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욕의 씨앗으로 ‘마음살림’ 하자

주제 : 불자답게 사는 정진의 자세

지나간 일들은 묻고, 새 마음 새 뜻으로 한 해를 무장하자는 가르침이 있다. 단양 방곡사 회주 묘허 스님은 1월 3일 방영된 불교TV무상사 일요초청법회서 ‘불자답게 사는 정진의 자세’란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생사는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며 “중생은 영혼이 걸치는 의복인 육체가 참 나가 아님을 알고, 새해부터는 불자로서 ‘나’를 위한 수행에 힘쓰자”고 강조했다.

묘허 스님은… 1957년 한산당 화엄 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1963년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한 뒤, 1965년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현재 대전 신흥사·김해 원명사·단양 방곡사 회주를 맡고 있다.

새해 불자가 할 일, 오직 수행
중생의 한계인 분별·욕망 떨쳐
삶 집착 거두고 인내하는 노력
한 사람에서 전체 변화 비롯돼



무술년은 그만두고 내년 기해년 새해부터
신심 있는 우리 불자 열심히 나아가세
도끼 들고 산에 들면 덤불쳐서 개량하고
괭이 들고 돌밭 파면 황무지가 옥토 된다
우리 밭에 보리싹은 눈 속에도 푸르러있고
우리새암 물줄기는 소리치고 솟아난다
부지런히 나아가면 새천지 아니볼까
정신있는 우리불자 사람중에 사람되세 하시더라
                                  - 백학명 스님 신년가 中에서

 

무술년 한 해도 지나갔습니다. 구한말 내장산 내장사의 조실로 계신 백학명 큰스님께서 새해를 맞이하며 지은 신년가의 한 대목입니다. 이 구절들을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육체를 ‘참 나’로 여긴 삶
처음 두 구절을 봅시다. 무술년은 가게 두고 기해년부터는 신심 있는 불자로 일을 좀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하면, ‘내가 나의 일을 하자’는 이야기예요. 대부분 우리는 내 일은 없고 남의 일을 하다가 업만 짓고 한 세상 살다옵니다. 

불교적으로 보면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나’는 참 나가 아니에요. 나인 줄 믿는 육신조차도 참 나는 아닙니다. 부모님께 얻어서 내가 쓰고 생활하는 몸뚱아리인 것이지, 내가 아닙니다. 전부 이 몸뚱아리가 좋다고 하는 대로, 이 몸이 시키는 대로, 해달라는 대로 다 하면 업 짓는 일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금년부터는 불자로서 불자답게 자신의 일을 좀 하는 불자가 되자고 다짐합시다. 자신의 일은 나를 위한 공부, 수행 이외에는 없습니다.
 

生死, 옷 갈아입기에 불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의 일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세 번째 구절부터 봅시다. ‘도끼 들고 산에 들면 덤불쳐서 개량하고’에서 도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위해서 참 나의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진리, 법이라는 겁니다. 산에 든다는 것은 우리가 공부하고 수행할 때 가장 큰 적이 되는 사상(四相)을 뜻해요. 바로 이 사상 산을 허물어뜨려야 합니다. 여기서 덤불은 번뇌·망상을 비유합니다. 따라서 온갖 분별, 욕망을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로 모두 없애버리자는 겁니다. 욕망의 덤불을 쳐서 없애자고 말입니다.

사상에 대해 좀 더 살펴봅시다. 사상은 아상(我想),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子相)을 의미해요. 아상은 ‘나’라는 생각입니다. “나 잘났다” “나 아니면 안 된다” “나는 많이 배웠다” “나는 귀하다” 등 교만한 생각과 자만심입니다. 인상은 상대에 대한 생각이에요. 남을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무시하고 깔보는, 상대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드는 생각은 모두 인상입니다. 즉, 자신이 인간이란 우월감에 빠져 있는 것을 뜻합니다. 중생은 아상, 인상에 집착해서 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은 중생상 즉, 부처님처럼 해탈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육체와 정신적인 영체, 영육이 동시에 공존하면서 심호흡을 하고, 감각기관을 갖추고 있는, 깨닫지 못한 모든 생명체를 통칭해 중생이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의 생명체는 평등하다고 가르칩니다. 근데 어찌 중생에게 차별이 많은가하고 물을 수 있어요. 각자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업에 따라서 덮고 있는 껍데기, 육체가 다를 뿐이지 생명의 본질은 평등합니다. 중생상은 이러한 생명의 존재를 차별하는 마음, 분별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수자상은 오래 살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배우고 알고 나면, 본래 생사가 없어요. 그런데 분명 생사한 줄 알고 생사에 얽매여 1초 1각이라도 더 살고자 합니다. 육체에 대한 집착이 모두 수자상입니다. 
나고 죽음은 본래 없고, 육체의 껍데기만 바뀌는 것이 생과 사라 했습니다. 생사는 입은 옷이 떨어지면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같아요. 육체의 의복은 내가 입고 있는 것이지만, 내 영혼의 의복은 바로 육체입니다. 이런 진리를 믿으면 나고 죽음에 기뻐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어요. 무생무사(無生無死)라, 나지 않으면 죽지도 않아요. 그래서 생과 사는 둘이 아니에요. 본래 생과 사가 없는데, 우리는 육체의 의복이 바뀌는 것을 생과 사로 알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살림으로 불성 꺼내자
여러분은 헌 옷이 좋나요, 새 옷이 좋은가요? 지금 법당에 앉아있는 불자님들, 입고 있는 옷들이 다 다르잖아요. 다른 사람이 입은 옷을 보고 내가 입은 것보다 좋아보여서 기죽는 경우도 있죠. 돈 많이 준 옷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사 입지 못하는 이도 있어요. 돈이 없어서요. 경제 살림을 잘 살아야 오늘처럼 추운 날 보온이 잘 되는 좋은 옷을 사 입을 수가 있어요. 

내 영혼이 걸치고 있는 의복, 육체는 어떨까요? 육체가 입는 옷은 경제 살림을 잘 살아야 되지만, 영혼이 걸치는 육체는 마음 살림을 잘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도끼 들고 산에 들어 덤불치고 개량하자는 대목은 번뇌 망상을 쳐부수고 심전(心田)을 잘 개량해야한다는 이야기예요. 산은 높은 산도, 낮은 산도, 깊은 골짜기도, 얕은 골짜기도 있잖아요. 밭도 평지밭이라야 농사가 잘 돼요. 사상 산을 허물어서 넓은 평야로 만들고 심전을 개량하는데, 뭐가 있으면 더 잘 되겠어요? 부처님의 말씀, 진리의 포크레인을 갖고 사상 산에 들어가서 넓은 평지를 만들어서 심전 개량을 잘 하자는 겁니다. 

개발만 하면 뭐합니까, 농사를 잘 지어야합니다. 우리는 만들어놓은 심전에 경작도 잘 해야 합니다. 올해부터는 마음 밭에 참을 인(忍)의 씨를 뿌립시다. 불자라면 인욕의 씨앗을 마음 밭에 심어서 어떤 일에도 참는 노력을 합시다. 

참는 것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노력을 불교에서는 정진(精進)이라고 합니다. 노력하다보면 인욕의 씨앗에 정진의 싹이 트게 돼요. 자꾸 참다 보면 무슨 소리를 들어도 성냄이 덜 나게 돼 있어요. 덜 나다가 나중에는 아예 나지 않게 됩니다. 

황토물이 굽이치고 내려갈 때는 아무리 밝은 달도 그 위에 그림자가 비칠 수 없어요. 하지만 영원히 달그림자가 비춰질 수 없는 것은 아니에요. 모래 찌꺼기가 다 가라앉은 뒤 굽이치던 물이 거울물처럼 고요해지면 사물의 그림자가 본래 모습처럼 환하게 비춰집니다. 이처럼 성내고 헐떡거림이 멈춰진 상태를 바로 선정(禪定)이라 합니다. 선정은 반야(般若)의 지혜를 얻고 성불하기 위해 마음을 닦는 수행이지요. 선정의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서 지혜의 꽃이 핍니다. 지혜의 꽃이 피고 깨달음의 열매, 보리를 수확할 수 있는 겁니다.

다음 구절인 ‘괭이 들고 돌밭 파면 황무지가 옥토 된다’를 보겠습니다. 괭이 역시 부처님의 진리 가르침입니다. 돌밭은 번뇌, 망상이겠죠.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으로 번뇌 망상을 파내면 쓸 데 없는 황무지가 옥토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 밭에 보리싹은 눈 속에도 푸르러있고’에서 우리 밭은 각자의 마음 밭을, 보리싹은 깨달음을, 눈 속은 번뇌와 망상 등 온갖 집착을 비유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온갖 집착을 다 가져도 그 속에 있는 본래 불성의 모습, 자성은 명백히 존재합니다. 여러분 속에 부처님의 깨달음과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거예요. 번뇌 망상을 내 생각으로 알고, 번뇌의 눈이 자성을 차단하고 덮고 있어서 보이지 못하는 것뿐이에요. 그 속에서도 푸르고 성성한 깨달음이 있어요.

‘우리샘 물줄기는 소리치고 솟아난다’ 구절에서 물줄기는 지혜의 원천을 뜻합니다. 결국 그 물줄기가 강으로, 바다로 갈 겁니다. ‘부지런히 나아가면 새천지 아니볼까’에서 새천지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보통 깨달음을 바다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각해(覺海)라고 해요. 바다는 물을 받아들일 때 가리지 않습니다. 썩은 물도, 황토 물도, 깨끗한 물도 들어오지만 바다에 들어가면 다 한 맛이 되죠. 그 어떤 물이라도 짠 바닷물이 돼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이든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음은 하나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과거는 한강물에 모두 모아 던져내어 버리고 맑은 정신만 챙겨서 삽시다. 여러분은 한 사람의 불자이자, 대한불교조계종의 불자이자, 더 나아가면 대한 불교의 불자이자, 세계 불교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나 한 살림이 지구 전체의 살림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 한 사람을 작은 존재로 여기지 마시고 나 하나가 맑으면 내 가정, 주위 이웃, 지역사회, 국가, 세계가 참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삽시다. 스스로 나만의 한 사람이 아닌 우주 전체의 한 사람이란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부로 여러분은 나 하나의 소중함을 아는 불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란 이름으로 불자답게, 나 자신에게 거짓 없이 떳떳하고 당당한 참 불자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자료제공=BTN불교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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