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공/아날라요 스님 지음/이성동, 윤희조 옮김/민족사 펴냄/1만 5천원

〈자비와 공(空)―아날라요 스님의 초기불교 명상 수업〉(이하 〈자비와 공(空)〉)이란 제목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두 주제는 자비(연민)와 공이다. 이 둘은 불교를 대표하는 핵심 개념이다. 특히 대승불교권인 한국불교는 자비 정신을 구현한 보살사상을 그 본질로 한다. 또 공은 연기(緣起), 무아(無我)와 더불어 불교를 대표하는 사상이다. 자비는 공이라는 불교적 지혜와 결합되지 않으면 잘못 이해될 수 있고, 공은 자비와 결합하지 않으면 완전해질 수 없다. 자비와 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저자 아날라요 스님〈사진 아래〉은 붓다의 초기 설법 가운데 자비와 공이라는 주제와 연관된 구절들을 빨리 경전, 한역 아함경, 산스끄리뜨와 티베트 경전서 발췌해 섬세히 비교 검토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은 한국에 명상과 심리학 분야 책들을 꾸준히 번역 소개한 정신과 전문의 이성동 선생과 불교학자로서 불교심리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윤희조 선생이 공동 번역해 신뢰도를 높였다. 

불교 대표하는 핵심 개념… 자비, 공
붓다 초기 설법 중 자비, 공 주제 선별
“붓다는 연민으로 사성제를 가르쳤다”


스님의 경전 번역 및 연구 방법론은 〈마인드풀니스〉를 쓴 조셉 골드스타인을 비롯한 서구의 대표적인 명상가들, 그리고 불교를 공부하는 전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또 한 스님의 글은 논리적이나 과학적으로 존재의 실상을 간파해 들어가면서도 가슴 깊은 울림을 준다. 교학과 수행을 겸비한 아날라요 스님이 직접 수행하면서 터득한 깨우침과 노하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1장에서는 연민의 성격에 대해 탐구한다. 2장에서는 표준적인 사무량심의 틀 안에서 연민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를 살핀다. 3장에서는 연민을 성숙시킴으로써 기대되는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다음 세 장은 공(空)을 탐구하는 데 주력한다. 특히 명상을 통해 공으로 점차 나아가는 것에 대해 다룬다. 7장에서는 명상 수행을 하면서 연민에서 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실제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8장에서는 〈업에서 생긴 몸 경〉 〈공에 대한 작은 경〉 〈공에 대한 큰 경〉에 대응하는 〈중아함경〉의 해당 경전의 번역문을 실었다. 

자비는 엄밀히 말하면 ‘자(慈)’와 ‘비(悲)’로 나눠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자(慈)’의 원어는 빨리어 ‘metta’로서, 친밀하다는 느낌과 우정의 태도를 뜻한다. ‘비(悲)’의 원어는 ‘연민’을 뜻한다. 아날라요 스님은 자비를 섬세하게 구분해 특히 ‘연민’으로 번역한 비(悲)의 기능에 주목한다. 그리고 붓다의 초기 설법서 연민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고 사무량심(四無量心)의 맥락 안에서 그것을 파악하면서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의 첫발을 뗀다. “붓다는 연민으로 사성제를 가르쳤습니다. 초기설법서 붓다가 연민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은 주로 다르마(Dharma)의 가르침을 통해서입니다. (…) 가르침을 구하는 자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베푸는 자 모두 그 가르침을 연민의 한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붓다가 제자들에게 베푼 가르침은 종종 정감 어린 말씀, 즉 스승이 연민 어린 마음에서 제자들에게 해야만 하는 것을 하였노라는 식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붓다가 일단 연민에 가득 찬 스승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하면, 그 다음 순서로 제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붓다를 의왕(醫王)이라고도 한다. 괴로움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치료하는 최고의 의사라는 뜻이다. 이런 행동의 바탕에 연민이 있었다. 초기불교 사상에서 연민의 활동은 다른 사람들을 번뇌에서 벗어나 자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런 활동은 붓다가 자신이 깨우친 진리인 사성제를 다른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쳤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붓다는 연민에 가득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그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연민은 윤리적 행위와 명상적 삶의 방식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붓다의 연민을 자만심과 자기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동정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또 연민을 슬픔의 정서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연민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슬픔을 피해야 한다. 아날라요 스님은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연민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슬픔에 젖어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명상으로 연민을 함양하는 것은 마음이 슬픔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괴로움과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 정신적으로 동정을 표하는 대신, 연민의 마음으로 우두커니 서서 다른 사람들이 괴로움과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소망과 열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소망은 슬픔과 탄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또한 자유로워져야만 합니다.” 

연민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런 소망은 슬픔 대신 긍정적인 마음, 때로는 희열에 가득 찬 마음을 이루게 된다. 이는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다른 사람의 아픔과 괴로움에 진정으로 반응하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에서 출발해, 그 사람이 고통과 괴로움서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가득 찬 긍정적인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날라요 스님은 연민이 빠질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을 피하는 한 가지 방법이 연민을 사무량심의 맥락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애라는 마음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행동과 언어에 스며들어서, 자비에 튼튼하게 뿌리를 두고,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게 됩니다. (…) 연민은 자애라는 잘 확립된 토대에 기반해 가장 잘 계발되고, 여기에 더하여 나머지 두 무량심, 즉 더불어 기뻐함(sympathetic joy, 喜心)과 평정심(equanimity, 捨心)이 연민을 보완해 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무량심은 어떤 면에서는 연민을 기르는 것을 마무리해 줍니다.” 

“붓다조차도 평정심이 때로는 적절한 태도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런 예는 평정심이 무량심 중의 하나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연민에 가득 찬 활동을 하였음에도 사려 깊지 못하거나 때로는 차가운 반응에 직면할 때, 그때는 평정심으로 옮겨가야 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황을 지배하고 더 나은 것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 대신 당사자들이 자신의 행동과 태도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평정심은 연민을 완성합니다. 왜냐하면 평정심으로 인해 연민에 가득 찬 행동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연민에 가득 찬 행동은 필요한 경우 평정심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연민은 결과를 바라면서도 성공적인 결과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요구하는 바대로 연민은 평정심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연민은 자(慈: 자애)·비(悲: 연민)·희(喜: 더불어 기뻐함)·사(捨: 평점심)라는 사무량심(四無量心, 네 가지 고귀한 마음)과 결합될 때 완전해진다. 연민이 기반하고 있는 자애(慈)는 특정 대상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애착과는 구분된다. 자애의 마음은 특정 대상에 한정되지 않고 무한하게 퍼져나간다. 이런 자애는 분노에 대한 해독제이다. 또 연민은 더불어 기뻐함(喜)과 평점심(捨)으로 보완돼야 하는데, 더불어 기뻐함은 다르마를 가르치는 연민에 가득 찬 활동과 연관되어 있다. 평정심은 연민의 대상인 중생은 혐오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더불어 기뻐함의 대상인 중생은 열정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자애의 대상이 되는 중생은 무지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연민을 포함한 사무량심을 함양하는 것은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하는 방식이 윤리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아날라요 스님은 연민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에서 물러서 있는 것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몸, 말, 정신적 행위에 친절함을 결합함으로써 본격적인 수행을 위한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수행 방식은 선방에 앉아서 하는 좌식 수행의 틀을 떠나서 명상 수행이 어떻게 실제 생활에서 드러나는지를 보여 준다. 명상으로 연민을 계발한 사람은 마음의 잔인함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일단 이것이 확립되면 불선(不善)한 행동이 일어날 여지도 거의 없다. 수면의 질이 좋아지는 등 일상생활에도 도움이 된다. 연민은 자기를 정화하고 내적 균형을 잡도록 도와주면서 다른 사람들을 더 잘 보살필 수 있도록 해 준다. 초기불교에서 안거 수행을 강조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안거 수행은 연민의 활동으로 전환된다. 자기 자신의 유익함과 다른 사람의 유익함을 위한 깨달음, 그것을 추구하는 열망이 갖는 변화의 힘을 통해 이런 전환이 일어난다. 그래서 연민은 궁극적 해탈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아날라요 스님은 까시나 수행이나 호흡 수행도 수행자를 집중으로 이끌어주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반면 연민(자비) 수행은 집중은 물론 수행자의 태도와 정신적 상태까지 변화시킨다. “〈디가 니까야〉와 이에 대응하는 〈장아함경〉에서는 사선정을 수행자의 ‘행복’으로, 그리고 사무량심을 수행자의 ‘부(富)’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 두 경전의 미묘한 차이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연민을 포함한 사무량심을 함양하는 것은 행복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부에 비견할 만한 정신적 상태에 도달하는 결과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에 내재된 핵심은 사무량심을 함양하는 것은 다른 정신적 평정보다 뚜렷한 이점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까시나와 같은 대상 또는 호흡을 대상으로 명상하는 것은 물론 집중으로 이끄는 뛰어난 잠재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중을 획득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이 까시나이든 호흡이든 명상의 대상으로 선택된 특별한 대상은 그 자체로는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지지해 주는 어떤 실질적인 유익함도 주지 못합니다. 반면 연민을 포함한 사무량심은 다릅니다. 깊은 집중으로 이끄는 능력에 더하여, 하나의 무량심이 명상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태도와 정신적 상태에 변화를 야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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