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공 아닌 마음속에 아빠 있었다

아빠는 낡은 공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에 있는 걸 알았다
이따금 잊고 살 때도 있었지만
아빠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글이글 행성 사는 불타는 곰
“지훈아, 무얼 그리고 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을까?”


혜원 스님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빨간색 크레용을 들고 분노의 색칠하기에 열중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커다랗게 벌린 곰의 입속에서 마구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불꽃을 그리던 중이었다. 치켜 올라간 곰의 눈도, 곰이 들고 있는 무지막지한 몽둥이도 활활 타오르고 있다.

토요일 오후에 어린이 법회가 끝나고 나면 포교원에서 동아리 활동을 한다. 내가 활동하는 ‘맑고 향기롭게’는 이름만 들으면 다도모임 같지만, 혜원 스님과 함께 하는 그림 동아리이다.
칠판에는 오늘의 주제가 적혀 있었다.
‘아름다운 우주.’

도화지에 동그라미를 그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에메랄드빛의 작고 아름다운 행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손은 어느새 까맣게 타버린 행성 위에 쓰레기를 잔뜩 쌓아놓고, 쓰레기를 지키고 있는 무시무시한 곰을 그리고 있었다.

“이 행성의 이름은… 이글이글 행성이에요. 원래는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행성이었죠. 이 행성을 지키는 곰은 항상 화가 나 있어요.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행성의 쓰레기들을 누군가 훔쳐 가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어느 날 행성에 작고 귀엽고 착한 꼬마가 던진 야구공 하나가 떨어졌어요. 꼬마는 야구공을 찾으러 행성에 갔는데요, 곰은 꼬마에게 도둑놈이라고 욕하며 엄청나게 화를 냈어요. 얼마나 화를 냈는지 곰의 가슴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온몸을 휘감고, 행성까지 이글이글 타오르게 했죠. 성난 곰은 활활 불타오르는 몽둥이를 휘둘러 착한 꼬마를 쫓아 버렸어요. 그런데 그 공은요, 꼬마한테 정말정말 소중한 공이거든요.”

여기까지 말하고나니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차올랐다.

“그 공은 꼬마의 아빠가 준… 훌쩍… 아빠는 야구선수였는데, 훌쩍… 멀리, 하늘나라로 떠나면서 준… 마지막… 선물… 그만, 바보 같이 잃어버려서…”

정말 바보 같았다. 금새 차오른 눈물이 뺨 위로 줄줄 흘렀고, 눈물보다 많은 콧물이 입술을 타고 떨어지다가 훌쩍과 으아앙 사이사이에 야구공에 대해서, 너무 멀리 떠난 아빠에 대해서, 아빠와 함께하던 캐치볼에 대해서, 고물상에 발도 못 들이게 하는 곰 같은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혜원 스님의 표정은 점점 더 알쏭달쏭해져 갔다.

“공원 옆에 화성고물상이라는 곳이 있어요.”

새침데기 가윤이가 내 팔을 잡더니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 말하기 시작했다.

“쓰레기 같은 것이 잔뜩 쌓여 있는 곳이에요. 거기로 지훈이 야구공이 들어갔는데 가져올 수가 없대요. 거기에 곰처럼 덩치 큰 아저씨가 있는데요. 아이들이 다가가면 몽둥이를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기 때문에 공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볼 수조차 없었대요. 그 공은 지훈이 아빠의 유품이라서 지훈이에게는 정말 소중한 물건이라 꼭 찾아야 한대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 맞지?”

가윤이가 20년 경력의 베테랑 동시 통역사처럼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만 하고 좀처럼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말해 주었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입을 헤 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뭔지 알았으니 이제 해결하러 가자꾸나.”

혜원 스님이 내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

그림=강병호

업어치기 한판!
150cm가 조금 넘는 작은 키에 좁은 어깨, 마른 몸의 혜원 스님이 가삿자락을 펄럭이면서 걸어간다. 그 뒤를 스님과 키가 비슷한 4, 5학년 아이들이 올망졸망 따라간다. 스님의 발걸음은 힘차다.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며 따라가던 아이들은 화성고물상이 가까워져 오자 주춤주춤 걸음이 느려진다. 허리에 끈이 묶인 것처럼 내 몸은 대열로 잡아당겨지는데, 마음은 자꾸 뒷걸음질 치고 있다.

“야구를 하지 않았더라면 네 아빠의 삶은 훨씬 더 좋았을 거야.”

엄마는 말하곤 했다. 아빠에게는 직업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는 꽤 잘 나가는 야구선수였다던데, 어깨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로 아빠는 다른 직업을 갖지 못했다.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에서 코치를 하는 것이 아빠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훨씬 더 좋은 삶이란 뭘까. 엄마의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가족의 생활을 책임질 만큼의 돈을 버는 것일까.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 교통사고로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기억 속 아빠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아빠가 웃고 있을 때 아빠는 항상 야구공을 손에 쥐고 있었다. 손목에 힘이 없어 글러브도 제대로 못 드는 나에게 공을 던질 때 아빠 얼굴에는 웃음살이 번져 있었다. 아빠는 야구로 돈을 벌지 못했지만, 야구는 아빠를 행복하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빠가 떠난 후 나는 캐치볼을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은 야구를 하지 않았다. 그 녀석들은 늘 축구, 축구공에 한이 맺힌 것처럼 시간만 나면 공을 찼다.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새아빠는 야구공을 어떻게 잡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느 땐가 공원에서 새아빠와 캐치볼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30분 내내 공을 주우러 다녀야 했고, 새아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백 번쯤 들어야 했다.

캐치볼을 할 수 없었지만, 나는 항상 야구공을 쥐고 있었다. 꼬질꼬질 손때가 묻은 공을 쥐고 있으면 아빠와 함께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아빠를 아직 잊지 않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손에서 공을 놓는 순간, 시간이 갈수록 점점 희미해져 가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공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는지도.

“크아아앙!”

화성고물상에 들어서자 우렁찬 곰의 함성이 들렸다. 아이들이 스님 뒤로 숨었다. 바퀴가 찌그러진 자전거, 녹이 슬어버린 유모차, 깨진 가마솥 뚜껑 같은 것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어딘가에서 곰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소리만으로 우리를 제압했다.

“실례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혜원 스님이 말했다. 조금의 떨림도 없이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였다. 쿵쾅쿵쾅! 산처럼 쌓여 있는 신문 무더기 뒤에서 곰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님은 합장하고 머리를 숙였다.

“꺼져라! 이 도둑놈들아!”

곰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몽둥이를 휘두르며 우다다다 달려온다.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물러난다. 두려움 때문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서 달려오는 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장면이 영화의 느린 화면처럼 흘러갔다. 곰이 휘두르는 몽둥이가 낡은 야구 배트라는 것도 알아챌 수 있었다.

혜원 스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달려오는 곰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한 손으로 멱살을 잡고, 다른 손으로 팔을 잡더니 몸의 방향을 틀었다. 150kg은 되어 보이는 곰의 엄청난 체구가 붕 떠올랐다가 원을 그리며 허공을 가른 후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잠시 정적.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작은 체구의 혜원 스님이 자신보다 족히 세 배는 되어 보이는 남자를 업어치기 한 것이다.

“한판!” 민구가 한 손을 높이 들며 외쳤다. 멍하니 서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아저씨가 눈을 떴다. 눈에 불이 꺼지자 곰은 사람이 되었다. 순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어리둥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 주고 받으며 오가는 마음
“알고 보니 새아빠는 루미큐브의 천재였어요.”
“루미큐브?”
“숫자패를 사용하는 보드게임이에요. 주말마다 저녁 설거지 내기 루미큐브를 해요. 새아빠와 내가 한 팀이고, 엄마랑 여동생이 한 팀인데요, 4주 연속으로 우리 팀이 이겼어요.”

‘맑고 향기롭게’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화성고물상 마당에서 캐치볼을 하는 것은 나의 새로운 주간 행사가 되었다. 공을 던지는 동안 우리의 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저씨는 야구 광팬이었다. 놀랍게도 아저씨는 아빠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빠가 구원투수로 나섰던 고교 야구 준결승 대회를 아저씨는 경기장에서 직접 보았다고 했다. 8회 말에 투입된 아빠가 어떻게 활약했는지, 패배 의식에 젖어있는 팀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었는지, 공을 던지는 자세까지 하나하나 이야기해주었다. 어찌나 자세하게 말했는지, 마치 내가 경기장에서 직접 그 경기를 봤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예기치 않게 한판승을 거둔 후로 혜원 스님은 아저씨를 찾아와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단지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뿐이었는데, 아저씨는 차츰 마음의 문을 열었다. 아저씨는 쓰레기를 소중한 보물로 여기는 병에 걸렸다고 했다.

한 계절이 바뀌고 아저씨는 마침내 화성고물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팔 수 있는 것은 팔고, 보관해야할 것은 두고, 버려야 할 것은 버렸다. 쓰레기는 끝도 없이 나왔다. 커다란 트럭 세 대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화성고물상은 겨우 정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아저씨는 긴 머리를 짧게 잘랐지만, 수염은 깎지 않았다. 혜원 스님이나 나에게는 다정했지만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아직 경계를 풀지 않았다.

아빠의 낡은 공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아저씨는 하얗고 반들거리는 새 공을 내게 건네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아저씨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라고 말하며 새 공을 고맙게 받았다. 아빠의 공을 잃어버린 것은 못내 아쉬웠지만, 아빠가 낡은 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따금 아빠를 잊고 살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빠에 대한 내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간다!”
아저씨가 공을 던졌다. 공이 호를 그리며 날아와 내 글러브 안으로 탁! 들어온다. 다시 공을 던진다. 맑은 공기를 가르며 새하얀 공이 날아간다. 〈끝〉

우승미 작가는
197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빛이 스며든 자리’가 당선됐고, 장편소설 〈날아라, 잡상인〉으로 제33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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