지 않는다. 몸이 움직일 때는 몸이 마음을 이끌고, 마음이 움직이면 마음이 몸을 이끈다.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 손이라는 몸이 움직이면 마음이 뒤따라 움직인다. 계속 움직이면 마음도 계속 움직이며, 기억이나 생각, 감정 따위를 열렬히 수급한다. 염려마라. 노트에 글씨를 쓰든, 자판을 두들기든, 손가락을 다다다다두들겨보라. ‘두두두두하고 생각이나 기억이 숨차게 따라올 것이다.

넷째, 초등학교 1학년 때 일기장 검사하던 선생님의 잔영을 깨끗이 지워라. 그리고 맞춤법, 띄어쓰기, 비속어, 욕설 따위를 마음껏 남발하라. “아이 씨, , 그때 왜 그랬어요?”라고 써 갈겨라. 글쓰기명상은 이런 태도가 몸에 익을 무렵 이륙을 위한 날개를 편다. 나의 속물성과 비합리성, 분노, 폭력성, 욕설, 탐욕 따위가 노트 위에 여름날 마당 가득 널린 태양초처럼 붉은 빛으로 선연하도록 내갈겨라.

다섯째, 논리적 사고는 쓰레기통에 처박고 시작하라. 당신은 문자라는 문명의 유물을 붙들고 근사한 기승전결놀음을 하다가 정작 챙겨야 할 내 마음과 결별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내 안의 원초적 자유분방함, 그 순결성, 그 천연덕스러운 바보는 다 어디로 갔는가. 집에서도 논리, 회사에서도 논리, 심지어는 술집에서도 논리적으로 말하라는 악다구니에 시달리는 당신의 뼈와 살.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 삶의 궤적이야말로 비논리 천지다. 논리나 계산대로 살아진 적이 얼마나 있던가. 인간관계가 논리적으로 엮여지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사랑과 이별도 그렇다. 우연과 비논리의 생명체가 논리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대는 상황이 당신의 현실 아닐까. 이 간극이 더 벌어지기 전에, 천진한 비논리, 어여쁜 내 삶의 비논리적 내면을 마음껏 드러내보라. ‘기승전결글쓰기 따위는 내던져버려라.

여섯째, 두려움이나 발가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계속 써가라. 두려움이나 네거리에 발가벗고 선 듯한 느낌이 들지 않으면, 당신은 글쓰기명상의 궤도에 들어선 게 아니다. 당신은 여전히 타인의 눈과 입술 앞에 오도카니 앉아 뒤통수로 그를 의식하면서 끄적거리는 형국이다. 이때 당신이 할 일은 그를 향해 도끼눈을 한 번 날리는 것이다.

일곱째, 당신 앞에 무엇이 있든, 무슨 생각이 나든, 바로 거기서부터 써라. 시인 안도현은 내 앞에 있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한다. 내 안의 하찮아 보이는 한 생각, 내 눈앞에 놓인 찢어진 수첩 한 장, 손톱깎이 따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써 나가보는 것. 글쓰기명상은 그런 하찮거나 작거나, 비루한 것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려보듯 써나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여덟째, 비약이나 엉뚱한 비유 따위를 마음껏 구사하라. 내 안의 생각이나 기억, 감정, 어떤 스토리는 이미 그림자이자 만화이고 영화와 같은 상태다. 박제되거나 화석화돼 있는 내 안의 마음이다. 이것들이 당신의 진술을 통해 생동하는 글이 되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다. 당신은 그것을 글로써 드러내는 순간이 목적이자 결과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글을 쓰는 순간의 당신 마음껏 비유하고, 비약하고, 반전시키는 권력을 누리는 게 우선이다.

아홉째, 쓰고 난 글은 어떻게 할까. 글쓰기명상의 원칙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련 없이 버리거나 소각하는 원칙을 지켜라. 이 조항은 소위, 11항이다. 이왕이면, 강물 위에 글을 쓴 듯 마음도 씻어내기 바란다. 지금 내가 쓴 글이 금과옥조 같은 명문이라 해도, 당신의 생각이 보석 같은 가치를 갖는다 해도 그냥 흘려보내왔듯이, 글쓰기명상 또한 마찬가지다. 쓰고 난 글은 버리고 비우고 초연하라. 당신이 버린 글보다 아직 쓰지 않은 내면 드러내기에 더 가슴을 활짝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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