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 스님을 직접 시봉한 유일한 생존제자였던 덕숭총림 수덕사 견성암 선덕 덕림당(德林堂) 수연 스님<사진>이 19일 오전815분 견성암 동선당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92, 법납 81. 스님의 영결식과 다비는 오늘(11) 오전 9시 견성암과 수덕사 연화대에서 엄수됐다.
이에 조계종 교육부장 진광 스님이 수연 스님을 기리는 추모사를 보내왔다. 이에 전문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문득 운문사 영덕 스님에게서 은사스님 곱게 곱게 평안히 열반 하셨습니다.”라는 수연 노스님의 입적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생전 스님을 떠올리며 향 한 자루 사루어 불전에 올리고는 추모의 정을 사뢰어 봅니다. 본시 생사란 뜬구름이 일어나고 스러짐이라지만, 이 또한 사람의 일인지라 그리움과 추모의 정마저 어찌할 수 없나 봅니다.

당대의 시인 맹호연의 희공선방(羲公禪房)’이란 시에 깨끗한 연꽃을 잡아 들고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알았노라(看取蓮花浮 方知不染心)”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수연 노스님의 삶과 수행이 또한 그러한지라, 모든 대중들은 스님을 수덕사의 연꽃(修蓮)’과 같이 수희찬탄 하였습니다.

스님의 법명은 수연(修蓮)이요 법호는 덕림(德林)이시다. 1938년 성호(性悟) 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여 1940년 벽초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52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 하시었다.

이후 제방에서 수선안거를 하고 경학을 연찬하거나 주지를 살기도 하셨지만, 1985년 견성암으로 환지본처한 후엔, 도감과 선원장 그리고 선덕으로 평생을 수행정진 하시었다. 201919일 오전 815분 견성암 동선당(東禪堂)에서 원적에 드시니 세수 93세요, 법납은 81세 이시다.

처음 덕숭산에 들어 원담 노스님을 시봉할적에 견성암 노장님들과 함께하는 인연으로 스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야말로 추상(秋霜)과 같은 선기(禪機)과 국량(局量)이 있는지라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때론 춘풍(春風)보다 더 따스한 자비와 덕화가 함께 하시었음은 물론입니다.

우리 시자스님, 공부 잘해서 큰스님 되소!”라며 손을 꼬옥 잡아주신 것을 떠올리니, 마치 부모를 잃은 듯 황망하고 애통한 마음입니다. 아마도 당신 마음에는 내가 손주같은 생각에 그리 잘해주신 듯 합니다. 그렇게 원담 노스님과 견성암 노장님들이 청안하시던 그 시절은 얼마나 전설처럼 아름다운 한 시대 였던가! 이제 누구를 위해 그 시대를 증언하고 추억할지 모를 일 입니다.

스님께서 만공 노스님을 직접 시봉한 유일한 생존제자 이셨습니다. 덕숭산에 들어 만공, 혜암, 벽초, 원담 대선사를 모시고 수행정진한 그 법연(法緣) 만으로도 존중받아 마땅하거니와, 그 오랜 세월을 대중과 더불어 함께하신 그 자비덕화에 경외와 찬탄을 드립니다.

그런 까닭에 견성암 근처의 바위며 소나무와 이름없는 화초에 이르기까지 스님의 마음과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어디 있었나요? 어찌 그것들이 눈에 밟혀 그리 뒤도 안 돌아 보시고는 쉬이 가실 수 있으십니까? 평생을 덕숭산과 함께 하셨으니 그 본래의 마음을 잊지마시고, 속히 덕숭산으로 다시 돌아오소서!

문득 견성암 주위의 늘 푸른 소나무들을 봅니다. 이 산중을 거쳐간 스님들의 혼이 저리 소나무로 화하여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옛시에 풀 깊은 창문밖 소나무가 길위에 서 있지만, 하루종일 바라 보아도 싫증나지 않음이라!(草深窓外松當道 盡日令人看不厭)”고 하였으니, 이는 스님을 바라는 제 작은 마음과 같다 하겠습니다.

스님은 참 좋으시겠습니다. 만공 큰스님과 혜암, 벽초, 원담, 법장 스님도 다시 뵙고, 은사 스님이며 견성암 노비구니 스님도 다시 만날 수 있으시겠지요?

하늘로 올라가 한 세상 원없이 수행했고 참으로 행복했노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우리 수연 노스님 일생이 다만 이 무엇이던가!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해 더 이상 길이 없는가 했더니, 버들 푸르고 붉게 꽃피는 한 마을이 있음이라.(山窮水盡疑無路 柳綠花紅又一村)”

수연 노스님! 이 때에 이르러 여여(如如) 하신지요? 부디 본래 서원을 잊지 마시고 속히 사바세계로 다시 오시어 널리 중생을 제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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