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관사에 전해지는 왕조의 명암

연꽃이 핀 진관사 전경

연재를 시작하며, 서울의 불교문화

경주와 개성 그리고 서울은 왕조의 수도였다. 그런 인연으로 어느 곳보다 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불교의 역사와 문화가 가장 풍성한 곳은 경주이다.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불교박물관이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역시 많은 불교문화가 존재하지만 갈 수 없어 후일을 기약한다. 두 곳과 비교할 수 없지만 조선의 수도 한양 역시 제법 많은 불교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서울에 현존하는 사찰은 어림잡아도 수백 곳이 넘는다. 곳곳마다 사연을 품고 있다. 대상이 많으면 선택해야 한다. 그 기준은 역사와 사연이다. 이제 진관사를 시작으로 서울의 사찰 속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보자.

고려 제 8대 현종과 진관사

고려 8대 임금 현종의 탄생과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 못했다. 태조는 호족을 회유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한 까닭에 배우자만 29명이었다. 그들이 낳은 자식이 25남 9녀였다. 대업을 이루었으니 정략결혼은 성공한 정책이라 말할 수 있으나 후유증도 그만큼 컸다. 외척들은 주도권을 쥐기 위해 암투를 벌였다.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태조의 이복 남매끼리 결혼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잔혹한 고려의 왕족 처벌
민심 달래려 수륙재 거행
아들 죽자 왕도 직접 행차

5대 경종의 3, 4번째 부인은 자매로 대종 욱의 여식이며 성종의 누이였다. 언니는 경종이 살아있을 때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어릴 때 경종이 죽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대종 욱의 아들이 6대 성종이 되었다. 왕자가 없던 성종이 죽자 경종의 아들이 7대 목종이 되었다. 그를 낳은 어머니는 천추태후가 되어 권력을 휘둘렀다.

경종이 죽은 후 집에서 지내던 동생은 안종 욱과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았다. 그가 8대 현종이다. 어머니는 산고로 죽고 아버지는 왕의 부인과 사통한 죄로 귀양을 갔다. 혼자 남은 현종은 궁중에서 양육되었다. 비록 정상적인 혼인관계에서 출생하지 못했지만 부모가 모두 왕족이고 어머니가 성종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는 현종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강제로 출가시켜 북한산 신현사(神穴寺)로 쫓아버리고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고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진관대사가 자신의 방에 굴을 파고 숨긴 덕분에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렵게 목숨을 유지한 그는 1009년 2월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위되자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현종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대사를 위해 사찰을 창건하고 머물게 하였다. 그곳이 지금의 진관사이다. 그 후 고려왕조는 현종의 후손들로 계승되었으니 아마도 이곳은 고려왕조를 위한 길지였던 모양이다.

진관사의 국행수륙재 시연회 장면.

 

새로운 민심을 위한 진관사 수륙재

왕조 교체에는 불가피한 희생이 따른다.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것은 역시 고려의 왕족이다. 태조는 즉위 3일 만에 사헌부의 주청으로 왕씨 일족을 강화도와 거제도 두 섬으로 내몰았다. 그 과정에서 죽은 왕족들이 수없이 많았다.

조선의 건국에 동조하지 않은 고려의 관리도 희생되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신념 때문이었다. 개성 광덕산 두문동에 들어간 72명을 회유하기 위해 불을 질렀지만 끝내 나오지 않고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일이 대표적이다.

새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가 희생된 경우도 있었다. 태조 3년(1394) 고려 왕조에서 관리를 지낸 사람들이 반란을 도모하였다. 사전에 발각되어 화를 면한 태조는 신하들의 주청에 따라 그들을 처벌하였다.

고려 왕족과 관리의 처벌은 잔혹하였다. 이를 지켜본 대중들은 저항할 수 없었지만 희생자에게 연민의 정을 보냈다. 이런 민심을 달래는 것이 조선왕조의 숙제였다. 죽은 망자를 위한 천도재가 제격이지만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은 탓에 불교를 내세우기 어려웠다. 그러나 유교의 내세관은 죽은 망자를 위로하기 역부족이었다. 결국 선택은 불교였다. 수륙재를 설행하여 물과 뭍에서 희생된 무주고혼을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풀어 민심을 얻으려 하였다.

태조 4년(1395) 2월 천마산 관음굴, 삼척 삼화사, 그리고 거제에 있는 견암사에서 수륙재가 설행되었다. 이후 봄과 가을 수륙재 설행을 항식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곳은 도성과 멀었다. 희생자를 관대하게 대하는 모습으로 새로운 왕조에 대한 지지를 얻으려는 여론 형성이 어려웠다. 고려 왕조와 멀지 않으며 새로운 왕조와 가까운 곳이 필요하였다. 한양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진관사가 제격이었다. 이런 의도로 태조는 6년(1397) 1월과 9월 진관사를 방문하였고, 7년(1398) 1월 이곳에서 수륙재를 지냈다.

수륙도량의 모습과 이전 논의

배불정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태종이었지만 즉위하면서 1월과 10월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지냈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이전할 생각도 있었다. 권근이 지은 〈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를 보면 즉위 6년 정월에 내신 이득분과 승려 조선(祖禪)에게 다른 곳을 찾아보도록 명하였다. 나라 일을 하다 운명하였지만 제사지낼 이가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는 자들을 위해 수륙재를 베풀어 중생을 이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득분과 서운관 상충, 양달, 그리고 승려 지상(志祥) 등이 삼각산에서 도봉산까지 여러 절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진관사만큼 좋은 데가 없자 이곳에 수륙도량을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내신 김사행을 비롯하여 대선사 덕혜, 지상 등이 승려들을 모아 공사를 시행하였다. 태종은 2월 친히 왕림하여 세 단의 위치와 차례를 정하였다. 3월에도 또 행차하였다. 공사는 9월에 끝났다. 세 단은 모두 3칸씩 집을 지었다. 중단과 하단 좌우에 각각 목욕실 3칸을 두었다. 하단 좌우에는 따로 조종의 영실(靈室) 8칸씩을 설치하였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등 시설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모두 합하여 59칸이지만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다.

태종은 14년(1413) 지금까지 거행되던 곳에다 오대산 상원사를 추가하였다. 그리고 왕명으로 매년 2월 15일에 행하던 것을 이후 정월 15일에 개최하도록 하였다.

진관사 수륙도량은 세종 때 이전 논의가 있었다. 31년(1449) 4월 진관사의 샘물이 불결하고 또 땅이 좁아 수륙재를 국녕사로 옮기자는 것이었다. 수륙사를 포함하여 사찰 전체를 수리하려면 많은 재목과 기와를 운반하여야 하는데 도로가 좁고 험하여 어려움이 많았다. 그에 비해 영국사는 지세가 시원하고 정결하며 물이 맑고 깨끗하였다.

이런 논의에서 예조판서 허후는 태조가 설치한 것이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 의견에 세종은 처음부터 조선왕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고려왕조를 위한 것이므로 옮기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갑자기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불교계 고승과 협의하라 하였다. 5월에 다시 중신들과 논의하여 영국사로 옮기는 것보다 진관사를 수리하는 쪽으로 정하였다.

태종의 행차를 재연한 진관사 국행수륙재

강력한 군주 태종도 마음 약한 아버지

조선은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세웠지만 오랜 시간동안 민중들의 생활에 자리한 불교신앙을 하루아침에 없애기 어려웠다. 종묘를 지어 왕과 왕후를 제사지냈지만 마음 속 깊이 잠재해 있는 극락왕생에 대한 염원은 불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 많은 정적을 죽이고, 강력한 배불정책을 펼친 태종이었지만 그 역시 개인적인 어려움은 불교에 의지한 아버지였다. 18년(1418) 3월 넷째 아들 성령대군이 죽자 변계량에게 사제의 교서를 짓게 하고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베풀었다.

“아아! 슬프다. 이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너의 직질을 높이고 너에게 시호를 주어 은수의 융성함을 상례보다 다르게 한다. 이제 근신을 보내어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설치하여 명복을 빌고, 또 치부하고 제사하여 말로써 권하여 음향하게 한다. 아아! 말에는 다함이 있으나 정(情)에는 끝이 없는데, 너는 그것을 아는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가?”

태종은 교서를 반쯤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흐느껴 울었다. 끝까지 읽지 못하고 물리면서 나의 정의(情意)를 다하였다고 스스로 위안하였다. 강인한 군주였지만 자식의 죽음 앞에는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

그 후 진관사에서 태조, 정종, 태종, 세조와 그의 장남, 그리고 성종의 49재를 지냈다. 또한 조선 초 많은 왕비의 49재 역시 이곳에서 지냈고, 그들의 기신재가 지내졌다. 그 후 연산군 때 수륙재를 설행하며 선대의 왕과 왕후를 위해 향축한 것을 보면 이곳이 오래 동안 조선 왕실의 신앙처였음을 알 수 있다.

김경집 교수는

동국대 불교학과와 동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위덕대 불교학부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진각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불교학회, 한국불교학연구회 이사, 보조사상연구원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주요 논저로 〈경허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그 사상적 의의〉 〈근대불교의 기점과 개혁적 전개〉 등 60여 논문과 <한국 근대불교사> <한국불교 개혁론 연구> <역사로 읽는 한국불교> 등 10여 권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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