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은 달마스님으로부터 중국의 조사선(祖師禪)에서 이어온 수행법이다. 

조사선은 육조혜능 이후 마조(馬祖)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사님들에 의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성(聖)스럽다, 성스럽지 않다는 분별심을 초월한 경계이며, 일체 분별심을 놔버리고 생각 이전 무분별(無分別)의 입장에서는 결코 ‘안다, 모른다’를 뛰어 넘은 유불회론(唯不會論)이라, 오직 모르고 모를뿐이다.

참선은 알고 있는 분별 세계서 모르는 무분별의 세계에서 시작한다. 대혜 스님의 ‘이 뭣고’도 오직 모를뿐에서 시작이며 ‘이 뭣고’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실존 문제이며,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존재의 실상이다.

‘이 뭣고’는 조주 스님에게 어떤 학승이 “개(狗)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무(無) 하셨는데, “어째서 무라 하였는고?” 하고 참구하는 것이 아닌, 바깥 경계에 향해있는 마음을 안으로, 본래자리로 되돌리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인 것이며, ‘이 뭣고’ 자체에 내가 누구인가? 하는 강한 의심이 작렬하고 있는 것이며, ‘여하시불(如河是佛)’,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이 답이 종사(宗師)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시불(汝是佛) “너가 부처니라.” 즉 문처즉답(問處卽答), 묻는 가운데 답이 있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객관적 대상(對象)을 본다고 하는 것은 업식(業識)에 의해서 투사된 그림자 상황을 보는 것이다. 즉 업식의 그림자를 내 마음, 나 자신이라고 착각(錯覺)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고 자아(自我)인 것이다. 이 분별 망념을 일시에 놔 버릴 때 맞닥뜨리는 것은 “오직 모르고 모를 뿐이며, 그래서 ‘이 뭣고’인 것이다”

달마서 혜능에 이르는 선(禪)의 가르침은 불취외상(不取外相) 내심반조(自心返照)라. “밖으로 일체 관념의 상(相)(모양)을 취하지 말고, 놓아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비춰봐라”란 말이다. 선(禪)이란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한 생각이 일어나면 망념(妄念)으로 번지기 전에 그 즉시 알아차리고 ‘이 뭣고’로 그 뿌리를 잘라버림으로서 공(空)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일체 분별망념(分別妄念)을 놓아 버린 무분별의 입장서 천지(天地)를 꿰뚫는 한 의심이 ‘이 뭣고’ 화두이다. 이는 존재(存在)의 그림자가 아닌 실상(實相)에 대한 강렬한 의심이다.

육조 스님은 “한 생각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선(앉음)이라 했고, 일체 경계에 어지럽지 않고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일체처 일체시가 행선(行禪)”이라고 하였다. 

‘이 뭣고’로 세세생생 익숙한 천만 가지 분별망심(分別妄心)을 하나로 모아 의심이 불덩어리가 되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아뢰야식에 쌓인 업장(業障)이 저절로 녹아 버린 그 자리가 바로 가고 옮이 없고, 생사의 고해(苦海)서 벗어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미륵보살이 거주하고 계시는 도솔천 내원궁에 들게되는 것이며, 인간의 400세가 도솔천의 하루로 수명은 4000세(인간세상의 5억8천4백만년)인 것이다.

부처님이 어느날 나무 밑에서 앉았는데 이 돼지새끼를 매고 가는 장사꾼에게 부처님께서 “네가 메고 가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상인(商人)이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춘 분이 이 돼지새끼도 몰라요”라고 답하니, 그러자 부처님이 “그냥 물어 봤노라”라고 하셨다.

왜 물어 봤겠습니까?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하며, 여기에 부처님이 말하신 ‘이뭣고’ 화두가 들어 있는 것이다. 

진여문(眞如門)을 수행하는 것은 지행(止行)을 닦는 것이라 하고, 본래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다. 생멸문(生滅門)은 관을 일으키는 것인데,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것이 생각인데, 관행이란 이것을 살펴보라는 뜻이다. 지관(止觀), 즉 싸마타와 위빠사나를 함께 닦는 것이 ‘이 뭣고’ 수행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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