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명상은 힐링과 레저 뛰넘는 수행

선원에서 불교명상을 하는 불자들의 모습. 성찰의 의미에 집중하는 것이 본질이다.

 

우리사회에 명상 열풍이 불고 있다. 종교적 수행이 본질이었던 명상이 이제는 거리감 없이 접할 수 있는 일상적 활동이 된 듯하다. 이제는 누구라도 어디에서든 관심만 가지면 쉽게 명상에 대하여 알아볼 수 있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열풍은 종교적 수행 차원의 명상이 아니라 현대인의 지친 삶을 치유하는 차원에서 일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명상의 역사가 종교의 수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현재의 명상 열풍을 불교수행의 사회적 확산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우리사회의 명상 열풍 속에는 깨달음을 향한 불교수행 차원의 명상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 유행하는 명상들은 대체로 스트레스 해소 등의 힐링(healing) 혹은 여가 생활 등의 레저(leisure)를 위하여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심리학 주도 명상치료 조류
불교계가 휩쓸려 동조해선 안 돼
수행·성찰로서 명상 의미 살려야

명상은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깨달음이라는 불교적 목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이외의 힐링과 레저를 목적으로 하는 명상도 분명 명상이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에서는 사회적으로 다양한 명상이 확산될수록 불교의 명상 즉 불교명상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한다. 불교수행으로서의 명상과 힐링 및 레저로서의 명상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종교는 분명 힐링과 레저와는 구별되는 사회영역이며 그 사회적 기능 또한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마크 앱스타인(Mark Epstein)은 “불교명상의 영역에는 정신치료를 넘어 무언가가 존재하는데, 보통의 정신치료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기 이해의 머나먼 지평을 향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불교명상이 힐링과 치유보다 존재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지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불교명상이 레저보다도 존재의 근원적 문제 해결을 지향하고 있음도 물론이다.

이 대목은 여타의 명상과 달리 불교명상은 지향점이 다름을 시사한다. 여타의 명상이 힐링과 레저를 추구하더라도 불교명상은 그 보다는 원천적인 다른 무언가를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불교명상은 불교수행법이기 때문이다. 불교명상은 힐링과 레저가 아닌 어디까지나 종교로서 불교의 수행법 중 하나인 것이다. 즉 절, 염불, 주력, 사경 등 여타의 불교수행법과 마찬가지로 북방불교의 간화선과 묵조선,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티벳불교의 여러 명상법 등의 불교명상도 본래 불교의 궁극인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불교수행으로서 불교명상은 상품화를 위하여 변형된 유사한 명상과는 구분해 생각하여야 한다. 대부분의 상품화된 명상들은 힐링과 레저에 따른 반대급부 즉 비용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들 명상들은 수익을 위하여 불교명상을 변용하거나 심하게는 왜곡하기 때문이다. 불교명상을 상품화한 명상들은 엄밀히 말하면 불교명상이 아닌 불교 모방 명상이다.

불교명상의 과정에서 힐링 효과도 생긴다. 불교명상이 힐링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는 국내외에 차고 넘친다. 또한 불교의 깨달음이 중생고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기에 그러한 힐링 효과는 불교명상뿐만 아니라 여타의 다른 불교수행법에서도 생긴다. 그리고 여타의 불교수행법으로 인한 힐링 효과를 검증한 연구결과도 상당수 존재한다.

하지만 불교명상과 불교수행이 힐링 효과가 있다고 해서 그 궁극적 목적이 힐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레저의 목적으로 참선을 할지라도 레저가 불교명상의 궁극적 목적은 될 수 없다. 힐링과 레저는 불교명상의 부수적 목적은 될 수 있으나 궁극적 목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명상은 서구심리학이 주도하는 명상치료에 무작정 동조해서는 안 된다. 심리치료학자들은 통계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치료 효과에만 관심을 갖는 듯하다. 물론 현대적 방식으로 명상을 활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현재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불교명상이 삶의 근원적인 문제 해결에 주력해왔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선 불교명상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지 되새겨야 한다. 불교명상은 비단 신경증 환자만이 아니라 정상적인 보통의 일반인들을 상대로 해왔다. 즉 인간이 지니는 보편적인 괴로움의 종식에 주목해왔다. 이는 불교명상이 불교수행법임을 단적으로 정의해준다. 붓다 이래 불교의 수행은 인간의 괴로움을 해소하고자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불교명상이 불교수행법의 하나라고 규정하는 것은 틀린 말이 절대 아니다.

불교명상은 여타의 명상과 달리 종교적 정체성을 담보하여야 한다. 불교명상은 본래 불교의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명상이 힐링과 레저 그 이상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종교로서 불교는 타력이 아닌 자력신앙이다. 신에게 의지하여 구원을 받는 종교가 아니라 자신이 붓다가 되어 일체의 고(苦, dukkha)가 제거된 열반에 도달하는 종교이다.

불교명상은 불교의 수행법이기에 불교명상의 궁극적 목적은 불교수행과 동일하거나 벗어나지 않는다.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심신 치유의 힐링도 아니고, 여가 활동의 레저도 아니고, 이 둘을 포함한 현실적 욕망의 충족 방법도 아니다. 불교수행의 궁극의 목적은 ‘본래 부처’됨이다. 그렇기에 불교명상의 궁극적 목적은 ‘본래 부처’로서의 면목을 깨우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수행법이 되는 것이다.

만일 불교명상이 힐링이나 레저 같은 세속적 욕구 충족의 목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종교로서 불교적 정체성을 담보했다고 할 수 없다. 불교명상의 궁극적 목적은 불교수행,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고타마 싯다르타가 수행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생로병사의 고로부터 벗어나고자 수행하였으며, 그 결과 붓다가 되었다. 이것이 불교명상이 갖는 종교적 정체성이다. ‘스스로 붓다됨’은 그 누구에게라도 달성이 매우 어려운 목적이다. 그러나 종교적 목적의 달성이 지난(至難)하다고 하여서 그것을 현세적 목적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붓다됨’이라는 종교적 목적의 도달이 어렵다고 하여서, 애초부터 불교명상을 힐링과 레저 등 현세적 욕망의 성취 수단으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순간 불교명상의 궁극 목적은 종교적 목적인 성(聖)스러운 것에서 세간적 목적인 속(俗)스러운 것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에 불교명상은 현세적 가치의 현실적 수용이 아닌 종교로서 불교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힐링과 레저 또는 사찰의 신도와 재정 확보 등과 같은 전도몽상(顚倒夢想)에 근거해 있는 자의식을 깨뜨리고 ‘본래 부처’로서의 진면목을 바르게 회복하는데 불교명상의 목적을 두어야 한다. 모든 사물을 바르지 못하고 거꾸로 보고, 헛된 꿈을 꾸면서도 그것이 꿈인 줄 모르고 현실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스스로 붓다’ 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불교수행으로서 불교명상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교명상을 한다는 것이 현실적 자아관에 기초한 자질구레한 욕망과 인위적 성취에 대한 몽상을 해체하는 과정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명상과 여타의 명상은 어떻게 변별할 것인가? 불교명상과 여타의 명상을 가름 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무아(無我)와 유아(有我)의 차이다. 힐링과 레저로서의 명상은 유아를 위한 것이며, 불교수행으로서의 불교명상은 무아에 대한 지향이다.

무아(無我)는 만물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實我)가 없다는 뜻이다. 석가모니 이전의 인도사상에서는 상주(常住)하는 유일의 주재자로서 참된 나인 아트만(Ætman)을 주장하였으나, 석가모니는 아트만이 결코 실체적인 나(我)가 아니며, 그러한 나는 없다고 설하였다. 그런데 여타의 명상들은 대체로 우주의 근본원리인 범(梵, brahman)과 개인의 본체인 아(我, Ætman)가 같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여타 명상들의 요지는 자신의 주관적 정체를 파악하되 자신을 둘러싼 세계, 자연 등 모든 것이 자신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긴밀히 연관되어있음을 함께 파악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관의 근저에는 제 아무리 다른 용어로 표현한다 해도 그 본질에는 실체로서의 나(我)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상들, 특히 상품화된 명상들이 무상한 실체인 나의 행복을 위한 힐링과 레저로써 이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불교명상과 여타 명상을 가름 짓는 점이다.

웰빙과 힐링 그리고 워라밸의 풍조에 힘입어 명상의 붐이 일어나는 것은 불교명상의 성장과 확산에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불교수행법으로서 불교명상의 정체성을 망각한 채 명상의 붐에 뛰어드는 것은 ‘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현재 사회적으로 일고 있는 명상 붐은 인간의 고통을 제거하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면에서는 불교명상과 동일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여타의 명상은 유아(有我)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무아(無我)를 전제로 하는 불교명상과는 다르다. 즉 여타의 명상이 현세를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의 행복에 집착함에 비하여, 불교명상은 나를 버림으로써 영구한 이고득락을 얻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명상이 양적으로 성장하고자 명상의 붐 속으로 정체성 없이 달려드는 것은 오히려 불교명상을 쇠퇴시키는 행동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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