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후 신경정신과 전문의(84ㆍ이화여대 명예교수)

이근후 박사는…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 박사는 1961년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1968년 전문의가 됐다. 연세대와 이화여대에서 신경정신과 교수이자 전문의로 재직하며 50여 년간 환자를 치료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1989년부터는 이화여대 의료봉사단 단장을 맡아 네팔 지역 의료봉사를 해왔다. 1995년부터는 (사)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해 청소년 성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2000년 불교상담개발원 초대 원장을 지내며 한국 불교상담의 향상을 이끌었다. 〈정신치료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등의 저서가 있다.

 

배움의 시간, 귀의의 시간
정신과 전문의 과정서 불교 접해
연구모임서 탄허·지관 스님과 공부
프로이드 정신분석·불교 일맥상통
“서양의 정신분석 이미 불교에,
의식·무의식 <유식>에 다 있어”
“정신적 질환은 마음이 겪는 갈등
정신치료, ‘나’ 찾는 과정”

 

인간의 고통, 즉 ‘병(病)’에는 육체의 병과 정신의 병이 있다. 흔히 ‘병’이라고 하면 육체의 병을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의 병 또한 인류에게는 힘겨운 고통이 된지 오래다. 문명의 발달로 인해 다양해지는 육체적 질환과 더불어 정신적 질환 역시 그 형태와 증상이 다양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다. 정신적 질환은 개개인의 증상이 그대로 ‘다양성’의 표본으로 이어진다. 개개인의 질환이 하나의 병명이고 사례인 것이다. 때문에 처방 역시 정해진 처방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정신적 질환, 즉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을까.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근후 박사는 이미 불교에 답이 있었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말씀이 ‘상담사례’라고 말하는 이 박사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처방전을 써왔다. 평생 대중의 아픈 마음을 불법(佛法)으로 고치며 살아온 정신과 전문의, 이 박사의 만다라다.

‘이 뭣고?’=‘Who am I?’
이 박사는 불심 깊은 어머니 곁에서 컸다. 하지만 그에게 불교는 자신을 위한 신앙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교에 다가간 것은 ‘인간적인 삶’을 위한 것으로, 그에게 불교는 추구해야 할 학문이고 사상이었다.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위한 평생의 공부였다.

“정신과 치료는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루는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마음공부죠. 서양에서 프로이드의 시대가 열리면서 무의식의 세계가 조명되기 시작하고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적 시대가 열렸죠. 그런데 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라는 이론은 이미 불교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죠. 결국 불교에 다 있다는 것이죠. 일례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는 이미 〈유식〉이 훨씬 더 깊고 넓게 이야기하고 있죠.”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 아니 불교공부를 시작한 것은 정신과 전문의(1968년)로서 많은 환자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같은 정신과 전문의들과 모여 공부하던 중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불교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니 불교에 이미 있었던 ‘설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이 박사가 속한 스터디 그룹은 탄허 스님, 지관 스님 등을 초청해 많은 토론과 공부를 했다. 의사들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을 이야기하면 스님은 그 사례와 답을 경전에서 찾아주었다.

“정신적인 질환은 마음이 겪는 ‘갈등’이죠. 그 갈등이 깊어져 삶 전체를 그 갈등이 지배하게 될 때 인간의 삶은 힘겨워지고 결국 ‘병’이 되는 것이죠. 그 ‘갈등’이라는 것은 ‘나’를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Who am I?’인 것이죠. 정신 치료에는 크게 두 가지 치료법이 있는데, 하나는 ‘지지(support)치료’이고, 또 하나는 ‘통찰치료’입니다. 지지치료는 무의식의 세계를 다루지 않으면서 보이는 현상만으로 치료하는 것이고, 통찰치료는 근원을 찾아가게 함으로써 자기습관을 고치고 생각을 고쳐서 깨달음으로 가게 하는 치료법입니다. 결국 정신적 어려움을 치료하는 것은 환자로 하여금 ‘나’를 찾게 해주는 것이고, 환자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죠.”

이 박사의 환자 중에 자신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환자가 있었다. 하지만 이 박사가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오랜 기간 입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사와 환자의 생각이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그 환자는 회진 때마다 이 박사에게 물었다. “저는 언제 퇴원할 수 있나요?” 이 박사는 그 때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환자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어느 날도 그 환자는 이 박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 박사는 더 이상 환자를 설득할 만한 구실을 찾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박사는 아무런 말을 못한 채 한 동안 천장만 바라보다 병실을 나왔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그 환자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들더랍니다. 제가 자기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답니다. 더 이상 자신을 들여다 봐줄 사람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더랍니다. 정신을 차린 것이죠. 정신과 치료는 바로 그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깨닫는 일이죠.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를 찾아가는 것’인 것이죠.”

나를 찾아가는 과정. 그야말로 어디서 많이 들었던, 늘 듣고 있는 이야기 아닌가. 바로 ‘불교’다. 이 박사는 ‘Who am I?’는 ‘이 뭣고?’와 같다고 했다. 자기 자신을 찾고 또 찾아가는 과정, 즉 ‘나’라는 화두를 놓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깨달음의 차이는 있지만 그 과정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박사는 환자를 치료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대기설법이다.

“부처님의 설법(경전)이 대단한 것은 대중의 근기를 생각해 설법했다는 것이죠. 그 대목이 정신과 치료를 하는 제게는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매우 힘겨운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죠. 결국 정신적으로 연약한, 불안한, 한 마디로 근기가 약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죠. 정신과 치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환자 각자가 하나의 병명이고 사례이기 때문에 각자에게 맡는 처방전을 써야 하는 것이죠.”

1989년 이화여대 의료봉사단 티벳 의료봉사 기념사진. 왼쪽 첫 번째 이근후 단장.
1995년 이화여대의료봉사단 티벳의료봉사.

 

봉사와 나눔의 시간
1989년 이화여대의료봉사단 창립
매년 네팔 지역 의료봉사
봉사단체 가족아카데미아 설립
청소년 상담, 생애 준비 등 활동
불교상담개발원 초대 원장 역임
‘산사에서 ~ 상담워크숍’ 진행
불교상담의 질적 향상 이끌어
한국 석불서 한국인 마음 연구

 

봉사로 이어지는 佛法
모두에 언급한 대로 이 박사의 ‘불교’는 자신을 닦는 수행의 방편이나 복을 쌓기 위한 기복의 신앙이 아니다. 하지만 ‘불교적 삶’이라는 그의 삶의 형태는 결과론적으로 불교를 귀의처로 삼은 여느 선남자와 다르지 않다. 마음속에 받아들인 불교가 어떤 형태의 것이든 부처님의 말씀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걷는 자의 삶이라면 그 빛깔은 분명 같은 빛깔인 것이다. 그의 불교도 마찬가지였다. 부처님이 가르쳐준 대로 길을 가고 있었다.

“네팔 가자! 가서 멀리 서있는 산 한 번 쳐다보고 돌아오면 뭐라도 달라진다. 우리도 달라지고 그들도 달라지고, 그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나?”

이 박사는 1989년부터 이화여대 네팔 의료봉사단을 만들어 해외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대학 단위의 해외 의료봉사는 국내에서 처음이었다.

이미 3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네팔지역 의료봉사를 해오고 있었던 이 박사였다. 당시는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학생들의 ‘농활(농촌활동)’이 여의치 않았다. 학생들은 가고 싶고 학교 측은 마음 놓고 보내줄 수 없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 박사는 그 고민을 해외봉사로 돌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박사의 해외 의료봉사가 단순히 농활의 대체 차원만은 아니었다. 등산을 좋아했던 이 박사가 오래 전부터 네팔을 오가며 쌓은 인연과 느낀 것들이 그를 다시 더 큰 인연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박사의 봉사에 관심은 1982년 네팔에서 시작됐다. 그는 1982년 한국산악회가 조직한 마칼루학술원정대 대원으로 참여했다가 쿰중에서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오른 힐러리경을 만났다. 힐러리경은 사비를 털어 오지 주민들을 위한 학교를 짓고, 네팔 산림의 황폐화를 막는 자연보호운동에도 앞장서고 있었다. 이 박사는 그런 힐러리경으로부터 많은 감동을 받았다.

“힐러리경의 삶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느꼈어요.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죠. 그리고 부처님 법에서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의 삶을 결코 다른 삶이라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눈에 보이는 오늘만이 나의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그들의 삶 속에 나의 삶도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조금은 힘겹게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내가 거쳐 온 삶이었을 수도 있고, 또 언젠가 내가 거쳐야 할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박사는 다소 힘겹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네팔 사람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것들을 보게 됐다. 물질적으로 다른 지역의 삶과 비교가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이지만 행복의 지수가 물질과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의료’였다. 이 박사는 1989년부터 네팔 의료봉사를 시작해 20년 넘게 매년 네팔의 오지 마을과 수도 카트만두를 중심으로 의료봉사를 해왔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물질적으로는 네팔 사람들보다 우리가 좀 더 풍요롭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행복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료봉사를 하는 동안 알게 됐어요. 우리가 그들보다 행복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 풍족한 물질로 인해 벌어지는 정신적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죠. 제가 의료봉사를 하면서 그들에게 느낀 것은 그들이 우리보다 불행하다고 할 수 없고, 우리가 그들보다 꼭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듯한 오늘의 삶을 생각하면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박사의 이타적인 생각과 삶은 국내에서도 이어진다. 이 박사는 40년 넘게 자신이 이사로 있는 광명보육원을 돕고 있다. 인연은 그의 모친으로부터 시작됐다. 불심이 깊었던 이 박사의 모친은 6.25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난 온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봤다. 이 박사가 네팔 사람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하는 것과 같은 인연이다.

이 박사는 군의관으로 재직하던 1967년, 근무지인 서울 창동 부근에 광명보육원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때부터 보육원을 도왔다. 이 박사는 1995년 보육원에 3층짜리 건물을 기증했다. 그리고 ‘무하문화사랑방’을 열어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무하문화사랑방에서는 시인과 화가 등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아이들에게 예술 체험 교육을 하고 있다.

“예전 보육원에는 그야말로 부모가 없어서 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죠. 하지만 요즘 보육원에는 부모로부터 버림 받아 오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부모가 없고 갈 곳이 없어 왔던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그리움을 보았다면,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온 아이들의 마음속에서는 적개심을 보았어요. 그 아이들의 ‘이 뭣고’는 바로 그 적개심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적개심을 해결하고 스스로 ‘Who am I?’를 마음에 들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정신과 전문의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죠.”

이 박사는 그 아이들의 ‘이 뭣고’를 풀어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마음 자리를 볼 수 있게 해주고, 그 자리로 돌아가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의 감성에 다가가기 위해 예술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이 박사는 2004년부터 네팔 작가들을 초청해 전시회, 공연 등을 열었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시를 올리는 등 청소년 멘토링에 힘을 쏟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시각각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이기들로 인해 문명은 빛의 속도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진화의 이면에는 어두운 결과들도 새롭게 드러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일 걱정해야 하는 것이 점점 사라져가는 ‘인간성’의 문제입니다. 인간성의 회복이야말로 빛의 속도로 진화하는 문명의 속도만큼 빛의 속도로 회복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시작은 바로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성의 실종이라는 문제를 들여다볼 때 첫 번째로 회복해야 하는 것이 ‘가족’의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가족’이라는 형태는 예전의 ‘가족’과 많아 다릅니다. 아니 점점 없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달라진 가족의 모습이 현 사회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성이 시작되고 키워지고 가꿔질 수 있는 곳은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박사는 1995년부터 사회봉사단체 (사)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공동 대표)해 광명보육원 등을 돕고 있다.

불교상담개발원 탄생의 초석
2000년 4월 22일 조계종 포교원은 불교상담개발원을 설립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담’이라는 방편으로 널리 펼쳐 모든 존재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나누어 세상을 밝히고, 대자대비를 실천하기 위해 설립됐다. 불교상담개발원은 1990년 개통된 (사)자비의 전화를 모태로 설립된 불교계 전문상담기관으로, 지금까지 어려운 이웃들의 심리적 아픔을 불교적 심리상담을 통해 치유하는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다.

주요 사업으로는 불교상담심리사 양성 및 자격관리를 위해 조계종 포교원 인가 2년제 불교상담대학과 대학원 운영, 불교상담심리사 2급 사이버 과정, 월례특강, 상담원 재교육 및 전문소양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산사에서 만나는 불교와 상담워크숍’, 불교상담 프로그램 개발 불교상담 교재 및 자료집 발간, 불교상담 학술상 제정 등 불교상담에 필요한 연구개발 진행과 사찰 상담실 지원 및 자문, 심성수련 프로그램 운영 및 불교상담 교육 강사 파견 등을 통한 현장 지원을 하고 있다. 불교자살예방센터와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자원봉사인증센터, (사)자비의 전화를 운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상담개발원의 연혁과 다양한 활동을 살펴보면 그 불사가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모두에도 언급했듯이 부처님의 경전은 ‘상담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중생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위대한 노력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불교상담개발원의 존재와 불사는 그야말로 부처님을 대신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불사의 초석이 초대 원장 이근후 박사다. 특히 ‘산사에서 만나는 불교와 상담워크숍’은 이 박사가 시작한 프로그램으로 불교상담의 질적 향상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이 박사는 상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불교 상담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한 주역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본래 불성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것과 부처님의 유언인 ‘자등명법등명’을 생각할 때, 불법(佛法)을 통한 상담은 불사 중의 불사다. 불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 박사는 1982년부터 전국의 석불을 찾아다니고 있다. 얼굴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다.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던 이 박사는 그 궁금함을 석불에서 찾고 있다. 이 박사는 특별히 개인적인 수행의 방편을 설정하고 있지 않다. 특별히 내세우는 신행생활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늘 부처님의 그림자가 보인다. 늘 불법(佛法)으로 대중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늘 그 마음속에 들어있는 아픔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정신과 전문의 이근후의 처방전은 부처님의 글씨로 채워진다. 그의 처방전은 설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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