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라는 ‘프리즘’으로 한국불교 보다

미얀마 옛 수도인 양곤에 있는 쉐다곤 파고다. 미얀마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 불탑이다. 둘레는 426m, 높이는 100m가 될 정도로 거대하다.

필자는 지난 2013년 〈현대불교〉에 ‘조준호의 미얀마 불교 이야기’를 16회에 걸쳐 연재한 적이 있다. 그 때 서론만 쓰고 말았다. 본론을 위한 도입부 이야기로 마친 것이다. 끝내 본론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 속살을 보여주는 데 끝내 망설인 것이다. 아쉬운 감이 있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어 시작해 보려한다.

필자가 미얀마를 처음 찾은 것은 지난 2011년 겨울 즈음이다. 총 82일 동안 미얀마 불교를 답사했다. 마하시 선원, 빠옥 총림 그리고 쉐오민 선원 등 주요 수행처에 머물렀다. 선원의 하루 일과표에 따라 좌선과 경행 그리고 수행 점검의 인터뷰 등을 행했다. 그리고 그 때의 일을 기록하였다.

앞으로의 연재는 6년을 묵혀 둔 기록이다. 물론 중간 중간 답사노트를 펴고 다시 읽어 보기도 했다. 현장 체험 이후이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의미가 되살아나는 것도 있었다. 당시의 수행처 일과와 관련하여 소소한 순간순간의 상황과 일상이 훨씬 더 객관적으로 대상화되었다. 계속되는 또 다른 재평가의 공부이다.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점들이 뒤늦게 제대로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시점과 장소를 달리하면 그 때의 일도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훨씬 깊이 의미심장하게 재음미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현지답사는 살아 계속된다.

2011년 82일간 미얀마 체류
마하시·빠옥 등 수행처 답사
살아있는 수행의 힘 느껴져
한국 떠나면 한국이 보이듯
미얀마 통해 한국불교 비교

수행처의 일상은 매일 반복된다. 나날이 기억기능은 명료하게 활성화된다. 위빠사나는 현재 이전의 과거의 기억을 온전하게 보는 것이다. 아니 과거의 기억이 드러나는 현재를 보는 것이다. 고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보는 길이지 사색의 길도 탐색의 길도 아니다. 모든 일상이 생생하게 깨어 돌아간다. 감각기관 또한 매우 섬세해져 있으며 사유의 길이 완전히 멈춘 것도 아니다.

사유의 결과를 틈틈이 점검 차원에서 기록으로 남긴다. 기록은 일과표에 따른 공양의 전후와 중간 휴식 그리고 잠들기 전과 깨어난 후 시간을 활용한다.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 주어진다. 볼펜은 춤추듯 자동기술 한다. 어느 때는 손이 머리를 못 따라간다. 순간순간 손가락 끝에서 쏟아져 나온다.

왜 이러한 수행처 기록마저 남기려 하는가? 기록은 기억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이 자체가 공부이기 때문이다. 기록을 통해 나의 공부는 점검된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얼마나 변형되고 왜곡되는지를 확인한다. 나는 기록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점검한다.

이러한 점에서 앞으로 이야기는 과거 기억에 의존하여 기억의 편린을 재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는 그 때의 나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제되지 않은 거친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 때의 기록을 가능한 그대로 내놓는 것은 부담이 된다. 대중 앞에 내 놓는데 낯 간지러워 다듬으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능한 자기 검열을 최소화하려한다.

필자의 전공은 인도불교학 가운데 초기불교이다. 학부부터 석·박사에 이어 현재까지 줄곧 초기불교에 집중하였다. 특히 우리 현실을 떠나지 않은 초기불교 사상과 실천에 관심이 있다. 내가 ‘왜 미얀마불교인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얀마는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오랫동안 초기불교 전통을 고수하여 왔다. 초기불교문화가 살아있고 이를 체험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불교 발상지인 인도에서 사라져버린 불교문화가 오히려 미얀마에서 전승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필자가 처음 미얀마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인도였다. 1990년부터 9년 동안 미얀마로부터 유학 온 스님들을 통해서이다. 미얀마 스님들은 대체로 학력과 법랍 그리고 수행력을 갖춘 나이 든 스님들이 유학 왔다. 스님들은 가르쳐주는 데에 아낌이 없었다. 경전 공부는 물론 상좌불교의 일상문화까지도 열의를 가지고 가르쳐 주었다. 마찬가지로 미얀마의 아비달마 공부 분위기와 수행문화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미얀마 스님들과 인도의 불교사찰에서 지내보기도 하고 여행도 해 보면서 생활 속에서 불교와 미얀마를 이해해 볼 수 있었다. 스리랑카나 다른 나라의 스님들이 많이 있었지만 미얀마 스님들과의 관계가 특히 돈독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항상 미얀마불교는 힘이 있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1999년 귀국 후 국내 생활은 논문 쓰기에 바빴다. 그 가운데 초기불교 수행론에 관한 발표는 학계에서 주요 쟁점으로 발전하였다. 내가 제기한 사띠(sati) 개념과 사마타 위빠사나의 관계성 등이 그것이다. 지금에 있어 그 동안 문제되었던 점들이 정리된 점도 있다. 그 후 한동안 수행론 발표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1~2년 안에 이제까지 내가 제기해 온 문제들을 새롭고 분명하게 다시 제출하려 한다.

쟁점에 있어 이론과 실천, 개념과 수행 상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일의 일환으로 그동안 국내의 쟁점을 미얀마로 가지고 갔던 것이다. 미얀마 스님들의 입장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다.

대체적으로 미얀마 스님들은 법의 논의에 있어 경론 근거를 들어준다. 상당한 신뢰를 준다. 인도에서 함께했던 스님들과 수행처의 수행승들을 찾았다. 준비해 갔던 질문을 풀어보았다. 많은 점들을 다시 배울 수가 있었고 또한 확인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자신을 납득시킬 수 없는 개념상의 문제와 실천의 문제점들이 남아 있다.

다시 미얀마를 찾은 해는 그 때로부터 1년이 지난 2012년이었다. 이때는 석사 과정을 같이 했던 미얀마 스님의 시골 절을 멀리 찾았다. 스님의 사찰은 40여 명의 스님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석사를 마치고 인도를 떠나 호주로 유학했던 스님과 오랜만에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이때 스님은 토론의 결과로 위빠사나와 관련한 유명한 경구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던졌다. 나 또한 논문에서 그 의미를 중요하게 다루었던 것인데 새삼 스님은 완전한 이해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몇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스님이 던진 문제를 안고 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위빠사나에 대한 논의는 미얀마 몇몇 선원에서 행해지는 행법을 반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얀마 수행처를 내왕하는 연구자들과 논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초기불교의 수행법으로 바로 간주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필자는 이러한 차이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미얀마 현장에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한국인이 많이 머무는 유명한 미얀마 선원을 찾아보았다.

선원의 일과표는 새벽 3시에 시작한다. 선방은 매 시간 좌선으로 일과가 짜여 있다. 선방 이외는 아침 공양과 점심 공양 그리고 수행을 점검하기 위한 인터뷰 시간 등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점차 시간이 지나자 미얀마 불교문화가 초기불교와 관련하여 포착되기 시작했다. 인도가 온전한 불교 전통이 단절되어버린 반면에 가까이 접경해 있는 미얀마에서 오히려 초기불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초기경전 속에 나타난 일들을 미얀마 불교현장에서 보게 될 때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확실히 미얀마는 초기불교의 모습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나라보다 생활불교로 일상 삶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얀마 선원의 답사 과정에서 각국의 수행자는 물론 한국의 많은 수행자를 만났다. 여기에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불교인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미얀마를 내왕하면서 미얀마와 미얀마 수행법을 잘 이해하고 있는 숨어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떻게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여러 수행처까지 찾아서 수행하고 있다는 데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러면서 우리의 과거가 떠올랐다. 중국으로 구법·유학했던 과거의 한국불교 상황이 현재 미얀마의 여러 가풍의 수행처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치 삼국과 고려의 수많은 수행자들이 중국의 수당에 구법·유학했던 시대가 미얀마에서 재연되고 있으며, 다시 현재 한국에서 미얀마 위빠사나 수행법이 구산선문의 상황처럼 재연되고 있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이러한 답사과정에서 미얀마나 외국 수행자보다는 한국 사람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사마타 위빠사나에 대한 수행과 간화선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내가 아는 사람도 있었다. 또는 나의 글을 읽었다거나 나의 강의를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요기(수행자)는 그 동안 논의되었던 위빠사나 수행론에 관한 논문을 출력해 와서 보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논의는 더 진지해질 수 있었다.

한국이라는 공간을 벗어나게 되면 묶여있던 의식이 풀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본연의 민낯을 보여주고 드러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나눌 수 없는 교감과 공감이 새삼스레 외국에서 가능한 경우도 있다. 불교와 사회 그리고 인간 전반에 관한 이야기가 허심탄회하게 오간다.

우리 사회와 한국불교 현실에 대한 사색과 성찰 그리고 반성과 비판의 이야기는 끊임없다. 물론 미얀마나 다른 불교권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국내에서 수십 년 걸쳐 배울 것을 해외에서 단 몇 달 만에 집중적으로 압축하여 배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을 떠나면 한국이 새롭게 보일 수 있다. 한국을 떠나서 한국불교가 제대로 보이기도 한다. 미얀마불교를 통해 한국불교가 훨씬 잘 보일 수 있다. 안에서 잘 안 보이던 것이 다른 나라의 불교와 만나게 될 때 그 동안 전혀 몰랐던 여러 면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다른 나라의 불교를 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불교에 대한 공부가 된다. 늘 비교적으로 한국불교의 면모를 생각해 보게 된다. 한국불교 뿐만이 아니라 한국문화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 보게 된다.

앞으로 연재에서는 미얀마 수행처에서 기록한 일들을 소개하려 한다. 여기에는 위빠사나 수행처의 현황과 일상 그리고 시설과 관리 등도 포함된다. 그 가운데 빠옥 총림의 수행처가 중심이 될 것이다. 현재 미얀마에서 빠옥 수행처는 규모가 가장 크고 또한 유명하다. 우리나라 수행자들도 가장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머물며 수행하는 도량이다.

이러한 수행처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했던 점들을 말하려 한다. 이를 통해 한국불교의 현안과 과제를 생각해 볼 수 있고, 동시에 한국을 통해 미얀마불교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국제간에 교류가 중요시 되는 시대에 불교의 문제를 좀 더 다른 각도로 진단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동국대 미래융합교육원 외래교수〉

조준호 교수는
동국대를 졸업하고 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사·박사를 받았다. BK 21 불교사상연구단,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고려대 철학과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우파니샤드 철학과 불교〉, 〈동남아불교사〉(공저)를 발간했고, 주요논문으로 ‘위빠사나 수행의 인식론적 근거’, ‘초기불교에 있어 행복과 욕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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