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청보리회 법사(80)

김재영 법사는… 1938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후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김동화 박사의 지도로 석사를,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초기불교의 사회적 실천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불교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부터 지금까지 동방불교대학 교수로 ‘현대포교론’ 등을 강의해왔다. 1970년 동덕여고 불교학생회 창립을 이끌었고, 현재까지 청소년·청년·대학생 중심의 ‘청보리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011년부터 국제구호단체 ‘자비수레꾼’을 설립(공동대표)하여 캄보디아 북부 오지 뗍뽀디봉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세우고 500여 명의 어린이 학교보내기운동을 전개해왔다. 2011년 청보리순례단을 이끌고 인도의 8대 성지를 순례한 후 부처님의 생애를 영상작품화한 ‘붓다 석가모니(10부작)’를 제작해 새로운 전법(붓다 스터디)을 펼치고 있다. 2006년 대원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룸비니에서 구시나가라까지〉, 〈우리도 부처님같이〉, 〈초기불교개척사〉, 〈화엄코리아〉, 〈붓다의 일생 우리들의 일생〉 등이 있다.

불교로 바뀐 삶
모친, 태몽으로 약사여래 친견
청소년기 사찰 불교학생회 활동
사춘기 죽음에 대한 공포로 방황
〈법구경〉으로 죽음 공포 벗어나
〈법구경〉 등 본격 불교공부

“부처님 당시의 초기 불교를 이끈 것은 ‘빠리사’였다. 빠리사는 왕족과 무사, 지식인, 상인, 사문, 거사 등 시민들로 구성된 수행공동체다. 빠리사는 부처님도 함께 무릎을 맞대고 둘러(pari) 앉아(sa) 대화하고 토론하고 합의하며 함께 개척해가는 자유평등의 공동체다. 부처님은 빠리사와 함께 법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논의했으며, 빠리사는 각종 불사를 지원하고 승단을 외호하며 수행을 이끌었다. 빠리사는 서로의 네트워크를 통해 대상(隊商)을 조직해 세계 각국에 불법을 전파하기도 했다. 부처님의 불교가 널리 퍼지고 지금까지 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빠리사의 역할이 컸다. 오늘날의 불교가 부처님 당시의 불교와 다르고, 좀 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 때와 같은 ‘빠리사’가 없기 때문이다. 빠리사를 복원하는 일이 불교의 원형을 복원하는 길이다.” 1970~1980년대 청소년불교운동을 일으키고 ‘청보리’운동으로 포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김재영 법사는 부처님의 시대를 다시 꿈꾸고 있다.

다시 부처님의 불교로…‘붓다 스터디’
다시 부처님 시대의 불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 김 법사는 누누이 강조한다. 지금 우리의 불교는 부처님이 하셨던 불교와 많이 다르다고. 부처님의 불교는 길 위에서 몸소 실천하신 불교라고. 그래서 김 법사는 오랜 세월 외쳐왔다. ‘붓다의 불교 부흥’이다. 과연 지금의 우리 불교는 2500년 전의 불교와 진정 어긋나 있는 걸까. 어긋나 있다면, 얼마나 어떻게 어긋나 있는 걸까. 그리고 돌아갈 방법은 있는 걸까.

늘 부처님 시절을 그리워하며 사는 김 법사는 2011년 1월 청보리순례단을 이끌고 인도로 성지순례를 떠난다. 김 법사와 도반들은 부처님의 발자국 위에 발자국을 더하며 잠시나마 부처님 시절을 더듬어본다. 한 걸음 한 걸음 부처님을 그리며 룸비니에서 쿠시나가라까지 부처님의 8대 성지를 걸었다. ‘순례’였다. 길 위에서 대중과 만났던, 그렇게 이 세상에 왔다 가신 부처님을 그리며 김 법사는 걸었다. 김 법사는 동행한 사진작가를 통해 순례의 과정을 사진에 담아왔다. 그리고 사진과 추가 영상을 더해 10부작 영상물을 제작했다. 제목은 ‘붓다 석가모니’다.

2014년 10월 28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공연장에서 ‘붓다 석가모니’의 시사회 겸 ‘대중 스터디’가 열렸다. 김 법사는 새로운 전법운동 ‘붓다 스터디’를 시작한다. 부처님의 탄생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생애를 담은 영상은 부처님 시대의 불교를 함께 공부하는 교재였다. 앞서 9월 장충동에서 첫 시사회와 대중스터디를 열었고, 두 번째 대중 스터디를 통해 본격적으로 ‘붓다 스터디’를 대중에게 알렸다.

“불교의 중심은 부처님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불교의 중심엔 왠지 부처님이 없습니다. 참선, 위빠사나, 염불, 간경 등 방편들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 방편들은 방편대로 분명 의미가 있는 것들이지만 부처님이 중심에 있고 난 후에 그 방편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붓다 스터디’는 부처님의 불교를 복원하기 위한 대안입니다. 그리고 그 대안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붓다공동체운동’이란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김 법사는 “부처님 시대의 불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빠리사의 자유로운 토론과 합의, 그것으로 비롯되는 자발적 동기, 무한한 창의, 상상력, 개척정신 등 대중의 노력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부처님 열반 후 빠리사는 점점 소멸했고 그 결과 세계불교가 여러 가지로 오류를 범하고 모순 속에 있게 됐다”고 말한다. 그 오류와 모순 속에서 우리의 불교 또한 부처님 시대의 불교에서 어긋나게 됐다는 것이다. 김 법사는 ‘빠리사의 부흥’이 부처님 시대의 불교로 돌아갈 수 있는 대안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부처님 말씀에 귀의한 이들이 서로가 모여 빠리사를 만들고 ‘붓다 스터디’를 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어긋난 불교를 다시 돌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법사는 그것을 ‘붓다 빠리사 개척운동’이라고 말했다.

김 법사는 ‘붓다 스터디’와 함께 ‘붓다 개척자 학교’를 열었다. ‘붓다 스터디’는 “부처님 공부하자”는 것이고, 붓다 개척자 학교는 부처님 시대의 불교를 온전히 열어가기 위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교다. 1년 과정을 수료하면 ‘개척강사’가 되고, 2년 과정을 수료하면 ‘개척법사’가 된다. 지금까지 19명의 개척강사와 6명의 개척법사를 배출했다. 그리고 현재 12명이 법사와 강사의 과정을 밟고 있다.

탯줄에 깃든 불연
김 법사의 깊은 불심과 쉼 없는 원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부처님의 ‘연기법’으로 그 설명이 충분할 듯하다. 지금의 김재영은 지금의 김재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지금의 김재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1938년 마산에서 태어난 김 법사의 탯줄에는 미륵부처님과 약사여래의 이야기가 있다. 김 법사는 모친의 간절한 기도 끝에 이 세상에 왔다. 독실한 불자였던 김 법사의 모친은 늦은 나이에 자식을 갖기 위해 부처님 전에 일심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기도 끝에 태몽을 꾼다. 김 법사의 모친은 꿈속에서 자신이 매일 기도하며 보았던 장춘사의 미륵불을 보고 난 후 김 법사를 가졌다. 훗날 김 법사는 모친이 꿈에서 보았다는 미륵불을 보기 위해 장춘사를 찾았다. 하지만 김 법사의 모친이 보았다는 미륵불은 약사여래였다. 김 법사는 입이 트이고 귀를 열면서부터 자신의 태몽에 대한 이야기를 모친으로부터 자주 들었다.

김 법사의 입과 귀는 그렇게 열렸다. 입과 귀를 부처님의 이야기로 연 김 법사는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모친의 손에 이끌려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모친과 함께 통도사의 마산포교당에 다녔다. 고암 스님이 계셨다. 고2 때는 친구의 권유로 학생법회에 가입했고 회장도 했다.

“솔직히 그 땐 부처님 공부, 그런 것 때문에 절에 간 게 아니었어요. 그냥 절에 가는 게 좋아서 갔고, 반갑게 맞아주는 스님이 좋아서 갔고, 무엇보다 절에 가면 친구들을 볼 수 있어서 갔었죠. 초파일 때 친구들과 밤새 연등 만들면서 어울리는 게 좋아서 절에 갔었죠. 그 때의 절은 그랬어요. 절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청소년불자가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절이 예전의 절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교 알리기 위해 부르면 안 됩니다. 교리 가르칠 생각부터 하면 안 됩니다. 우선 절에 가고 싶게 만들어야 합니다. 절에 다니다 보면 자꾸 부처님 보게 되고 부처님 보다보면 부처님 가까이 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랬거든요. 절이 시대적으로 청소년들과 부합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훗날 김 법사가 포교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청소년 시절에 경험했던 불교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삶을 바꾼 〈법구경〉
고1 겨울방학 때였다. ‘사춘기’였을까. 김 법사 역시도 많은 생각을 짓고 부수며 앞으로 살아갈 날을 위한 몸짓을 시작했다. 김 법사는 어느 날 갑자기 ‘죽음’에 대한 생각에 갇힌다. 매순간 ‘죽음’이라는 단어가 눈앞을 가로막았고, 그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까’ 등등 김 법사의 사춘기는 죽음의 문제에서 방황을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업이었을까. 김 법사는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 죽음에 대한 문제를 버리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 속에 살게 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몸부림을 쳤다. 대학과 군복무를 마치고 동덕여고 국사교사로 부임할 때까지도 김 법사는 죽음에 대한 문제에서 나오지 못했다. 위태로운 삶이었다.
“학생들 앞에 서야하는 교사였지만 정서적으로 매우 위태로운 나날을 보냈죠. 한 자리에 있지를 못했고, 차분한 시간이 없었어요.”
1967년 김 법사가 고3 담임을 맡고 있을 때였다. 그날도 역시 김 법사는 위태롭고 불안했다. 교정 이곳저곳으로 방황하던 김 법사의 발길이 머문 곳은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을 서성이던 김 법사의 눈에 책 한 권이 들어왔다. 〈법구경〉이었다.
“마음이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마음이 주가 되어 모든 일을 시키나니 마음속에 악한 일을 생각하면 그 말과 행동 또한 그러하리라. 그 때문에 괴로움은 그를 따르리. 마치 수레를 따르는 수레바퀴처럼”
김 법사는 먼지를 털어내고 〈법구경〉의 첫 장을 열었다. 첫 게송은 김 법사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리고 김 법사는 마음속에 불안과 위태로움으로 엉겨붙어있던 죽음의 문제들을 순식간에 씻어낼 수 있었다.
“유년기와 청소년 시절의 많은 시간을 절에서 보냈고, 많은 법문을 듣고 살았는데도 부처님의 글자를 보지 못했던 거죠. 뒤늦게 부처님의 글자가 보였던 거죠.”

2011년 청보리순례단 인도 성지순례 모습.
2015년 ‘불교개척자학교’ 제1기 개척강사 양성과정 선포식.
동덕여고 불교학생회 탈춤동아리 공연 모습.

50여 년 전법ㆍ포교 한 길
동덕여고불교학생회 창립 이끌어
청소년축제 ‘연꽃들의 행진’ 신설
70~80년대 청소년 포교 붐 조성
인도 8대 성지순례 영상교재제작
“부처님 당시 불교 복원해야”
‘붓다 스터디’ 새로운 전법
부처님 시절 ‘빠리사 운동’ 전개
불교개척자학교 개설 지도자 양성
〈화엄코리아〉 〈붓다의~〉 출간

동덕여고 불교학생회…청소년 포교의 시작
1970년 7월 18일, 서울 동덕여고에서는 위대한 불사가 있었다. 유정애 학생대표의 발원문 낭독과 함께 200여 명의 여고생들이 사홍서원을 합창했다. ‘동덕여고불교학생회’ 탄생이다. 전국을 통틀어 불교학생회가 10여 곳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어린이불교, 청소년불교가 전무하던 시절에서 종립학교도 아니었던 동덕여고의 불교학생회 탄생은 의미 있는 불사였으며 ‘사건’이었다. 그 불사의 배경과 중심엔 김재영 법사가 있었다.

뒤늦게 부처님의 글자에 눈을 뜬 김 법사는 본격적으로 불교 공부를 시작했다. 〈법구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을 꼭꼭 씹어 읽었다. 눈과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받아들인 공부였다. 6개월에 걸쳐 〈법구경〉을 마친 김 법사는 1년에 걸쳐 〈우리말 팔만대장경〉을 마치고 각종 경전과 불서들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그렇게 김 법사의 공부는 하루하루 늘어갔고, 국사를 가르쳤던 김 법사는 수업 시간에 간간히 부처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수업은 점점 재미를 더했다. 아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불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덕여고불교학생회는 학생들로부터 시작됐다. 어느 날, 학생들이 김 법사를 찾아왔다. ‘불교반’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학교는 특별활동의 하나로 ‘불교반’을 인가했고, 그 불교반의 이름은 ‘동덕여고 불교학생회’였다. 200여 명으로 시작한 ‘동덕여고불교학생회’는 750여 명으로 늘어났다.

김 법사는 부처님 가까이 온 아이들을 계속 부처님 품에 머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1971년부터 시작된 ‘연꽃들의 행진’이 그것이다. 김 법사의 사비와 약간의 후원금으로 시작된 ‘연꽃들의 행진’은 청소년불자들이 참여해 합창, 연극, 탈춤 등의 공연을 펼치는 축제의 무대로, 1999년까지 매년 열렸다. 축제가 열리는 날에는 참여 학생과 불자들로 대성황을 이뤘다.

‘동덕여고 불교학생회’의 창립은 청소년 불교 운동에 불을 지폈다. 서울 대원정사, 청룡사 등 사찰학생법회가 신설되는 계기가 되었고,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로 인해 대학교불교학생회가 늘어나고 넓어졌다. 동덕여대 불교학생회가 창립됐고, 성신대, 서울대, 한양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중앙대 등 여러 대학의 불교학생회가 속속 만들어졌다. 그렇게 이어진 불사는 다시 청년 불자모임으로 이어졌다.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다시 ‘청보리’라는 이름 아래 모였다. ‘청보리회’는 ‘청보리 운동’과 한 이름으로 다른 단체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청보리’는 모든 불교학생회를 아우르는 이름으로, 그리운 도반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것이다. 그렇게 모여서 함께 부처님 공부하고 ‘청소년(청) 깨달음(보리)’ 운동을 돕는 것이다.

김 법사가 중심이 되었던 동덕여고 불교학생회는 문화를 통한 포교로 청소년과 청년들을 부처님 가까이 이끌었고, 1970~1980년대 청소년과 청년포교의 중흥을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김재영’이라는 작은 씨앗 하나가 커다란 불사로 이어진 것이다. 〈법구경〉 한 구절에서 시작된 대작불사다.

붓다의 일생 우리들의 일생
“불교, 진짜 한번 해보고 싶다. 이제 우리도 붓다 석가모니의 일생 그대로, 진짜 불교 한 번 제대로 해보고 싶다. 이 초라하고 지루한 인생, 한 번 멋있게 신명나게 바꿔가고 싶다. ‘그게 불교냐?’, 많은 친구들이 외면하더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라도 가고 싶다. 이대로 무너지면 우리가 그렇게 애써 살아온 ‘불교인생’, 너무 허망하지 않을까?”

지난 10월 김 법사가 출간한 〈붓다의 일생 우리들의 일생 - 동쪽나라〉의 서문 일부다. 비장한 서원이다. 흔들리지 않는 불심이다. 책은 ‘붓다 스터디’를 위한 시리즈로 〈화엄코리아·2017〉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온갖 잡것들(雜華)들, 잡초(雜草)들이 들풀처럼 한데 어울려 자유롭고 평화로운 나라, ‘화엄불국토’를 개척하고픈 염원을 담고 있다. 1권 〈화엄코리아〉가 현실 비판과 미래를 이야기했다면, 이번 책은 룸비니(탄생)에서 쿠시나라가(열반)까지 부처님의 일생을 통해 부처님의 불교를 복원하기 위한 구체적인 모델을 제시한다. 그리고 집필을 준비하고 있는 3권은 잘못된 현재의 불교를 바로 잡는 노력이 될 것이라고 김 법사는 말한다.

50여 년 동안 불교 포교에 헌신해 온 김 법사의 서원은 함께 ‘부처’를 만나자는 것이다. 붓다의 일생과 우리들의 일생이 하나이기를 바란다. 맨발로 걸을 수 없는 시대에 맨발로 한 번 걸어보자는 것이다. 이 시대의 ‘맨발’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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