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서)

그래서 어떤 때는 신도님들더러 내가 그러죠. “남편을 원망하지 마라. 너도 전에 그랬잖아. 지금 네가 그렇게 당하는 거를 생각해 보면, 금방 당할 때는 알지만, 과거로부터 당해서 지금 현실에 온 것은 너는 몰라. 너도 남을 그렇게 아프게 했어. 그러니까 네 탓으로 돌려. 그러면 그것이 다 소멸돼.” 그렇게 합니다. 사실이고요, 또 그게. 뭐, 그걸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의 도리를 빨리 배우려면 이유를 붙이지 마세요. 이유를 붙이면 빨리 일심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것은 일심으로 정진해야 하거든요. 소멸시키는 실천이거든요. 우리가 실천하는 겁니다, 지금. 정진이다 뭐다 이름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실천해 가는 거예요. 소멸시키는 실천요. 그래서 다른 이름은 붙이지도 않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는 여러분처럼 아주 지식이 많고 학식이 많아서 이렇게 여러분한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길이 없는 길을 알기 때문이죠. 길을 알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이 마음도리를 배우려면 이유를 붙이지 마세요
이유를 붙이면 일심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것은 일심으로 정진해야 하거든요.

 세상에 가만히 살펴보세요. 내가 아까 아주 중요한 말을 했는데요. ‘물에 가면 주해신이 된다. 모든 걸 자유스럽게 대치해 나갈 수 있는 주해신이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거든요. 기독교 믿는 사람이 “나는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하듯이 말입니다. 이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실천이 중요하지. 그래서 천차만별의 마음은 ‘그 마음이 없는 것이 마음이다’ 이겁니다. 부처라는 이름이 없는 것이 부처지, 부처라는 이름이 있는 것은 부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북하면 “마음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을 했을까요.

그러니까 마음을 자유스럽게 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자유스럽게 실천하지 못한다는 얘기예요. 여러분도 사람이기 때문에 부딪히면 아프고 또 좋고 나쁜 걸 다 빤히 아세요. 아시는 그대로 행하세요. 그대로 행하시면서 그냥 그렇게 편안하게, 일상생활 속에서 내 몸이 하는 거, 먹는 거, 말하는 거, 사는 거 모두 몽땅 그놈한테다 맡겨 놓고 사시면 얼마나 편리해요. 이 세상이 다 없어진다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해도 돼요. 정말이에요. 여북하면 부처님께서도 그러셨나요? “허허바다에 배를 타고 가는 형국인데, 배는 네 모습이고 배 속에 있는 생명들은 네 중생이니라. 그런데 그 배를 이끌고 가는 선장한테다 진짜로 믿고 맡기고 가만히 있으면 선장이 다 알아서 가는 데까지 끌어다 줄 것을 그냥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하면서 찾고 온통 난리를 치니까 그 배는 뒤집힐 수밖엔 없다.” 이거죠.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마음공부는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허공길의 공부입니다. 우리가 저승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승의 이치를 다 알아서 대치를 해 나가겠습니까?

그, 여덟 달 만인가 일곱 달 만에 애를 낳았다는데 다 죽게 됐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애가 또 몇 대 손이랍니다. 몇 대까지 손이 없었대요. 아, 그러니 어떡합니까. 그런데 그 부모가 이 공부를 잘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급하니까 그냥 그렇게 지극하게 오직 그거 하나로만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살아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급하게 자기 앞에 떨어져야만 그렇게 야단법석을 하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급한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 허허바다에 그냥 배 한 쪽 타고 가는 형국이거든요. 지금 살아나가는 게 그렇게 아슬아슬해요. 어느 때 차 사고가 날는지, 어느 때 떨어질는지, 어느 때 또 잘못될는지, 어느 때 식구가 어떻게 될는지 그것도 모르고요. 그냥 허허바다에 그냥 가는 거예요. 그와 같은 거예요.

그러니 내 가슴이 얼마나…, 여러분이 들으면 얄팍한 말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가슴이 아파요. 여러분 개개인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만 불쌍하고 가엾은 게 아니에요. 벌레서부터 내려오면서 그 사는 걸 보면 기가 막히죠, 아주! 기가 막혀요, 그냥. 그래서 아마 화성에는 생명들이 다 없어졌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다 그냥 알아서 다 사라져서요.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 뒤로 돌아가서 이렇게 보면 사람 살던 흔적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그거를 안 거예요. ‘아, 여기서도 살다가, 이 화성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제 살고 살고 부딪히고 부딪히고, 수백 수만 년 가다가 보니까 ‘사람 사는 게 이렇구나!’ 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모두가 그냥 화해 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마음이 보살이 된다면, 왜 저, 은비까비 금비까비 이런 거 텔레비전에서 나오죠? “은 나와라 뚝딱, 금 나와라 뚝딱” 하는 그런 사람, 보살이 그렇게 행을 하거든요. 보살뿐만 아니라 우리도 다 할 수 있죠. 그런데 여러분이 그런 거는 만화 영화에서만이 할 수 있고, 그거는 그저 그려 놓은 거고 텔레비전에서만 나오는 얘기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도 “은 나와라 뚝딱, 금 나와라 뚝딱”할 수 있는 그런 자질을 가진 인간이에요.

나는 내 수중에 아무것도, 내 수중이 아니라 내 몸까지 없어요. 아주 버린 사람이에요.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버릴 것도 없는 걸 버렸다고 했구나.’ 했어요. ‘버릴 것도 없는 걸 버렸다고 했구나.’ 했다고요. 여러분이 함이 없이 살고 공해서 내가 따로 한 게 없구나. 내가 너무 많아서, 고정됨이 없이 그냥 항상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고, 만나고 또 만나고, 하고 또 하고 이러기 때문에 내가 먹었다고도 할 수가 없고, 내가 산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이렇게 했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돈 벌었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망했다고 할 수도 없어요, 전부. 그렇게 없는 걸 알아야 내가 아주 자유스럽고, 어떠한 게, 뭐, 집안 가족이 다 죽는다고 이렇게 와도 그냥 뻔뻔하게 앉아 있을 거예요, 아마.

우리 신도님들 중에도 때로는 간이 어떻다, 뭐가 어떻다 하고 오죠. 그런데 내가 할 수 없는 말이 있어요. 그건 자기가 해야 할 문제예요. 그런데 “병원엘 가야 되겠습니까? 안 가도 됩니까?” 하거든요. 그럼 내가 뭐라고 그럽니까? “당신 마음 내키는 대로 해.” 이럴 수밖에요. “오직, 오직….” 하는 사람은 그냥 일어서더라고요. 그런데 “아이고, 이거 당장 이러니까….” 이렇게 하는 사람은 병원엘 가도 못 살아요.

그러니까 그런 거를 누차 보고 알게 된 사실이 ‘아, 모두가 대신해 줄 수는 없구나.’ 하는 거죠. 다른 건 다 해 줘도 깨치는 거하고, 죽는 거, 아픈 거, 똥 누는 거, 잠자는 거, 먹는 거, 이거 여섯 가지는 아무리 해도 대신 못 해 준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지혜가 풍부한 사람들은 가정에서 누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주 마음 태평하게 버젓하게 그거를 그냥 대치해 나가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방방방방 뛰어요, 그냥. 내가 생각할 때는 ‘내 몸뚱이하고 모두 다 그냥 버리면 될 거를, 저렇게 어렵게 고생을 하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살면 얼마나 살고, 또 죽는 날까지 얼마나 남았다고 죽는 걸 겁내고 그러나.’ 하는 생각도 해 보고요.

여러 가지예요. 아주 여러 가지 말 못하는 문제들이 너무 많아요. 내가 이날까지 여러분한테 말을 했어도 정작 할 말 못 한 것이 너무 많죠. 내가 해서 될 말이 아니거든요. 여러분이 스스로 알면서 점점 이렇게 돼야 이게…,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대로 같이해 주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같이해 주고, 길면 긴 대로 같이해 주고 짧으면 짧은 대로 같이해 줘라. 이것이 바로 모가 나지 않고 둥근 거니라.” 때로 이렇게 자기 몸을 보면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몸은 어디 아픈 걸 더 잘 알 거예요. 기운이 없다거나 입맛이 없다거나 또 어디가 아프다거나 이런 거는 더 잘 알죠. 딴 사람보다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알면 아는 대로 대치를 빨리빨리 해 나가야지, 이거는 대치를 할 생각은 안 하고 ‘이거 어디가 어떻게 돼서 내 몸이 이런가. 병원에 가서 좀 검진을 해 봐야 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시간을 오히려 더 늦추는 거예요. 빨리 해결을 할 것도 말입니다.

제 말이 이해가 안 되십니까? 만약에 제가 어려서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 하면 벌써 죽었지 여직껏 살지 못해요. 저도 사람이니까 때로는 어디가 아프기도 하겠죠. 그럼 ‘이렇게 아파서 돼? 아프게 만들면 너도 죽고 나도 죽어.’ 허허허…. 아이, 이 몸뚱이를 집을 삼고 사는 생명들이 전부 작용을 하고 있는데 저도 죽고 나도 죽지 그럼 누가 안 죽을 수 있나요? 그런데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 해?” 이러거든요. 어때요? 죽는 거를 그렇게 대단스럽게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요, 내일 죽든 오늘 죽든 이따가 죽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이 제일 문제가 되는 게요, 부모를 두고서 자식이 먼저 죽는다거나, 또 부모가 자식들을 많이 두고서 먼저 죽더라도, 죽으면서 그 자식들을 괴롭힌다거나 이런다면 그 부모 된 마음은 상당히 괴로울 거예요. 그래서 빨리 죽는 방법, 그것도 생각 안 할 수가 없죠. 그렇죠? 하하하…. 남을 괴롭게 하면 나는 그 몇십 배, 몇백 배 더 괴로우니까요.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실천을 하는 것이 자비예요. 실천은 자비고 사랑은 말이에요.

그래서 사랑을 안 하더라도 사랑한다고 해야 상대가 좋아하니까 “사랑한다.” 이렇게 좋게 말해 놓고 자꾸 그러다 보면 진짜로 실천이 되죠. 그러면 그게 자비예요. 그래서 그 한 가정이 화합해서 좀 화목하게 살려면 거짓 아닌 거짓도 많이 해야 되거든요. 거짓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더라도 그 가정을, 상대방을 편히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참 당신 고생해. 사랑해.” 이렇게 말 한마디 하는 데서 그 웅크려졌던 모든 마음이 다 스르르르 녹거든요. 그 마음이 녹으면요, 애들한테도 신경질 안 내요. 또 부모 모시는 사람은 부모한테도 신경질 안 내고요. 그런데 웅크려진 걸 더 웅크려지게 말 한마디를 퉁 해 버리면요, 그 양쪽을 다 불안하게 만들게 되죠. 한 가정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지키고, 또 나라 일과 사회생활을 잘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잖아요. 고생을 아무리 했어도 말 한마디만 그렇게 잘해 주면 그 고생한 게 다 스스로 녹아지는데, 돈이 드니 못 해요, 왜 못 해요, 글쎄? 그런데도 그렇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마음인가 보죠?

그러니까 거짓이 거짓이 아니라, 우리는 지혜롭게 방향을 이끌어 나가는 큰사람이 돼야 되겠다 이런 거죠.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하는 게 아니에요. 뭐, 자기가 하고 사는 거예요? 그 업식이, 업보가 거기에 뭉치고 뭉쳐서, 화가 불끈 일어나면 그냥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막말을 해 대는 사람도 있고 그렇죠. 그게 그 사람이 틀린 게 아니에요. 뭐 질문하실 거 있어요?

여러분이 나한테 ‘아이고, 저이는 저런 말만 만날 한다.’ 하고 재미없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인생을 어떡하면 단 한 시간이라도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저녁에 자리에 누우면 참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돼야지, 불편해서 그냥 잠도 못 자고 일어났다 앉았다 이러시면 그게 사람 사는 겁니까, 어디?

질문자1(남) 큰스님, 감사합니다. 제가 오늘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나왔는데요. 저는 본원 법형제회 회원입니다. 이번에 질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돼서 더욱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조계사 사태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제일 먼저 그 답을 해 주셨어요. ‘우리 종단이 매스컴에서 왜 저렇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줘야 되는지, 또 불교계의 제일 큰 종단이기 때문에 원력이 높으신 스님들이 계신데 저런 걸 사전에 막아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질문이었는데 답변을 해 주셨습니다. 커 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거라고요. 그런데 공부가 된 사람은 알겠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 중에는 ‘불교는 저런 것이다. 스님네가 저러니 불교는 믿지 말자.’ 이런 마음이 많이 났을 거라고 염려스러워서 질문을 드리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이제 여기서 답변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상처는 어떻게 아물게 할 수 있을까요?

큰스님 그거는 스스로 자기네들이 생각하기 나름이죠. 그거는 잘 생각하면 정말 자기네가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 수 있겠지만, 그렇게 잘못 생각했다면 이것은 바로 즉각적으로 자기가 생각한 대로 자기한테 미치는 거니까요.

질문자1(남) 그런데요, 요즘에 타 종교에서도 너무 극성스럽게 신자들을 늘려 가고 있습니다. 지금 사회적으로 생기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도 불국토가 돼야 없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조계사 사태로 포교하는 데에 흠집이 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큰스님 불국토라는 것이요, 우리 불교인들만 늘려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불교라는 것은 생명의 근본이 ‘불’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배우고 진화하면서 또 지혜롭게 물리가 터지고 이러는 모든 것을 ‘교’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어떤 국한된 종교가 아니라 진리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가는 진리의 이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기독교 믿는 대로, 또 불교 믿는 사람은 불교 믿는 대로, 그대로 ‘자비’의 뜻을 알게 되면요, 천체 모습을 보고 살게 되니까 그런 걸 보고 비난하고 이러지 않습니다.

어떤 수녀 한 분이 “스님, 그거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러더군요. 그래서 그랬어요. “만약에 고생을 하면서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부딪힘이 없고 어려움이 없다면 한 해의 추수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농사를 지어서 추수를 했기 때문에 남도 주고 나도 먹는다. 그렇듯이 이것은 마음공부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부딪히면서, 발길로 차고 문도 떨어져 나가고 온통 이렇게 하는 반면에 거기에서 납득이 된다.”라고요. 이런 걸 한번 겪어 보면서 ‘아, 이것이 아니로구나!’ 할 수도 있고 ‘아,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로구나!’해서 그 욕심도 없어지고…. 욕심 많은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싹 그냥 없어지죠.

그래서 사람도 수없이 바뀌죠. 이렇게 우리가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듯이 사람도 나쁜 짓만 하는 사람이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니고 좋은 일만 하는 사람도 고정되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수없이 바뀌는 거죠. 자기가 당해 봐야 그 습성을 놓으니까요. 그래서 그분들도 그렇게 싸우다 보면 ‘아, 이런 욕심을 부려서 이렇게 망신당했으니 예이, 이거는 할 짓이 아니로구나.’ 하는 걸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까 싸우는 바람에 단번에 그 습이 딱 떨어져 나갔으니 얼마나 그게 효과적입니까? 하하하….

질문자1(남) 예, 잘 알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늘 “어묵동정 행주좌와가 모두 선인데 무슨 특별한 선을 하느냐.” 이렇게 일러 주셨어요. 그런데 요즘이 안거 철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많은 스님들께서 안거 행을 하시는 그런 뜻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큰스님 안거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거지, 이 마음공부하는 데는, 선에는 안거라는 것이 특별히 없습니다. 왜냐하면 해제를 했다 하더라도 선이고 안거를 했다 하더라도 선이에요. 해제했을 때는 지구가 안 돌아가고, 또 안거했을 때는 지구가 돌아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사는 것도 그래요. 안거했을 때는 우리가 살고 있고 해제했을 때는 우리가 죽나요? 그게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이 마음공부 하는 데는 누워서 잘 때 와선, 서서 다닐 때 입선, 또 일을 할 때 행선, 앉아 있을 때 좌선, 이것이 전부 네 가지가 송두리째 그냥 요만큼도 끊어지지 않고 참선이 된다 이거죠.

질문자1(남) 예, 잘 알겠습니다. 스님 말씀 들으니까 우리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선의 기회를 갖지 않아도 된다 그런 말씀이시죠?

큰스님 네. ‘선이라는 이름 없이 참선을 하고 간다, 끊어지지 않게.’ 이런 거죠.

질문자1(남) 네,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는데요, 공부하다 보니까 삼독(三毒)을 좀 없애야 되겠다 싶어서 아침마다 ‘오늘은 삼독에서 벗어나는 하루를 지내야지.’ 하고서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튀어나옵니다, 진(嗔)이라는 놈이. 그거를 막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큰스님 하하하…. 그래서 내가 항상 이러지 않습니까. 잘못 나오든지 잘 나오든지 간에 잘 나오는 거는 ‘주인공, 감사해.’ 하고, 또 잘못 나오는 거는 ‘너만이 잘 나오게 대치할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 놓으란 얘기죠.

질문자2(남) 스님, 항상 감사드립니다. 제가 몇 개월 전에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읽은 내용인데,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로 계신 어느 스님이 쓴 글 중에 윤회에 관한 글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그 스님의 말씀이 “지구상의 생물에는 유정물, 즉 감정이 있는 생물과 무정물, 즉 감정이 없는 생물이 있다. 동물은 감정이 있는 유정물이고 식물은 감정이 없는 무정물이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시고 “윤회를 하는 것은, 식물은 감정이 없기 때문에 윤회를 못하고 동물만 윤회를 한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 법문을 듣고 제 나름대로 이해하기로는, 식물도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식물 역시 지구상의 생물이며 그 윤회 선상을 떠나갈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감정이 있는 생물이 윤회를 한다는 말은 제 나름대로 상당히 공감을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데, 큰스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어떤 윤회 선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좀 전에도 말씀하셨지만 “그런 모든 떠오르는 생각, 감정들을 지켜보면서 다시 주인공 자리, 그 용광로에 되돌려 놓을 때 이미 한 바가 없이 함이 되는 것이며, 그래서 그 감정은 남아 있지를 못한다. 만약 그런 주인공 자리를 모르고 우리가 내는 감정, 그런 데 끄달리게 되면 현생에서 살아가면서 냈던 마음이 어떤 에너지로서 허공에 남아 있게 되고, 그다음 생에서도 그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고 우리의 업장이 되어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저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감정이 있는 동물이 윤회를 한다는 그 말은 상당히 공감을 하겠는데 제가 의문이 나는 거는 정말 식물이 감정이 없는가, 거기에 대해서 한번 스님께 여쭙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큰스님 왜 감정이 없겠어요? 실질적으로 경험한 일인데요, 산에 다니다 보니까요, 손가락도 잘라질 정도로 말아 들이는 식물이 있어요. 정말이에요. 이렇게 스치고 가는데 스치는 순간에, 이파리가 이만큼 넓었는데 그게 그냥 따르르르 말린단 말이에요. 그래서 ‘참 요상하다.’ 이러고선 그냥 막대기 하나를 집어 가지고 그걸 건드렸어요. 그랬는데 그 잎이 그냥 쫙 말리면서 그거를 물고 영 놓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한두 시간 있으니까 그게 놓아지는데 보니까 그 나무때기가 은근히 부스러졌어요. 그런데 감정이 없어요? 그리고 또 약초요. 약초들도 풀이에요.

그래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주인공 자리에 놓으라고 그러는 겁니다. 만약에 주인공 자리에 놓아서 내 마음이 큰 바다로 이루어진다면 수증기로 해서 올라가서 이 정수봉에서 정화를 해서 다시 물을 모든 만민에게 내리는 겁니다. 우리 지금 현실에 비가 오면 내리듯이. 그러면 조그만 풀도 다 먹어요. 요만한 풀도요. 그렇죠? 작으면 작은 대로 먹고 크면 큰 대로 먹죠? 그러니까 생명이 있으면 벌써 생각이 있어요.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는데 말이에요, 흙이 모자라면 그것이 그냥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려서 흙에 닿게끔 해요. 그래서 그것이 살아나요. 그런데 생각이 없어요? 허허허…. 그건 언어도단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가다가 극매고 아파서 죽게 되니까 풀을 손으로 뜯으면서 ‘너, 나 좀 살려 줘. 나 죽겠어.’ 하고 애원을 했대요. 이렇게 죽어 넘어졌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그 옆의 풀들이 다 그냥 얼굴을 내밀고선 자기 액을 빼 주더라는 거죠. 자기 이파리 하나씩 빼서 입에다 넣어 주더라는 거예요. 그래 그 꿈을 깨고서는 그냥 살아났는데 그게 잊혀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를 한번 겪어 보고서 ‘이 세상에 모든 생명 있는 풀들은 다 생각이 있고 다 사랑이 있고 의리와 도의가 있구나.’ 하는 걸 알았고, 또 악하게 쓰면 악한 업이 그대로, 자기가 요다음 생에 나올 때 모습을 달리 해 가지고 나온다는 걸 알았대요. 이게 무서운 일입니다.

질문자2(남) 스님,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8년 12월 6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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