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항상 보살행이 되도록 해야

우리가 오늘 이렇게 또 한자리를 하게 됐습니다. 모습으로는 한자리가 아닌 것 같아도 항상 여러분께서 마음을 이어 가신다면 나도 또한 같이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일체제불의 마음도, 만 불(萬佛)이 일 불(一佛)이고 일 불이 만 불인 것처럼 바로 여러분의 불성 자체, 주인공에 한마음이 되실 것입니다.

이 몸은 심부름꾼일 뿐 나의 원동력인 근본이
나를 움죽거리게 하고 보게하고 듣게하니
모든 거를 거기다 맡겨라.

리가 요즈음…, 이 말은 좀 해야겠습니다. 새 법당이 올라가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지붕이 올라가니까 마음이 흐뭇하시죠? 나도 여직껏 둘러보지는 않았는데 지붕이 올라가는 걸 보니까 마음이 참 좋습니다. 집은 그렇게 짓고 산도 또 저렇게 있는데 사람이 인생길을 걷고 또 걷고, 그래도 그 집은 남아 있고 그 산은 남아 있듯이, 우리는 그렇게 한 찰나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까 청법가에도 있었지만 ‘새 인연을 이어서 해 달라’고 그랬죠? 그것은 항상 마음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봄에 씨앗을 심어서 먹고 그 이듬해에 씨앗을 또 심어서 먹듯이, 그것이 끊임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요즘 조계종 건도 그렇고, 여러 가지 사건에 여러분 마음이 흔들리셨습니까? 그것은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서로 부딪치지 않으면 개혁이 되지 않고 계발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는 걸 보더라도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지혜를 넓히고 공부를 하는 뜻이니까 그게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두뇌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발전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두뇌의 근본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딪침이 없고 상대가 없다면 우린 발전을 못 합니다. 차를 아무리 새로 사 놔도 운전을 하지 않으면 소용도 없는 차가 되고요. 그와 같이 인간은 부딪침에 의해서 다 커지고 발전을 하고 그러는 거죠.

그럼으로써 ‘스님네들이 욕심이 얼마나 많아서 그럴까. 다 때려죽여야 돼.’ 이렇게 하지 마시고 ‘그것은 발전의 길이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 모두를 보고서 우리가 공부하니 그분들도 역시 스승인 것입니다. 장마가 드는 걸 봐도 스승이요, 물이 흘러가는 걸 봐도 스승이요, 돌이 있는 걸 봐도 스승이요, 꽃이 피는 걸 봐도 스승이요,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일체 만물을 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공부를 하고 물리가 터져서 지혜가 넓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속에서 잘못 나가느냐 잘 나가느냐 하는 양면의 문제가 있죠. 참답게 물리가 터져서 잘 나갈 수 있는 머리인데도 불구하고 잘못 나가는 것을 악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요즘 가만히 보면, 사고도 많이 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점심을 굶는다든가 또는 너무 실직자가 많아서 어려움을 겪는다든가 하는 문제들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옷은 누더기를 입었어도 먹고 살아나갈 수가 있는데 먹지도 못하고 그렇게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아주. 그 원인이 어딨느냐? 이것은 우리가 자기 뿌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느라고 이렇게 이 말 저 말 끌어다 대는데요, 자기의 뿌리를 의지하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말하자면 과거 자기를 믿지 않기 때문이죠. 과거 자기가 자기 불성이니까요. 그것은 한 해 두 해, 또 한 생 두 생만 이렇게 흘러 내려오면서 나를 이끌어 온 것이 아니라 수억겁 전으로부터 이끌어 온 장본인인 바로 근본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자세하게 팔정도니 육바라밀이니 이런 걸 얘기를 안 하고 그냥 넘어가느냐.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냥 훌떡훌떡 넘어가느냐. 이런 게 아쉽죠?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업보가 ‘있다’고 한다면 업보가 있게 되고 소멸이 안 돼요. 여러분의 마음이 진짜 중요한 겁니다. 마음이 생각을 그냥 하고 사느냐, 한생각을 하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생각을 할 때 자기 혼자만 생각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몸에서 모든 생명들이 더불어 다 같이해 주기 때문에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거를 알면 한생각이 되는 거고 그걸 모르면 그냥 생각이 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이 과거로부터 그 수많은 세월을 걸어오면서 쌓은 습을 어떻게 단번에 소멸을 시킵니까? 참회했던 마음이 없어지고 또 일을 저지르고 이렇게 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몸은 시자일 뿐이다. 심부름꾼일 뿐이다. 나의 원동력인 근본이 나를 움죽거리게 하고 보게 하고 듣게 하니 모든 거를 거기다가 맡겨라.” 하는 겁니다. 죄를 지었든지 안 지었든지 모든 거, “일거수일투족을 다 거기다가 맡겨라.” 이러는 겁니다. 왠 줄 아십니까? 살아오면서 쌓은 습관과 업장이 너무 두터워서 그 업장을 소멸시키는 데는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얘기죠. 모든 걸 갖다가 관하고 놓으면 그거는 소멸이 되니까요. 소멸이 되니까 이루어지는 겁니다. 소멸이 안 되면 그게 이루어지지 않죠. 그래서 때로는 영가 천도를 하러 와도요, 과거에 이러이러한 문제가 숨어 있을 경우 그 숨어 있는 거를 다 끄집어내서 해 줍니다.

그런데 부모의 천도, 이것은 부모의 업장을 모르고 그대로 하면 빠진 게 많아서 그 업장의 요소들이 다 녹아지질 않죠. 그러니까 그 조상님들이 제대로 천도될 수 없으니까 그때는 ‘마저 해 달라’고 하는 문제들이 생기죠. 그러니까 “중생이라고 할 것도 없다. 부처라고 할 것도 없다. 당신네들이 그대로 법신이고 그대로 보현신이고 그대로 부처다.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생각하면 법신이고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보현신이다. 보현신은 어떠한 역할을 하느냐. 모든 걸 감싸고 움죽거려 주는 게 보현신이다. 마음으로 생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법신이다. 가만히 있으면 그냥 부처님이다. 그러니까 아주 이 한 생에 빨리 깨쳐서 다 소멸시키자.” 하는 뜻입니다, 나는.

그런데 소멸이 되면서도 또 공덕이 되는 것은 뭐냐? 거기다 자꾸 입력하면 소멸이 되니까 공덕이 되는 거죠. 업식과 업보와 업력이 다 소멸되니까, 자꾸자꾸 하나하나 없어지니까 집안이 조금 편안해지더라 이런 거죠. 여러분의 마음으로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아는 거예요. 양심 때문에 부처님 법이 요만큼도 에누리가 없는 거죠. 자기가 아는 것을 이 세상 일체 만물의 부처님들이 다 알고 있고, 또 일체 만물도 다 연결이 되니까요. 알고 보면 아주 요만큼도 에누리 없는 것이 자기의 마음이죠. “야호” 하면 자기가 “야호” 한 것이 다시 되돌아와서 자기한테 들리듯이, 내가 마음을 냈을 때, 아무도 몰라도 내가 알고 있으니까 상대에게도 다 퍼져서 알게 돼요. 그래 어떤 사람이 뇌물을 갖다 주니까 받지 않더랍니다. ‘아무도 없는데 좀 받으시지 그러시느냐.’ 그러니까 ‘너도 있고 나도 있지 않느냐.’ 그러더라는 거죠.

이 세상에서 빨리 지혜롭게 공부하시려면, 내가 항상 말씀드리죠.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점프해서 넘어가도 된다. 수상행식이라는 것도 첨보해서 원심으로 만들어라.’ 첨보하면 그거를 다 뛰어넘는 거죠. 원심이란 쉽게 말하자면 공식(共食)이죠. 한데 합쳐진 한마음을, 의식을 말하는 거죠. 먹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 전체가 살아나가는 것을 한데 합쳐서 무(無)의 세계나 유(有)의 세계를 대처해 나가는 거를 공식이라고도 할 수 있죠.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수상행식이 따로 있습니까? 사람이기 때문에 업보도 있고, 잘못하는 것도 있고 잘하는 것도 있고,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고 이러는 거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저지를 줄 알기 때문에, 또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 슬픈 걸 알고 아픈 걸 알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예 그냥 잡아먹고 먹히고 이러는 거나 안다면 어떻게 부처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고등 동물입니다. 그렇게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그 아픔을 겪어 온 장본인들이에요, 우리가. 그래서 그렇게 거쳐 왔기 때문에 인간은 감수성도 빠르고 상상력도 빠르다는 얘기죠.

그러면 우리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그 빠른 감수성과 상상력이 그대로 행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둑질하는 그런 감수성 말고요. 도둑질하는 그런 상상력은 말고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하면 뛰어넘어서 저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뛰어넘어서 저거를 대치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뛰어넘어서 좀 잘되게 할 수 있나. 이런 거 말이에요. 부처님의 마음이 전체가 보살이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마음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지금 마음공부 하는 분들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용도에 따라서 물에 가면 바로 주해신이 되고, 산에 가면 주산신이 되고, 들에 가면 지신이 되고, 또 아프다고 하면 약사 보살이 되고, 누가 명이 짧다 하면 바로 칠성 부처로 화하고, 또 좋은 데로 못 간다 하면 지장으로 화하고….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돌아가거든요. 남들처럼 다, 손 달리고 귀 달리고 눈 달리고 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왜 못합니까?

그리고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그 상상력, 감수성으로 마음대로 다 행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그럼, 보이지 않는 데서 그렇게 뛸 수 있다고 하는데, 뭣 때문에 마음으로 그렇게 뛰나 하시겠지만 급해 보세요, 여기서 천 리는 못 뛰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도리를 안다면 천 리도 마다 안 하고 만 리도 마다 안 하고 뛸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바로 심성(心性), 무(無)의 축지법이죠, 알기 쉽게 말하자면. 그래서 어디를 가도 자기가 그냥 보살행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어디를 가다가 남이 죽은 데 가서 영계성과 만났을 때 바로 거기다가 놓고 관하세요. 지금 그거를 다 아는 사람들은 관하고 이럴 필요도 없죠. 그대로 보는 순간이죠. 하지만 배우는 사람들은 관하고 그것을 그렇지 않게끔 하면 그 영가는 바로 화해요. 좋은 마음으로 화해서 천도가 되고 그 아픈 사람은 그냥 일어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내 마음을 항상 보살행이 되도록 해야 하는 거죠. 각양각색의 어떠한 모습이라도 내가 그 모습으로 되는 율이 많지, 그 모습이 내 모습으로 들어오는 율은 아주 드문 일이죠. 내가 주는 것이 많지 받는 것은 드물다 이런 뜻이죠.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한테로 들어오는 것은 보살이 거반 다 된 사람들이 그 도리를 알고 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그 도리를 몰라서 나한테 들일 수가 없죠. 그래서 내가 그쪽으로 같이 해 주죠. 그래서 화해서 차원에 따라서 진화되게 하고 말이에요. 여러분이 모르는 얘기를 하니까 아리송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좀 알아듣는 사람도 있겠죠.

참 이 얘기는 상당히 어려운 얘깁니다. 여러분을 그렇게 뒤바꿔 놓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참 힘들어요. 무지 힘드는 것이, 무슨 과학적으로 이걸 증명해서 ‘야, 마음이 여기 있다. 이게 이거다.’ 이러고 해 줄 수가 있나, 또 어디가 참 괴롭다거나 아주 쓰라리다고 할 때에 ‘네 마음을 내놔 봐라. 그럼 내가 쓰라리지 않게 해 줄게.’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건데, 이거는 물체가 없는 마음이고 물체가 없는, 바로 근본이거든요. 그래서 “옛 인연을 새로 이어서 가는…,” 하고 아까도 청법가를 불렀지 않습니까. 그런 거와 같이 마음이라는 거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 가는 거예요. 심어서 먹고 또 심어서 먹고, 또 심어서 먹고 또 심어서 먹고 이렇게 해서 그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그냥 그렇게 되듯이. 그러면 어떤 사람이 또 씨앗을 잘 심어서 더 좋은 씨앗으로 만들어서 또 심어서 먹기도 하고 이렇게 하죠. 그렇듯이 우리 사람도 ‘난 업보가 많아서 이래.’ 이러면 업보가 많은 것이고 ‘난 업보고 뭐고 없다. 내가 없는데 뭐가 있으랴. 내가 공했는데 뭐가 있으랴.’ 하면 업보가 붙을 리가 없죠.

그리고 공한 이유는 항상 얘기해 드리죠. 고정됨이 없다. 고정되게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말하는 것도 없고, 만나는 것도 없고, 움죽거리는 것도 없다. 그거를 알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아버지가 되고, 때로는 형이 되고, 때로는 할아버지도 되고, 때로는 동생도 되고 남편도 되고 그러는데, 어떤 거 됐을 때 나라고 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됐을 때 내가 나라고 할 수 있나, 남편이 됐을 때 나라고 할 수가 있나, 또 형이 됐을 때 나라고 할 수 있나, 아들이 됐을 때 나라고 할 수가 있나? 나라고 할 수가 없죠, 모든 게 다!

그와 같이 고정된 게 없다는 얘기죠. 고정된 게 없이 찰나찰나 바뀌면서 “여보!” 하면 남편이 되고, 또 금방 “아버지!” 그러면 아버지가 되는 거죠, 그냥. 그대로 그냥, 누가 해라 말아라 할 것도 없어요. 그게 자유예요. 자유스럽게 아버지 노릇 하고, 자유스럽게 남편 노릇 하고, 또 자유스럽게 아들 노릇 하고 이러는 거죠. 이게 지혜롭게 이해가 산뜻산뜻 가야 됩니다. 그런데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한 게 없다’ 이렇게 나옵니다.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함이 없이 한다’ 이런 뜻이죠, 함이 없이 한다. 때로는 아버지가 돼서 아버지 노릇만 한다면 ‘내가 아버지다’ 이렇게 하겠지만, 이거는 매사 것이 다 바뀌니까. 바뀌는데 뭐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두 한데 합쳐서 더불어 ‘함이 없이 내 인생을 산다’ 이렇게 할 수 있겠죠. 함이 없이 인생을 살고 있다. 함이 없이 사는데 업보가 거기 붙을 리가 없죠. 함이 없이 사는 공한 이 시자일 뿐인데, 공한 모습일 뿐인데 말입니다. 공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업보가 붙을 리가 없죠. 업력이 주둔하고 있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잘한 것도 없고 못한 것도 없다는 얘기예요. 잘한 것도 없고 못한 것도 없는 그 가운데서 자기가 그대로 생각하고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게 법이다 이런 소리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유의 법을 가르치고 무의 법을 가르치고 그 가운데 법화경을 설했다 이런 뜻이에요.

이 모두를 그렇게 일일이, 말씀해 놓으신 대로 따져서 말을 한다면, 요거는 요거고 저거는 저거고, 요거는 어떻게 심어서 요렇게 해 먹고, 저거는 어떻게 심어서 이렇게 해 먹고, 어떤 거는 물을 줘야 하고 어떤 거는 물을 주지 말아야 되는 거고…, 이렇게 한다면 천년 만년이 가도 나를 뛰어넘진 못해요. 그러니까 내 몸뚱이 하나 속에도 더불어 같이 사는 생명들이 꽉 차 있으니까 ‘내가 어떤 거라고 말을 할 수 없다. 내가 먹어도 내가 먹었단 말을 못 한다. 내가 했어도 함이 없다.’ 이렇게 생각이 안 드십니까? 함이 없이 했는데 내가 업보가 될 리가 없죠.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이 인간의 두뇌라는 것은 쉴 사이도 없고 끊임없이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여북하면 금강 석수봉이라고 그랬겠습니까? 그렇게도 말할 수 있죠. 그래서 부처님 머리 위에 이렇게 봉이 돼 있죠? 그게 금강 같은 석수봉이에요. 그러니까 얼른 쉽게 지금 말로 한다면, 아주 자동적이고 영원한 컴퓨터에 입력이 되는 거니까, 거기다가, 입력된 데다가 다시 입력을 하면 모든 게 소멸된다 이 소립니다. 알기 쉽게 말을 한다고는 하는데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여직껏 말한 것을 한데 합쳐서 자동적이고 영원한 컴퓨터라고 하면 되죠.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앞서 입력된 근거가 있기 때문에 나오는 거거든요. 근거 없이 나오는 건 하나도 없어요. 그래 근거가 있어서 나왔으니까 나온 자리에다가 관해서, 입력을 해서 그 근거를 말살시키면 그게 소멸되죠. 하나하나 소멸시키다 보면 전체가 다 소멸이 돼요. 그러면 그때는 자유스러워지죠. 점차적으로 자유스러워집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천차만별의 차원이 있기 때문에 차이가 있어요. 그릇들을 보세요. 종지가 있고 접시가 있고 사발이 있고 대접이 있고 큰 다라이가 있고 이렇죠, 모두가. 그거와 같아요, 사람의 차원도. 그래서 얼른 그것을 납득하고 가는 분이 있는가 하면, 똑같이 들었는데도 똑같이 납득을 못하고 중간쯤 가는 분이 있고, 또 아주 맹문이로 가는 분이 있고 그래요. 그게 업보로 인해서 그렇죠. 우리가 이날까지 수억겁을 살아오면서 쌓아 온 그 습 말입니다. 잡아먹고 잡아먹히고 그렇게 살던 습 말입니다. 그 습이 어떻게 금방 그렇게 없어지겠습니까마는 그 쌓이고 쌓인 습이 녹아지려면….

내가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당나귀를 얼마나 때리면서 부렸는지, 죽어서 당나귀는 남편이 되고 때린 주인은 바로 부인이 돼 가지고, 항시 업보가 입력이 된 그대로 나오기 때문에, 노상 때리거든요. 그래서 부인이 못 견뎌서, 지나가는 스님의 바지 자락을 쥐고선 그냥 살려 달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당신이 당나귀를 부릴 때 너무 때려서 그 대신 맞는 건데 뭘 그러냐.” 그러더라는 거죠.

그래도 살려 달라고, 이젠 다시 그러지 않겠노라고 하니까 “그러면 돗자리를 도르르르 말아서 꼭꼭 묶어 가지고 당신을 때리기 쉬운 자리에다가 놓아두어서 그걸로 때리게 해라. 돗자리의 엮어진 줄기 수효대로 때린 게 없어져야 되는 거니까.” 그래서 돗자리를 똘똘 말아서 놔두고 있으니까 한 사나흘 그걸로 때리더니 한참 자고 일어나서 “당신을 왜 내가 때렸지?” 이러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에누리가 요만큼도 없다는 얘기죠. 에누리가 없는 대신에 여러분의 마음이 지혜로우면 에누리가 없고 말고 간에 그냥그냥 소멸된다 이거죠. 이 소멸되는 공부는 나오는 데다가 되놓는 이 공부밖엔 없어요. 이 공부는 부처님 당시부터 이렇게 가르치셨는데 지나오면서 너무 해이해진 것이죠. 학으로만 공부하는 분들, 이론으로만 공부하는 분들은 아는 건 많지만 아주 극한 마음을 낸 그 업장이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업장대로, 습관대로 그냥 막 튀어나와서 싸움들을 하고 그러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몸통 안에서, 네 자체 근본, 네 마음이 벗어나야 네 몸을 자유스럽게 다스리고 맘대로 굴릴 수가 있느니라.” 즉, 몸이 통이죠. “네 마음이 네 몸속에서 아주 꼭 잡혀서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다면 네 몸을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굴릴 수가 없느니라.” 지금 여러분이 회사에 다니고 장사도 하고 뭐, 여러 가지 모두 하시겠죠. 그런데 몸 바깥으로 내가 벗어나서 내 몸을 굴릴 줄 안다면 그건 뭐, 모든 것으로부터 거침없이 빠져나올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게끔 다 분리시킬 수도 있고 그래요. 정신계에서 보이지 않게 나오는 거는 그 정신계에서 대책을 세우고, 보이는 데선 아주 부드러운 마음으로 의리와 도의를 지키면서 말을 지혜롭게 해 나가면 그대로죠, 뭐.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모두 이렇게 복잡해지는 거는 마음을 등한시했기 때문입니다. 정신계를 무시했기 때문이죠. 지금 어느 학교에서도 물질계와 정신계를 한데 합쳐서 공부를 가르치지 않아요. 그래 가지고야 어떻게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지금은 그렇게 안 하지만 전에는 한번 그렇게 해 보기도 했어요. 그게 스스로 돼야죠. 억지로는 안 돼요. 습이 다 녹고 업력이 다 소멸되면 스스로 내가 나를 이익하게 생각하는 법이 없어요. 없어져요. 모두가 나 아님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무리 고생해도, 붙들려서 맞아도 나는 그 사람 탓을 안 했으니까요. ‘아! 나를 부딪히게 해서 단련시키느라고 그러는구나.’ 하고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니까. ‘죄 없이 맞은 거는 빨리 낫는다’ 하는 속담도 있죠. 그렇듯이 금방 괜찮아지고 그래요.

그것을 말로는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여러분한테 그 말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는 본인들이나 아는 거지 제삼자가 다 알 수는 없는 겁니다. 어쩌다가 한마디 이렇게 말하는 거지, 그걸 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말은 “남을 먼저 생각해라.” 이렇게 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은 드뭅니다. 공을 치면 튀어 온다고 그러죠. 분명코 치면 튀어 오는 건데도 불구하고 욕을 막 해 댄단 말입니다. 욕을 해 대면 그 욕한 것이 나한테까지 튀어 오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어느 회사에서, 또 학교에서도 그렇고 어떠한 문제가 있으면 그저 그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면서 ‘둘이 아닌데 저 사람에게도 마음의 불이 들어오게 해서 그러지 않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관하라고 그러죠.

그러면 사람의 마음이 백팔십도로 달라져요. 그렇게 해서 하나하나 고쳐 나가는 거지 어떻게 그걸 다 고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고치면 누가 좋으냐 하면 자기가 좋거든요, 편리하고. 앙숙으로 지내다가도 편해지거든요. 부모자식지간에도 그렇고 형제지간에도 그렇고, 부부지간에도 그렇고, 그냥 의리가 나빠서 싸우고 하는 것이 다 마음 싸움이거든요. 그 업보로 인해서 모든 게 쌓이고 쌓여서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만났던 과거의 인연들이 또 이 세상에 나와서 다시 만나서 앙숙이 돼 가지고 그렇게 하거든요.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8년 12월 6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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