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믿음(信) 편

우리는 평소 ‘믿는다’는 말을 많이 하면서 살고 있다. ‘나는 윤회를 믿어.’와 같은 종교적 믿음이 있는가 하면, ‘나는 한용운이 말한 님은 조국이라고 믿어.’와 같은 일상적 믿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 대해 이처럼 명확한 구분을 하면서 살지 않는다. 믿음이란 용어가 지니는 일반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를 구분하는 것은 종교와 과학, 신앙과 사실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 속에는 해석이나 주장, 혹은 예측이나 결론, 평가 등의 의미가 담겨있다. 예컨대 앞서 말한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의 님을 누군가는 부처님이라고 믿지만, 다른 누군가는 애인이나 조국이라고 믿는다. 모두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각자가 님에 대한 주장이나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어떤 평가나 결론을 내릴 때도 우리는 믿는다는 말을 한다.

이러한 믿음은 단순히 세계에 대한 평가나 해석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자신이 말한 것이 옳거나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자신이 옳다고 받아들이는 해석이나 예측, 결론,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옳다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정말 옳거나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믿음을 옳은 믿음, 잘못된 믿음, 불완전한 믿음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먼저 옳은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이나 평가가 옳다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예컨대 ‘나는 지구가 둥글다고 믿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지구가 둥글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에서 지구의 둥근 모습을 찍은 사진이 바로 명확한 증거다. 이처럼 강력한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옳은 믿음이다. 이러한 옳은 믿음을 앎(knowing), 혹은 지식이라고 한다.

이처럼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 즉 그것이 사실이거나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는 1+1=2라는 것을 알아.’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 명제가 옳기 때문이다. 물론 앞의 1과 뒤의 1이 완벽하게 동일한 조건일 때만 가능하다.

둘째로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 있다. 지구가 네모나다거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믿음들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나는 천동설을 믿어.’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나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을 알아.’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믿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을 앎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동설이 오늘날에는 상식이지만, 서구 중세사회에서는 기독교적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금지된 믿음이었다. 그들은 믿은 것이지, 결코 안 것이 아니다.

아직도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오류다. 이는 마치 ‘사과 맛이 파랗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민주의 반대는 독재이며, 공산주의의 반대는 자본주의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은 왜곡된 믿음일 뿐 옳은 믿음, 즉 앎이라고 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믿을 수는 있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불완전한 믿음도 있다. 예컨대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믿음은 완전하지 않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생명체가 외계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까지 정확하지 않은 믿음일 뿐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을 뒷받침할만한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믿고 있는 것이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믿음을 옳은 믿음과 잘못된 믿음, 불완전한 믿음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잘못된 믿음을 사실이나 앎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내가 믿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한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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