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과 비움의 의미

 

근래 미니멀 인테리어의 유행과 더불어 〈버리면 버릴수록 행복해졌다〉, 〈누구나 꿈꾸는 미니멀 라이프〉, 〈아무 것도 없는 방에서 살고 싶다〉, 〈처음 시작하는 미니멀 라이프〉 등 최근 출간되는 책들의 제목만 보아도 간결한 삶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최근 불고 있는 소확행(小確幸), 퀘렌시아(Querencia) 트렌드와 더불어 비움과 무소유를 표방하는 미니멀리즘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도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되어가는 추세이지만, 정작 단순하게 살기란 쉽지 않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은 단순하게 사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

얼마 전 대학교 기말시험 때의 일이다. 삼십분 즈음 지나 몇몇 학생들이 답안지를 제출하고 시험장 나가기를 청했다. 감독인 나는 다른 학생들의 불편을 염려하여 그 청을 거절했다. 잠시 후 학생들의 표정이 초조함에서 막막함으로 그리고 두려움으로 점차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적막함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 본 경험이 없었을 그들이었다. 지켜보기가 안타까워 인터넷을 검색하여 아직 답안을 작성하는 학생들에게 피해가 없을 정도로 나지막이 피아노 명상 음악을 들려주었다. 불편해하던 학생들이 그나마 작은 안식처를 찾는 듯 했다. 시험을 마치고, 학생들에게 겨울방학에는 산사나 수도원 혹은 숲 속이나 바닷가를 찾아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했다. 시큰둥한 표정이었으나 적잖은 동요가 느껴졌다. 비단 학생들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다. 우리 또한 그 ‘비움’에 스스로를 내놓은 적이 얼마나 될까?

정신의 절대적 단계 ‘비움’
미술의 ‘미니멀리즘’ 표현
여유로운 삶의 새 방식

‘최소한’이라는 의미의 미니멀(minimal)과 주의(ism)를 결합한 ‘미니멀리즘’은 2차 세계대전 후, 1960~1970년대에 일어난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미술운동이다. 미니멀리즘 미술에서는 형태와 색채의 단순함뿐만 아니라, 사물 자체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미술가의 감정과 사상의 개입을 최소화한다. 미술가의 감정만이 아니라 작가성 또한 배제한다. 불필요함을 제거하고 본질만을 남기려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이후 시각미술뿐 아니라, 패션·건축·음악 등 여러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작가의 개성적 손길과 감상자의 감정이입마저 최소화된 미니멀 아트는 사물 그 자체가 되고자 한다.

도미니크 로로는 자신의 저서 〈심플하게 산다〉에서 ‘심플한 삶이란 적게 소유하는 대신 사물의 본질과 핵심으로 통하는 것’이라 언급한다. 인생에서 정말 소중하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여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데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깨달음이 미니멀 라이프의 근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적게 소유하기, 비우기, 버리기, 무소유란 단어에 현혹되어 정작 본질을 놓쳐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진정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사각형’을 보는 관람객.

 

위의 작은 사진 속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아름다운 여인도 아니 보이고, 화려한 꽃다발도 멋진 풍경도 없다. 그저 흰 화면 위에 검게 칠해진 사각형이 전부다. 아무것도 없이 적막 속에서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했던 학생들처럼, 이런 종류의 작품 앞에 서면 막막해진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의 시선은 당황스럽기만 하다.

〈검은 사각형〉을 그린 작가는 러시아 화가이자 미술교사였던 카지미르 세베리노비치 말레비치(Казимир Северинович Малевич)다. 단순한 하얀색 바탕에 검은 사각형 하나가 있을 뿐인 이 작품은 모더니즘미술에서 가장 극단적인 추상의 형태인 절대주의(Suprematism)의 탄생을 보여주며, 이후 단순성, 명료성, 반복성, 사물성을 특징으로 하는 미니멀리즘의 효시가 된다.

말레비치는 예술의 절대주의를 선언한다. 말레비치는 “나는 자신을 영(Zero)의 형태로 만들었고 무(無)에서 창조로 나아갔다. 그것이 절대주의고, 회화의 새로운 리얼리즘이고, 대상이 없는 순수한 창조다”라고 말했다. 순수 감성이란 어떤 모방이나 형태로도 표현할 수 없기에 외부세계의 재현을 거부하고, 형상마저 없애버린다. 그에게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가시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절대적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검은 사각형〉은 맑고 차갑고 투명한 고독의 극치에서 외친 말레비치의 탄성과 같은 그림이다. 1915년에 열린 ‘마지막 미래주의 전시: 0,10’라는 이름의 단체 전시회에서 ‘절대적인 텅 빈 무(無)’의 상태를 나타낸 이 작품을 발표한지 20년 후, 말레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하는데, 죽기 전에 검은 사각형과 원으로 자신의 관 뚜껑을 직접 디자인했다. 형태를 지우고 빛과 색의 부재 속으로 들어간 말레비치는 어쩌면 검은 색 사각형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신마저 지워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유언에 따라, 말레비치는 모스크바 인근 넴시노브카(Nemchinovka)의 떡갈나무 아래 묻혔다. 친구 니콜라이 수에틴(Николай Суетин)이 하얀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을 묘지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무덤은 2차 세계대전 중 파괴되었고, 2013년에는 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현재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고 당시 기록 사진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소련 시절에 이루어진 집단 농장, 강제 산업화, 전쟁 및 냉전을 거치면서 잊히고 사라져간 그의 소박한 무덤은 어쩌면 러시아의 슬픈 근대 역사의 자화상이 아닐까.

말레비치는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경계가 끊어진 자리의 깊고 고요한 어둠을 통해, 감각 너머 절대순수성에 도달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근원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은 노발리스가 말했던 모든 시공간의 구분이 사라져 태초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순간인 ‘신성한 밤’이고, 니체가 주장했던 영원회귀의 시간을 의미하는 ‘깊은 밤’이다. 동시에 세계 내지 존재의 근원에 대해 말하는 침묵의 목소리다. 그의 〈검은 사각형〉에서 모든 색을 받아들여 텅 빈 무의 세계, ‘없되 없지 않으며, 있되 있지 않은 상태’,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는 상태’, 무와 유가 하나인 ‘공’의 상태인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세계를 만난다.

이후 〈검은 회화〉 시리즈를 제작한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는 “보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 그 자체다”라는 말로 미니멀리즘을 요약하며, 비움과 있는 그대로 바라봄에 대해 언급한다.

고요하고 텅 비어 본래 한 물건도 없으니
신령스러운 빛은 눈부시게 온 누리를 비추네
저 삶과 죽음을 받을 몸과 마음 이제 없거니
가고 옴에 전혀 걸리는 것이 없네

湛然空寂本無一物 靈光赫赫洞徹十方

更無身心受彼生死 去來往復也無핯碍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 중에서

조선 초 승려로 일생을 수행자로 살다 가신 함허(涵虛) 스님의 임종게다. 이 게송은 고요하고 텅 비어 형체나 흔적이 없으며, 오직 비고 비어 비고 빈 거울뿐이며 오고 감에 티끌 하나 걸리지 않는 우리의 마음 본래 자리에 대한 스님의 마지막 깨달음을 사무치게 전해준다.

최소한의 물건만 소유하고자 하는 일명, 자발적 가난은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비움, ‘청빈’이어야 한다. 법정 스님은 말씀하시길,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그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청빈의 덕을 쌓으려면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단순과 간소함이란 본질적 세계입니다. 불필요한 것을 제외한 꼭 필수불가결한 것만 있는 결정체 같은 것입니다. 단순과 간소, 이것은 침묵의 세계, 텅 빈 공(空)의 세계입니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단순과 간소에 있습니다. 마음을 비운 사람은 행복합니다.’

마음의 온갖 욕망과 욕심은 그대로인데 아무리 엄청난 양의 물건을 내다 버리고 처분하여 집 안을 텅 비운다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뿐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 이다. 지난날의 슬픔과 다가올 날의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아 좀체 끊기 힘든 집착과 번뇌로 이끈다.

진정한 비움은 비움의 욕망마저 떨치고, 지금 여기에 이미 내가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는 일이다. 진정한 비움은 기억과 기대가 아니라 오직 이 순간을 사는 일이고, 어떤 집착도 걱정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그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비움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가야할 곳도, 해야 할 일도, 얻어야 할 특별한 것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한 비움이다. 비움은 있고 없음의 경계, 크고 작음의 경계, 높고 낮음의 경계, 너와 나의 경계, 시작과 끝의 경계, 나고 죽음의 경계까지도 없는 무의 세계에서 걸림 없는 자유로운 본래 존재로의 열림이다.

‘인류의 미래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내면의 깊이를 발견하고, 그 내면에서부터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얼마나 끌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아널드 토인비)

미니멀리즘은 인생을 더없이 충만하게 사는 기술이 되고, 무분별한 소비주의 삶에 대한 반성과 다음 세대와 전 지구적 자원의 환경 윤리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여유와 행복을 향한 삶의 새로운 방식이다. 채움보다는 비움을, 성공보다는 성장을 바라는 진정한 삶의 미니멀리스트로 인해 세상은 맑고 향기로울 것이다.

김원숙 교수는

‘미재’(渼縡)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불교미술학자다. 현재 건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로 출강하고 있으며 동탄후마니타스아카데미 대표직을 맡고 있다. 그외 영남대 박물관 특별연구원,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길 위의 인문학-미재와 떠나는 행복한 미술여행’, 서울시시민대학강좌, 화성시립도서관, 오산시립도서관, 군포시립도서관, 남양주시립도서관, 동해시립도서관 및 미술관 등에서 시민대상 인문학 강좌를 진행해왔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