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일 선수(상)

 ‘박치기 왕’ 하면 누구나 김일 前 프로레슬러를 떠올릴 것이다. 김 선수는 1960~70년대 프로레슬링계를 제패한 국민 영웅이다. 2006년 10월 26일, 나는 김 선수 곁에서 그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늘 내 가슴 속에 스포츠 영웅으로 살아 있다. 나와 김일 선수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김일 선수도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일간지를 비롯한 어떤 언론사도 김 선수의 행방을 찾지 않던 때였다. 나 역시 어릴 적 흑백 텔레비전에 나온 김 선수를 응원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유명인과 인연이 닿은 것은 우연이었다.

국민영웅 ‘박치기 왕’ 뒤안길로
말년 일본서 가난한 투병생활
김 선수 귀국 돕기 위해 일본행
“고향에 진돗개동상 세워주세요”
소박한 마지막 소원이 새 삶으로


1993년 어느 날,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는 재미교포 여성 불자를 만났다. 그 여성은 나에게 후쿠오카에서 박치기 왕을 만났다고 전했다. 김일 선수가 후쿠오카 변두리에 있는 작고 허름한 병원에서 ‘다 죽어간다’는 이야기였다. 비행기 표 마련할 돈이 없어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김 선수의 딱한 사연도 함께 전했다. 박치기 왕 김일 선수가 돈이 없다니, 믿기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김 선수는 선수시절 번 돈으로 사업을 하다 크게 실패했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도망치듯 떠났지만 형편은 더욱 안 좋아졌고 말년에 들어서는 김 선수 홀로 가난한 투병생활을 하는 듯 했다. 

소식을 접한 나는 일본에 가기로 결심했다. 어렵사리 김일 선수의 편도 비행기 삯을 구했다. 나는 김 선수가 있는 후쿠오카의 한 병원에 도착했다. 내가 마주한 김일 선수의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김 선수가 지내고 있던 병원은 생활보호대상자를 위한 복지병원으로, 시설도 분위기도 열악했다. 10명이 함께 쓰는 병실이었지만 그는 한 눈에 띄었다. 김 선수는 185cm 거구의 몸으로 침대에 구겨진 듯 누워있었다. 김 선수는 당시 64세였다.

TV에서 봤던 얼굴보다 노쇠한 얼굴이었다. 김 선수는 좁은 병상에서 일어나 공손히 합장했다. 그가 장삼을 수한 나를 보자마자 한 행동이었다. 내가 스님이라는 이유만으로 몹시 반가워하는 느낌이 들었다. 김 선수는 신심 깊은 불자 어머니 손에 자라 불교를 좋아했다.

비행기표 값만 주고 떠나기는 아쉬웠다. 나는 휠체어에 탄 김 선수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게 귀국할 의향은 없는지 물었다. 김 선수는 한국에 돌아가면 거처도 없고 부채도 많아서 도망자 신세라고 털어놨다. 

프로레슬링계를 누비던 전성기 때 김 선수의 여자 문제는 심각했다. 본처 그리고 자식들과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김 선수의 자녀들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부인과는 사별했다. 고국에 집도, 의지할 가족들도 없는 그였다.

말년에는 사업 실패와 투병 생활이 그의 전부였다. 현역 시절 몸을 무리하게 쓴 후유증이 김 선수를 고통 속으로 몰았다. 박치기 후유증과 노환, 고혈압, 경추변형, 만성두통, 당뇨병 등에 시달리던 김 선수는 일본의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병원을 전전했다. 

설상가상 김 선수를 후원하던 이들의 사정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연락이 끊어지고 있다고 했다. 큰 덩치에 마른 몸, 휠체어에 얹힌 김일 선수. 내 눈에 김 선수는 작고 낡은 병실에서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애처로웠다.

김 선수는 “예전에는 날마다 고기를 30인분씩 먹었다”면서 “환자식은 먹어도 늘 배고프다”고 했다. 나는 측은지심에 김 선수를 내 숙소로 데려갔다. 호텔 방에서 그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마음껏 먹게 했다.

김 선수의 삶은 ‘인생무상’ 그 자체였다. 나는 ‘한 사람의 노년이 이토록 비참해질 수 있는 것인가’란 생각에 잠겼다. 온 국민의 영웅이었던 한 사람이 이 지경으로 비참하게 살 줄 누가 알았을까.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픈 일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에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이 이루고 싶은 단 한 가지 일이 뭡니까. 제가 들어드릴게요.”

아차, 싶었다. 사실 나는 김 선수를 위해 빌려온 돈도 갚기 버거운 상황이었다. 내 형편 생각도 하지 않고 분수에 맞지 않는 약속을 내뱉고 만 것이다. 혹시라도 그가 한국에 집 한 채를 사달라고 한다면…. 나로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김 선수가 입을 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내 속은 조마조마했다.

“고향에 진돗개 동상을 세우고 죽는 게 제 소원입니다.”

황당한 대답이었다. 나는 김 선수에게 진돗개 동상이 진짜 소원이 맞는지 재차 물었다. 김 선수는 놀란 나에게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 때는 미처 이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천장만 쳐다보고 있자니 자꾸만 진돗개 생각이 납니다.”

김 선수의 고향은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의 작은 섬이다. 초등학교 3학년, 김 선수는 진돗개 한 마리를 애지중지 길렀다. 진돗개는 유독 김 선수를 잘 따랐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 순사가 섬마을에 개를 잡으러 왔다. 당시 일제는 군복에 개털을 넣기 위해 조선 전국에 개 공출 명령을 내렸다. 김 선수의 진돗개 역시 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어린 김 선수는 반항조차 못하고 진돗개를 일본군에게 뺏겼다. 

그런데 이틀 뒤, 잡혀갔던 진돗개가 쇠사슬을 끊고 탈출했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집까지 찾아온 영특한 진돗개를 얼싸안고 김 선수는 기뻐서 울었다. 하지만 개마다 번호를 매겨 곧 일본 순사가 진돗개를 잡으러 왔다. 다시 잡혀가는 진돗개가 자꾸만 뒤를 보며 우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것이었다. 

진돗개 동상 수백 개를 세울 수 있었던 전성기 시절에는 그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55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돗개의 마지막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며, 김 선수는 고향에 동상을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김일 선수의 마지막 소원이 진돗개를 기리는 동상이라니. 말 못할 감정이 확 올라왔다. 나는 어떻게든 그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김 선수와 약속했다. 그리고 그 일이 김 선수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계속>
 

김일 선수의 고향인 전남 고흥에 세워진 진돗개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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