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서 온 선지식, 禪을 열다

소림사 소실산 유봉 중턱에 있는 달마동 입구. 달마동은 길이 7m, 넓이 3m의 천연동굴로 달마 스님이 9년간 면벽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 연재의 원고는 과거 역사상 불교의 선지식들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과거의 위대한 선지식이 있었기에 현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불교의 면모가 점점 되살아나고 있다. 먼저 중국불교의 현 주소를 엿보기로 하자.

10여 년 전, 중국은 지린성(吉林省)의 리훙즈가 창시한 파룬궁(法輪功) 신자들에게 엄청난 종교탄압이 있었다. 그렇다면 현 중국에서 종교를 부정하고, 신앙을 허락하지 않는가? 한마디로 대답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중국은 어떤 특정 종교를 강요하지 않으며, 어떤 종교를 선택하든 간에 자유이다. 현재 중국에서 승인하는 종교는 불교·도교·이슬람교·기독교·가톨릭이다.
다만, 허가된 곳이 아닌 곳에서 종교 활동을 해서는 안되며, 외국 승려와 선교사 활동을 금한다.

몇 년 전 중국의 종교 신자 현황을 보면, 불교와 도교신자는 정확히 알 수가 없고, 이슬람교도 1800여만 명, 라마교도 700여만 명, 가톨릭교도 530만 명, 기독교도 2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불교와 도교 신자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추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유교는 종교로 분류하지 않으며, 중국에서 승인한 종교 가운데 도교 이외에는 모두 외래종교이다. 도교는 중국의 자생종교요, 중국인들의 민속신앙 속에 자리 잡은 종교이다. 하지만 도교는 중국인들에게 불교보다 낮은 평가를 받으며, 한 지역에서 도교 사찰은 불교 사찰에 비해 매우 열세하다. 중국의 역사학자이자 세계적인 문화평론가인 위치우위(余秋雨, 1946~)는 불교에 대해 이런 평가를 하였다.

“중화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마치 모세혈관이 피부 끝까지 뻗어 있는 것처럼 불교의 자취가 곳곳에 자리하여 그 어떤 문화보다 훨씬 더 크게 활약하고, 훨씬 더 유효했다.”
-〈중화를 찾아서〉 p.330中

중국에 불교가 유입되기 이전 유학과 도교가 먼저 존재했다. 불교교리로 인해 중국의 사상계는 크고 넓은 시야로 발전되었다. 불교는 송대의 성리학이나 명대의 양명학에 영향을 끼쳤다. 한편 불교는 도교의 의례와 교리를 발전시키는데도 큰 공헌을 했으며, 도교 경전은 불교의 경전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들었다. 그만큼 불교는 중국에 유입된 이래 중국인들의 정신 사유를 바꿔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근자에 신문지상을 통해 중국불교에 대해 여러 이설이 나오지만, 필자가 직접 보고 느낀 중국의 불교는 날씨로 치면 ‘맑음’이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 이면에 불합리한 점이 많지만, 사찰불사·중국 승려들의 외국유학·승려교육 체계·불학·중국인들의 불심 등은 사회주의 국가 이래 눈부시게 발전되고 있다.    

중국불교사서 선종의 위치  
중국에 불교가 전파된 경로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역사적인 전거에 의하면 후한의 효명제(58~75 재위) 시대라고 본다. 이후 중앙아시아, 인도 등지에서 건너온 승려들에 의해 경전이 한역되었다.

전래된 불교 경전은 도교적인 바탕 위에 한역(漢譯)이 이루어져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남북조 시대 때, 승려 도안(道安, 312~385)과 혜원(慧遠, 334∼416)에 의해 중국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이 무렵 구마라집(344~413)이 중국에 온 이래 소·대승 경전을 한역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역경 이래 중국 문화가 반영된 격의불교의 한계성이 극복되었다. 구마라집 이후 현장(602~664) 법사도 인도에서 17년간을 지낸 뒤 돌아와 한역하였다. 구마라집과 현장 이외 인도와 서역에서 온 수많은 역경가들과 중국 승려에 의해 경전이 번역되었다. 이 한역된 경전을 중심으로 종파가 성립되었는데, 대표적으로 8종이다. 즉 천태종·법상종·밀교·남산율종·삼론종·정토종·화엄종·선종이다. 

이렇게 중국에서 발전된 8종은 중국화된 불교로 탈바꿈된 사상들이다. 이 가운데 정토종과 선종이 8종 가운데 가장 늦게 성립되었지만, 이론과 실천적인 측면을 겸비하여 근자에까지 동아시아 전반에 최대의 종파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한국 불교 전반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선종(禪宗) 측면에서는 어떠한가? 선종은 현 대한불교조계종의 연원이 되기도 한다. 선사상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청담과 현학 사상운동으로 나타났고, 륵나마제·보지공(418∼514)·부대사(497~569) 등 선자(禪者)들이 있었다. 즉 선종은 달마가 520년 중국에 들어온 이래 시작되었다고 보지만, 선사상은 달마 이전부터 존재해왔다고 볼 수 있다.

소림사 도량 내부에 모셔진 달마상.

선종 초조 달마, 실제 인물인가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이 필자를 찾아왔다. 그의 목적은 달마도를 구하고 싶다는 것이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수맥차단용으로 달마도를 집에 걸어놓고 싶다는 취지이다.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오롯한 선수행자인 달마가 중생들의 기복용으로 그림이 활용된다는 것 자체가 재밌는 현상이다. 하기야 나말여초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문의 범일(梵日, 810~889) 국사가 영동 지방 강릉 단오제의 주신(主神)으로 모셔져 있다. 달마선사와 범일국사가 중생들의 귀의처로 모셔진다는 것,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달마는 어떤 존재인가? 달마만큼 중국 선종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도 드물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달마는 선의 시작점이며, 달마의 사상은 중국 선사상의 근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어록이나 공안에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가 많이 등장한다. 여기서 조사는 달마를 가리키는데,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중국에 온 이유는 무엇이냐’는 뜻이다. 단순한 어구적인 해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본질은 무엇인가’, 수행코자 하는 ‘그 마음의 본질이란 무엇이냐’가 담겨 있다. 바로 이런 전제 아래서 수많은 수행자들이 선문답을 하고 있다. 그만큼 달마라는 인물은 어떤 존재이냐를 떠나서 선의 근원이자, 본질의 대명사나 다름없다.

달마에 관한 전기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도선(道宣, 596~667)의 〈속고승전(645년)〉이다. 〈속고승전〉보다 조금 늦은 시대의 〈전등록〉조차도 달마는 선종 시조(始祖)로서의 사명을 짊어진 이상형의 모습일 뿐이다.

예를 들어 달마가 처음 양무제와 조우했을 때이다. 양무제가 달마에게 자신은 ‘스님들을 돕고 불사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는데, 자신에게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라고 물었을 때, 달마는 양무제에게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답했다.

또한 달마가 숭산 소림사로 들어가 9년간 면벽하고 있을 때, 혜가가 찾아와 법을 구하였다. 눈이 오는 날, 혜가는 팔을 잘라서 달마에게 구도력을 보여주었다. 한편 달마는 당시 선사였던 보리유지와 광통율사의 질투를 사서 독살되었는데 관속에 한 짝 신발만 남겨둔 채 인도로 돌아갔다. 이외에 달마와 관련해 재미난 일화가 많다. 그런데 모두 허구이다. 달마에 관한 일화 등이 후대 조사상(祖師像)에 대한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달마가 역사적 실제 인물이 아닌 가공인물인가? 한 마디로 답하면 달마는 실제 인물이다. 학계에서는 최초로 달마가 실제 인물이라는 사실을 양현지(楊衒之)의 〈낙양가람기〉를 증거로 한다. 즉, 권1 ‘영녕사조(永寧寺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달마는 멀리 변방 지역에서 태어나 우리나라를 유람하다가 북위의 수도 낙양의 영녕사 탑의 금반에 해가 비쳐 그 광채가 구름 위에까지 퍼지며 보탑(寶鐸)이 바람에 흔들리어 울리니 그 소리의 여운이 中天에까지 미치는 모습을 보고, 달마가 ‘나는 150살이 되도록 여러 나라를 두루 다녔으나 이 절은 매우 아름답다’고 말하며 입으로 ‘나무(南無)’라고 염불하면서 연일 합장하였다.”

〈전등록〉에서도 “달마는 후위(後魏) 여덟 번째 임금인 효명제 19년에 열반에 들었는데, 이때 나이가 150세요, 장사는 하남성(河南省) 웅이산(熊耳山)에서 지냈으며 양무제 아들 소명태자가 제문을 지었다”고 하면서 달마의 탑을 정림사(定林寺)에 모셨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10여 년 전에 삼문협 웅이산(三門峽 陜縣 西李村 溝 熊耳山)에서 달마의 석비와 묘탑이 발견되었다. 석비에는 “달마는 대동(大同) 2년(536년) 12월 5일에 낙주(洛州)의 우문(禹門), 현재의 용문석굴에서 입멸했다”라고 적혀 있어 문헌과 조금 상이한 점이 있다.  

달마의 행적을 살펴보니
〈속고승전〉에 기록된 달마의 모습은 이러하다. “달마는 남천축의 바라문 종족으로 신령스러운 슬기가 밝고 트이어 듣는 것은 모두 환하게 깨달았다. 대승에 뜻을 두어 마음이 허적(虛寂)함에 명합(冥合)하였으며 미묘함을 통달하여 많은 수행자들이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변방의 사람들을 가엾이 여겨 법을 중국에 전하고자 송(宋)의 남쪽 국경인 남월(南越)에 이르렀고, 후에 북지(北地)로 옮겨가 위(魏)에 이르렀다.”

달마가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 선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선을 신선방술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인도선의 중국적 변용은 천태종의 천태 지의(538~597)이지만, 선을 신이(神異)한 이미지로 알고 있는 중국인의 사유를 완전히 승화시킨 이는 보리달마에 의한 중국 선종의 성립이다.(‘선종’이라는 종명을 쓴 것은 황벽 희운의 〈전심법요〉에서 처음 사용.)  
〈역대법보기〉에 의하면, 달마가 제자들에게 법을 인가하는 부분에 대해 피(皮)·육(肉)·골(骨)·수(髓)의 부법(付法)이 전한다. 어느 날 달마가 제자들을 모이라고 한 뒤에 ‘선을 통해 얻은 바를 말해 보라’고 하였다. 제일 먼저 도부(道副)가 말했다.

“문자에 착(着)하지 않고 문자를 여의지도 않는 것으로 도를 삼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총지 비구니에게는 ‘그대는 살을 얻었다’라고 했으며, 도육에게는 ‘뼈를 얻었다’고 하였다. 마지막 혜가에게는 ‘골수를 얻었다’라고 한 뒤, 그에게 법의 신표로 가사를 전했다. 이리하여 달마의 법은 2조 혜가에게 전해졌다.

정운 스님은
명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84년 수계했고, 운문사 승가대학을 졸업했다. 동국대서 석·박사를 받았고, 2011년부터 시작된 종단 교육아사리로 위촉돼 활동해왔다. 현재는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소임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구법〉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경전의 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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