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 니까야에 들어 있는 이야기다. 최고 계급이라 일컬어지는 바라문 출신인 젊은 스님 한 분이 영 마음 속이 복잡했던 모양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의 속마음도 헤아릴 줄 아는 분인지라 부러 그를 찾아가 넌지시 그 사정을 물으신다. 뜻밖에도 제자는 이런 속내를 털어놓는다.

“저와 같은 바라문 사람들이 제게 엄청난 비난을 쏟아 붓습니다. 가장 높은 계급인 제가 어찌 저보다 낮은 신분의 고타마 붓다 제자가 될 수 있느냐고 말이지요.”
 

바라문 출신 젊은 스님의 고민
“왕족 계급 붓다 제자라고 비난”
출가 전 계급, 사람들에 시달려

지위 낮은 사람에게 폭력 행사는
현재도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아
체육계 폭력·미투가 이를 보여줘

부처님, 갑질러들에게 혹독 비판
“행동 고결하지 못하면 곧 노예”
서로 진정한 벗 되는 慈心도 제시
단호하며 따뜻한 대처를 본받자


출가 전 부처님의 신분은 왕족계급인 크샤트리아. 그러니 바라문보다 낮은 계급인데 그런 자의 제자가 된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정은 더 복잡하다. 승가에는 신분 계급 차별 없이 오직 진리를 존중하고 수행하려는 자들이 어울려서 지내고 있는데, 낮고 천한 자들과 어찌 한데 어울려서 지내고 있냐는 것이다. 젊은 스님은 출가 전 계급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니까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사람의 목숨에 높낮이를 정해놓고 심지어 거기에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가치평가까지 내리던 시절이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우리 사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하며 사람을 나누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가진 자들이, 있는 자들이 권력과 명예와 부를 등에 없고 온갖 패악질을 부리고 있다. 자신보다 덜 가지고 자신보다 지위가 낮고 자신보다 체력이 약하고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가차 없이 유세를 떨고 있다. 폭력도 그런 폭력이 없다. 유세를 떠는 정도의 폭력이 아니라 물건을 던지고 주먹질을 해대고 심지어 성폭력까지 저지르고 있다. 

그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대처하고 계실까. 모진 수모와 폭행을 함부로 부리는 이들에게 ‘모두가 평등하다’고 따뜻한 법문을 주셨다고 생각하는가. 참고 견디라며, 그런 상태를 수행의 일종으로 삼으라고 다독이셨을까. 그런 법문은 기대하지 말자. 

부처님은 매우 현실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자기 핏줄의 맑고 깨끗함을 자랑하는 이에게는 그들의 가문에 깃든 출생의 비밀을 터뜨리신다. 그대들 조상 몇 대쯤에 이런 ‘얼룩’이 있는 걸 알고서 그리 행동하느냐는 일갈이다. 

게다가 노예나 천민계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행동이 윤리적이지 못하고 고결하지도 못하다면 그게 바로 노예요 천민이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정말 그렇게 잘난 핏줄이라면 행동도 잘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자기보다 낮고 약한 사람에게 권세를 부리고 유세를 떨고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 악업의 과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며 노골적으로 비판하시는 분이 부처님이다.

이미령 칼럼니스트

하지만 따뜻한 대안도 있다. 유명한 자심(慈心)이 그것이다. 흔히 사랑, 자애로 번역하지만 이 말에는 우정이란 뜻이 담겨 있다. 상대방을 내 벗으로 맞아들이는 마음인 자심은 배려심(配慮心)이라 옮겨도 좋을 듯하다. 배(配)란 짝, 파트너란 뜻이 아닌가. 상대방은 함부로 대해도 무방한 존재가 아니라 나만큼 소중하고 나의 진정한 벗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자심이다. 그래서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라는 말이 나왔나보다. 때로는 단호하게 그러면서도 따뜻한 대안으로 갑질을 대처하는 부처님의 방식을 배울 만하다.

갑질의 횡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언론을 장식한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갑질의 폭력은 더 많고 이제 시작이라고들 한다. 무얼 믿고 저리 행동했을지 묻고 싶다. 저들의 횡포를 보자면 세상에 둘도 없는 싸구려들의 삶을 보는 것만 같아 안쓰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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