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정불심(多情佛心)

정(情)이 많은 다정한 부처님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을 가리켜 “저 사람은 정이 많다” 혹은 “저 남자는 다정다감해”라고 한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리켜서 정(情)이 많은 민족이라고도 한다.

다정(多情)하다는 것은 주거 문화적으로 공동체문화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주거문화는 부모가 결혼한 자녀와 함께 사는 ‘확대가족’ ‘대가족문화’였다. 한 집에서 자식, 손자와 함께 사는 3세대 공동문화였다. 농경사회의 특성상 인원이 많아야 했고 가족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산업사회 이후 핵가족사회가 되면서 지금은 칸칸이 담을 쌓고 문을 닫고 사는 아파트 문화,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는 초핵가족시대이다.

산업화는 대가족문화를 해체시키고 핵가족문화를 탄생시켰다. 농경사회에서 인간생활의 기초 단위였던 대가족제도는 산업화의 추세에 따라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산업화의 새로운 변화는 가치관에도 큰 혼란을 가져다주었는데, 그것이 경쟁·개인주의·이기주의 소외·낙오·고독 ·외로움·그리움 등이다.

고독·외로움은 현대 산업사회의 병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불치병이 되기도 한다. 의학이 총알처럼 발달하고 신약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아직 여기에 대한 특효약은 없는 것 같다.

‘다정(多情)’은 곧 부처님의 대자대비, 무연자비(無緣慈悲), 애민(哀愍)중생이다. 자비심은 개인주의·이기주의를 해체시키고, 이웃과 공동체를 이루고 고독과 외로움을 와해시킨다.

‘다정불심’은 부처님의 여러 일화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부처님 10대 제자 중 한 분인 천안제일 아니룻다(아나율) 존자와 부처님과의 일화를 통해 다정불심의 전형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아니룻다 존자가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도중에 깜빡 졸아서 부처님께 호된 질책을 받았다. 이에 크게 각성한 아누룻다 존자는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제자의 건강을 걱정하시며, 잠을 자며 수행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아누룻다 존자는 계속 밤잠을 자지 않고 수행했다. 아누룻다 존자는 결국 눈이 멀었지만 마음의 눈이 열렸다. 그 후 천안제일(天眼第一)로 칭송받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부처님 당시에는 수행자들 스스로 탁발이며 의복을 수선하는 등 모든 일을 손수 해야 했다. 하루는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했던 아니룻다 존자가 바느질을 하다가 “누가 내 옷을 바느질해 주는 공덕을 쌓아 주겠는가?”라고 말하여 도움을 청했다. 그때 그 소리를 듣자마자 누군가 바느질을 해 주었는데 그분이 부처님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니룻다 존자가 황송해 하며 “양족존이신 부처님께서 지으실 공덕이 더 있습니까?”라고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서 나보다 더 복 짓는 데 욕심이 많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또 불교에는 자비, 다정(多情)의 화신인 관세음보살님이 있다. 관음보살은 자그마치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천수천안)을 갖고 있다. 비록 표현은 천 개라고 했지만 천만 억 개로 변신한다. 관음보살님은 빅데이터 같은 용량으로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 고독, 슬픔 등을 일견(一見)에 포착한다. 게다가 지옥중생을 모두 건지기 전에는 절대 성불하지 않겠다고 지옥문 앞에서 버티고 있는 1인 시위자 지장보살님도 있다.

태어나면서 천성적으로 다정다감한 사람이 있고, 좀 쌀쌀한 사람, 차가운 사람이 있다. 차가운 사람보다 다정다감한 사람이 행복하다. 친구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고 좋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주변사람들이 대부분 우군이 되고 힘이 되어주니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삭막한 오늘의 한국사회, 이기주의로 너나할 것 없이 파편화되고, 상처투성이가 되기 십상이다. 양보와 배려는 곧 인격이고 인간사회를 맑고 따뜻하게 만든다. 그것이 곧 다정불심(多情佛心)이고, 대자대비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