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전 상서] 24. 정용익, 최성간의 편지
[초의 전 상서] 24. 정용익, 최성간의 편지
  •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8.12.2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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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마다 초의 그리는 절실함 담다
전라지역 유생이었던 정용익의 서간(사진 위)과 최성간의 서간(사진 아래). 행간마다 초의 선사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담겨있다.
전라지역 유생이었던 정용익의 서간(사진 위)과 최성간의 서간(사진 아래). 행간마다 초의 선사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이 담겨있다.

해남에 거주했던 선비로 추정되는 학천산인(學泉散人) 정용익(鄭龍翊)은 초의와 교유했던 인물이다. 그가 초의에게 편지를 보낸 해는 1845년 4월이다. 초의가 보낸 차를 받고 이에 대한 고마움과 안부를 편지에 담았다. 1844년 9월, 초의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고 하니 이들은 이미 알고 지낸 사이인 셈이다.

전라 유생 정용익·최성간 서간
“오래 못 봐 마음이 비루해져”
초의 선사 향한 존경심 느껴져

교류 시점·절기 등 상황 확인돼
옛 선인의 서간, 미세사의 보고

이번엔 두 편의 편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해남에 거주한 정용익의 편지를 살펴본 후에 같은 해 보낸 최성간의 편지를 살펴보겠다. 우선 학천산인 정용익의 편지를 살펴보자. 이 편지의 크기는 35.2×23cm이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래도록 초의 스님의 법을 만나지 못해 비루하고 인색함이 그 가운데서 싹이 텄습니다.
초여름인데 마음 쏠림이 더욱 간절합니다. 바로 작년 9월에 보낸 편지를 받고 삼가 스님의 수행이 맑고 정결하시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미 위로가 되고 또한 기쁩니다. 또한 선 수행에 대해 구전으로, 대강의 정도를 살펴보니 더욱 저는 흐뭇하고 기뻤습니다. 차품을 보내주셔서 이 차로, 병든 위를 깨우니 그 가운데에서 감명이 깊습니다. 저는 세상일 속에서 지내는 동안 (속진을) 씻을 계획이 없으니 거듭 묵은 병으로 늘 고통스러움을 어찌해야 할까요. 다만 돌아가는 인편으로 인해 잠시 이에 말씀드립니다. 나머지는 법식을 다 갖추지 못했습니다. 
1845년 4월 그믐날. 정용익 배상. 부채 한 자루. 학천산인

久不見草衣師範 鄙吝萌于中 麥凉槐薰 詹쒈政切 卽拜承昨年菊月出惠翰 謹審法履淸淨 旣慰且喜 且於來禪口傳 槪探多少 尤庸欣豁 惠饋茶品 用醒病胃 深感于中 記末 俗累彌中 洗滌無計 重以宿疾常苦 奈何 只因便歸 暫此替伸 餘不備狀式
乙巳 四月 晦日 鄭龍翊 拜上  扇子壹柄

초의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탓에 그의 마음이 비루해지고 인색해졌다는 것이다. 수행자의 삶과 속세의 삶은 그 목표가 다르다. 그러므로 청량한 수행자의 바람은 그에게 속진을 씻어내는 솔바람 소리 같은 것이리라.

그가 편지를 보낸 시점을 짐작할 수 있는 키워드는 맥랑(麥凉)과 괴훈(槐薰)이다. 맥랑(麥凉)은 보리나 밀이 익을 무렵을 말하며 괴훈(槐薰)은 홰나무 꽃이 피기 시작하는 여름을 말하니 이 편지는 초여름 무렵에 보낸 것이 분명하다.

특히 이 편지는 음력 4월 그믐날에 쓴 것으로, 당시 그는 초의가 보낸 차를 받았다. 음력 4월 그믐날을 양력으로 환산해 보면 대략 5월 말에서 6월 초순 즈음이다. 따라서 1845년경 초의는 입하(立夏, 양력 5월 5일)를 전후해 차를 만들었고, 대략 한 달 정도가 지난 이후에 그와 교유했던 선비들에게 차를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1837년 여름에 저술한 그의 ‘동다송(東茶頌)’에도 입하 후에 차를 따는 것이 가장 좋다는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다서에 이르기를 차를 따는 시기는 차를 따는 적기에 맞춰 따는 것이 중요하다. (차를 따는 시기가)너무 이르면 향이 온전하지 않고 너무 늦으면 차의 색향기미(色香氣味)가 흩어진다. 곡우 전 5일이 가장 좋고 후 5일이 그 다음이며 후 5일이 또 그 다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차를 경험해 보니 곡우 전후는 너무 빠르니 마땅히 입하를 지난 후에 따는 것이 그때(차 따는 시점)가 알맞다.

茶書云 採茶之候貴及時 太早則香不全 遲則神散 以穀雨前五日 爲上 後五日 次之 後五日又次之 然 驗之東茶 穀雨前後太早 當以立夏後爲及其時也

윗글에서 그가 말한 다서(茶書)는 장원(張源)의 〈다록(茶錄)>이라 여겨진다. 한국과 중국의 기후는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곡우 전후에 차를 따면 너무 이르기 때문에 차의 향이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물론 초의가 살았던 조선 후기와 지금의 기온은 조금 차이가 날 수 있다. 만약 차의 산지가 깊은 산 속이라면 초의가 말한 것처럼 입하 전후에 차를 따는 것이 좋다. 보성, 지리산 일원, 제주에서는 곡우 전에 차를 따는 것이 좋은 지역도 있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 변화는 차를 따는 시점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아무튼 정용익의 편지는 초의차의 채다(採茶) 시점이 입하 후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같은 해 4월 27일에 최성간(崔性侃)이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 최성간은 순조 31년(1831) 식년시에 합격한 최성선(崔性善 1808~?)의 아우이다. 그가 “1842년 겨울, 서로 친함이 마치 오랫동안 사귄 것 같아 함께 자며 나눈 정의(情誼)가 평범하지 않은 듯했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초의를 만난 것은 대략 1842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 겉봉에 금남사서(完南謝書)라고 썼다.

금남은 지금의 전라도 지역이다. 따라서 최성간은 전라도 출신 유생으로, 차를 즐긴 인물로 추정된다. 편지의 크기는 39×24.2cm이다. 이 편지에도 초의가 그에게 차를 보낸 사실이 드러난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1842년 겨울, 서로 친함이 마치 오랫동안 사귄 것 같아 함께 자며 나눈 정의(情誼)가 평범하지 않은 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별 후에 소식이 없으니 언제나 서글피 우러러봅니다. 바로 작년 9월 보낸 편지를 받고 두 번 세 번 펴보니 거의 종이에서 털이 폈습니다. 이어 그 사이를 살펴보니 지난 겨울과 지난 봄에 기거하시는 모든 절차가 진중하시다니 구구히 위로됩니다. 저는 그 사이 근근이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는데 이는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멀리 큰 바다(제주도)를 건너가신다고 하셨는데 무사히 갔다가 돌아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매번 잊지 못하는 마음으로, 남쪽을 바라본 것이 몇 번인지 모릅니다. 편지가 도착했으니 안심이 되며 차 2포를 보내주셔서 감동이 컸습니다. 마침 인편이 바쁘다고 하니 잠시 이 말씀만 드립니다. 격식을 갖추지 않습니다.
1845년 4월 27일 최성간 배사

壬寅冬相親如舊交 或同枕情誼不凡 而別後無聞 居常맃仰 卽承昨年九月出惠書 披閱再三 幾乎紙生毛也 仍審其間 過冬過春 起居諸節珍重 仰慰쒈區區 性侃 其間僅保無恙 斯幸斯幸 而第示遠涉瀛海 無事往還 聞不勝欣幸 每有不忘之心 向南望見 不知幾次 素書依到 諒之 而惠送二茶依受 多感多感 適因便忙云云 故暫此 不宣 乙巳 四月 二十七日 崔性侃 拜謝

1845년경 최성간은 완남(完南)에 거주했다. 그의 아우는 1831년 식년시에 합격했다고 한다. 식년시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로, 대비과라고도 하는데, 〈주례(周禮)>에 “3년은 대비로, 이 해에 그 덕행과 도예(道藝)를 살펴서 현명하고 유능한 자를 뽑아 관리로 등용한다.”라고 한 것에서 연유한 것이다.

아무튼 이 편지에 “1842년 겨울, 서로 친함이 마치 오랫동안 사귄 것 같아 함께 자며 나눈 정의가 평범하지 않은 듯 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가 초의를 만난 시점은 대략 1842년경이라 여겨진다. 

한편, 그는 1842년 겨울에 초의를 만난 후,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기에 “이별 후에 소식이 없으니 언제나 서글피 우러러 봅니다”라고 했으리라. 초의를 대하는 그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졌다가 초의 편지가 그에게 보내진 것은 1844년 9월이었다. 그가 “작년 9월 보낸 편지를 받고 두 번 세 번 펴보니 거의 종이에서 털이 폈습니다. 이어 그 사이를 살펴보니 지난 겨울과 지난 봄에 기거하시는 모든 절차가 진중하시다니 구구히 위로됩니다”라고 한 것에서 드러난다. 아무튼 오랜 기다림 끝에 교유가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편지란 개개인이 주고받은 정보이다. 단순한 문안 편지에서도 이들의 교유 시점이나 상황, 절기, 주고받았던 물품, 우정의 정도 등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편지는 개인이든, 시대든 다양한 정보가 담긴 미세사의 보고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편지는 초의가 추사의 유배지, 제주도를 찾아간 시점을 확인할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가 “멀리 큰 바다(제주도)를 건너가신다고 하셨는데 무사히 갔다가 돌아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매번 잊지 못하는 마음으로, 남쪽을 바라본 것이 몇 번인지 모릅니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렇다. 이 무렵 제주를 찾아 간 초의를 그리며 남쪽을 바라봤다는 그의 우정은 만난 횟수가 아니라 어떤 이상을 공유했는지가 중요했는지도 모른다. 초의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그가 초의를 그리는 간절한 마음을 행간 사이사이에 숨겨 두었다.

한편, 1845년 무렵 초의는 제주에서 돌아와 일지암에 머물며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데, 실제 초의가 제주를 찾아간 때는 1843년경이며 제주에 머문 기간은 6개월 정도였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편지가 도착했으니 안심이 되며 차 2포를 보내주셔서 감동이 컸습니다”라고 한 점이다. 평생 수많은 차 보시로 속세의 오욕에 얼룩진 이들을 위로했던 초의의 차 공덕은 언제나 이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만든 정표라고 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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