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로운 길 위에서 수행 의미 찾다

25번 사찰인 신쇼지 본당으로 올라가기 위한 순례자들. 시코쿠 순례자를 상징하는 흰 옷을 입고 오르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장엄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모기가 없을 것이란 생각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몰려오는 모기들을 피해 지친 몸을 끌고 갈 곳은 없었고, 결국 판초우의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었다. 잠결에 내 코끝에 모기가 한 마리 붙어 있던 것까진 기억이 난다.

아침 해가 어슴푸레 뜰 새벽 무렵, 모기들의 극성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이상하게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세수를 하러 근처의 공중화장실로 갔다. 세면대의 거울을 보는 순간 그만 너털웃음을 내고 말았다. 침낭 밖으로 나와 있던 얼굴만 잔뜩 모기에 물린 것이다. 재미삼아 몇 곳이나 물렸는지 세어보니 88곳이 물려있었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 다 있나.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야
25번 사찰 본당 순례 가능
‘키잡이 지장’ 영험담 눈길

토치 순례, ‘수행’인 이유를
길고 단순한 길 걸으며 찾아

‘누가 88개소를 다니는 순례자 아닐까봐 얼굴에까지 번호를 매겨두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열이 나 화끈거리는 얼굴을 차가운 물로 여러 번 씻고서 약을 발랐다.

침낭을 정리한 후 배낭을 싸고서 다시 미쿠로도에 들어갔다. 코보 대사가 젊은 시절 이곳에서 수행하던 일을, 대사는 스스로 이렇게 남기고 있다.
‘토사국(土佐國)의 무로토노 사키(室戶崎)에서 일념으로 수행하였다. 그러자 샛별이 날아와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하여 수제자였던 신제이(眞濟) 스님은 자세한 설명을 남겨두었다. ‘토사지방의 무로토노 사키에서 선정에 들었는데, 샛별이 입으로 들어왔다. 부처님의 위신력이 이적을 보임은 대사의 고행과 절개로 인한 것이다.’

코보 대사는 이곳에서 허공장구문지법(虛空藏求聞持法)을 수행했다. 앞서 순례했던 21번 타이류지나 다른 곳에서도 수행했다고 전해지지만, 많은 기록과 전설이 코보 대사가 구문지법을 성취한 곳이 이 동굴이라고 전한다. 동굴 천장 한 켠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커먼 검댕이 붙어있다. 코보 대사를 따라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증거다.

뒤를 돌아 동굴 입구를 바라본다. 떠오르는 아침햇살이 동굴을 비춘다. 비록 샛별이 내 입안으로 들어오진 않지만, 밝은 햇살이 나를 비춰준다. 어젯밤 모기에게 시달린 것도 잊고 내가 지금 시코쿠를 순례하고 있단 사실에 큰 감동을 느꼈다. 동굴안의 불단을 향해 합장하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다시 힘내서 걸어가겠습니다.”
24번 사찰을 향하는 길로 방향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파른 고갯길을 40분가량 오르자 산문이 나타났다. 아직 납경소의 문도 열리지 않았고, 청소하시는 거사 혼자 빗자루로 본당 앞을 쓸고 있었다.

호츠미사키지의 이름은 ‘불이 빛나는 곶’이라는 뜻이다. 옛날 절 옆의 바위 위에 불을 놓아 어부들이 등대로 쓰던 데에서 유래했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등대가 서있어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1872년까지 이곳은 여인금제(女人禁制)의 도량으로, 여성 순례자들은 등산로부터 들어 올 수 없었다. 대신 등산로 옆의 여인당(女人堂)을 참배하고서 다음 사찰로 향했다고 전해진다.
본당과 대사당을 차례로 참배하고 납경소를 향하니 때마침 문이 열려있다. 납경소 직원 분이 내 얼굴을 보곤 말을 붙인다.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어제 노숙하다가 모기한테 물렸습니다.”
“세상에! 어디서 노숙을 했습니까?”
“미쿠로도 앞 바위틈에서 노숙을 했는데 이리 됐네요.”
“아휴, 거기는 모기가 많은 곳이에요. 차라리 다른 동굴이 좋았을 겁니다.”

아침 첫 납경을 받고선 25번 사찰을 향해 걷는다. 차도를 따라 구불구불 내려가는 길은 멀리 태평양이 펼쳐진 장관이다. 다음 사찰까지는 약 7km로 원래라면 2시간 가까이 걸을 길이지만 내리막이 1/3이나 되다 보니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25번 사찰 신쇼지(津照寺)는 재미있는 배치로 이루어져 있다. 평지에 홀로 우뚝 서있는 언덕의 정상에 본당이 있고, 산 아래에 대사당과 요사 등이 모여 있다. 가파른 계단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배낭을 메고 올라갈 자신이 없어 먼저 납경소를 들렀다.

납경소에 부탁해 대사당 한 곳에 배낭을 두고서 정상의 본당을 향해 올랐다. 24번 호츠미사키지를 오르는 길은 그래도 산길이라 편했는데, 이곳은 그저 돌계단이 이어지니 다리가 비명을 질러댔다. 정상을 오르니 시멘트로 만든 본당이 비좁게 서있었다. 대사당과 요사는 전통적인 건물인데 본당만 생뚱맞은 시멘트 건물이라 이상하게 여겼는데, 비바람이 워낙 거세 전통적인 목조 건물로는 버틸 수가 없단다.

신쇼지의 본존인 지장보살상은 예로부터 수많은 영험담이 전해져 유명하다. 그 중 하나만 소개하자면, 토사의 영주가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태풍을 만나 뱃길을 잃고 말았다. 이때 한 스님이 나타나 키를 잡고 뱃길을 안내했다.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고서 스님은 당신의 사찰로 간다며 사라졌다.

영주가 스님을 불러 치하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신쇼지에 보냈더니 스님은 없고 본당에 모셔진 지장보살상이 물에 흠뻑 젖어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로 인해 지역주민들은 신쇼지에 모셔진 지장보살상을 바닷길의 안전을 보살펴 주시는 분으로 모시고 있다. 별명도 ‘키잡이 지장님’이다.

납경소로 내려와 납경을 받곤 늦은 아침을 먹을 겸 미숫가루를 먹고 있노라니, 한 서양인 할아버지가 납경소로 들어선다. 나를 보곤 서툰 일본어로 물어본다.

“여기가 본당인가요?”
나는 영어로 대답했다.
“아니요. 여긴 대사당이고, 본당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해요.”
“어! 당신 일본사람 아니죠?”
“네, 한국인이에요.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발음이 일본 발음이 아니네요.”

할아버지는 본당을 향하는 계단을 올려다보더니 내 옆에 앉았다. 미국에서 왔다는 할아버지는 미국에 사는 일본인 친구에게 이 길에 대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두 권의 납경장에 납경을 받고 있다며 납경장을 보여줬다.

“그런데 대체 이 글들은 무슨 뜻인가요. 아무도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아, 사찰에 모셔진 부처님의 이름과 도장들이에요.”
“그런 뜻이었군요! 난 다 똑같은 뜻이라고 생각했어요.”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지난 밤의 피로가 싹 날아갔다. 다시 힘내서 걸을 시간이다. 오늘의 목표는 26번 콘고쵸지(金剛頂寺)까지 순례하고, 다시 17km 정도 떨어진 마을인 타노(田野)까지다. 타노역 앞 휴게소에서 노숙할 생각이지만, 제발 모기가 적길 바랄 뿐이다.

26번 콘고쵸지까지는 4km 남짓한 바닷길과 야트막한 산길이 이어진다. 산 중턱에 시원하게 자리 잡은 콘고쵸지의 본존은 약사여래불. 코보 대사가 기도를 하며 조성했다는 불상은 본당이 완성되던 날 스스로 수미단 위로 걸어 올라가 자리에 앉으셨다고 한다.

콘고쵸지의 대사당도 재미있는 전설이 전한다. 코보 대사가 이곳에 콘고쵸지를 세울 때 이 산에 살던 텐구(天狗)들이 공사를 계속해서 방해했다. 텐구는 일본에서 불교를 방해하는 요괴로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육도윤회와 별개로 텐구도(天狗道)가 있다고도 말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다.

이에 코보 대사는 텐구들을 모두 불러 담판을 지었다. 대사의 덕망과 불법의 높은 뜻에 교화된 텐구들은 대사가 있는 동안은 경내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사찰이 완공되고 대사가 떠나면서, 혹시 텐구들이 사찰을 침범할까 자소상을 만들어 나무에 올려둔 곳이 지금의 대사당이다. 혹 지금 모셔진 대사상이 당시의 대사상인지 궁금해 납경소에 물어보니 당시 대사상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를 모사해 조성한 상이 봉안돼 있단다.

콘고쵸지까지 순례를 마치니 이제는 잠자리를 향해 하염없이 걸어갈 시간이다. 바다를 끼고 계속해서 걸어가자니 역시나 지루하다. 몇 번이나 버스를 탈까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걸어온 것이 아까워 꾸역꾸역 걷는다.

어느덧 해는 서쪽 하늘에 걸려가고, 주황빛 노을이 건물들을 비출 쯤 타노역에 도착했다. 역 앞의 휴게소에서 노숙이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침낭을 펼만한 장소가 안 보인다. 염치 불구하고 역 직원에게 노숙할 곳을 물으니 휴게소 뒤편 공터로 안내한다. 노숙하는 순례자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잠을 청한다고 한다.

한 바퀴 둘러보니 전기콘센트며, 수도, 화장실도 근처에 있다. 잠시 앉아서 가만있어보니 모기가 달라붙지 않는다. 그야말로 최고의 잠자리 아닌가! 해가 지길 기다려 침낭을 펴고 누웠다.
내일은 하루 종일 걸어도 27번 사찰을 순례하면 하루가 끝이다. 코치현이 수행의 도량이라 불리는 이유는 다름 아닌 여기에 있다. 사찰들 간의 거리도 멀고 길도 단조로워 지치기 쉬운 길. 이 길을 걸으며 나는 어떤 경험을 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수행에 녹여낼 수 있을까? 고단한 몸을 침낭 속에 뉘였다.

25번 신쇼지 본당을 참배하는 일본인 순례자들의 모습.

순례의 Tip
- 코치현은 사찰 간의 거리가 멀다. 가급적 부식거리를 항상 지참하며 걷자.
- 노숙 순례를 원한다면, 노숙 장소에 대한 정보에 주의하자. 때나 장소에 따라 노숙이 금지되는 곳이 많다.
- 노숙 시 노숙 장소를 깨끗이 쓰고, 공중예절을 지키도록 하자. 매너 없는 행위로 노숙이 금지되는 곳이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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