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명대 선종의 특징

정책과 상관 없는 불교 위상
선종 성·쇠 반복 결국 쇠퇴

원대를 뒤엎고 새롭게 건립된 나라는 명나라로서, 명대의 태조는 주원장이다. 주원장은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했던 이유로 인해서 한 때 절에서 사미로 지낸 적이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서 그는 불교의 내부 및 불교와 사회적인 관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때 원대한 포부와 현실적인 이상을 종교를 이용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명교(明敎)와 미륵의 구호를 내걸고 원나라를 반대하는 궐기를 통해서 승리를 했고, 끝내는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때문에 그는 이 방면의 체험을 통해서 얻을 교훈으로 사회 및 전체 사원을 통치하는 하나의 조치를 감행했다. 우선 태조 주원장은 일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문호(門戶)를 정리하고, 사찰에 대해서도 백련교(白蓮敎), 명교(明敎: 摩尼敎), 미륵교(彌勒敎)를 금지했다. 그러한 후에 다시 불교의 활동을 제한하고, ‘신명불교방책(申明佛敎榜冊)’을 반포하였다.

주원장은 승관제도를 실시해서 출가인의 숫자와 자질에 대해서 엄격하게 제한을 했으며, 또 승려들의 관아 출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석감계고략속집(釋鑑稽古略續集)〉에 보면 “많은 대중이 모임으로써 총림을 이루며, 안선으로써 청규를 이룬다(會콎以成叢林, 헌規以安禪.)”고 했다. 그는 또 전국의 사원을 선(禪), 강(講), 교(敎) 세 가지로 분류하라고 예부(禮部)에 명령하였다. 곧 “그 선은 불립문자로서, 반드시 성(性)을 보아야 비로소 본종(本宗ㆍ선종)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강(講)하는 자는 모든 경전의 취지를 밝히는데 힘써야 하며, 교(敎)하는 자는 부처님법으로 일체중생을 요익하게 해서, 일체의 업을 짓지 못하도록 가르쳐야한다”고 했다. 또 그는 홍무(洪武) 14년에 승려들의 복장에 대해서도 교시를 하였는데, 선승은 항상 다갈색 승복을 입고 청조(행폻)옥색 가사(玉色袈裟)를 수하게 했으며, 강승(講僧)은 항상 옥색을 입고, 녹조(綠폻) 담홍색가사(淺紅袈裟)를 수하게 했고, 교승(싱僧)은 항상 검은색(遁色)을 입고, 흑조(黑폻) 담홍색가사(淺紅袈裟)를 입게 했다. 또 도교의 도사는 항상 청색(행色)을 입게 하고, 관복(朝服)은 적색(赤色)을 입게 했다고 한다. 주원장의 이러한 종교적 정책은 명대 선종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이러한 불교에 대한 통합적인 종교정책은 명나라 불교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즉 교승 이외 선승 및 강학하는 승려들은 오직 총림에서 전문적으로 참선을 하거나 경전을 배우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승려들을 산림 중에 묶어 놓기 위한 정책으로 세속과 왕래를 단절시키려는 의도였다. 이 점은 명나라 중엽 이전, 역사적으로 승려들이 세속과 왕래를 단절시킨 매우 드물고 특이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명대에 선종은 비교적 선전을 했지만, 종풍은 도리어 쇄락했다. 명나라 말엽 선종은 밀실전첩(密室傳탕ㆍ밀실에서 비밀하게 전하는 것), 동과인자(冬瓜印子ㆍ진짜 인장 같으나 사실은 가짜) 등의 종풍이 유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종은 원대에 비하면 명대에 이르러서 이미 중국불교에서 주류가 되면서 사회에 곳곳에 영향을 주었다. 비록 조정에서 종교정책을 빌미로 해서 불교발전에 대한 제한을 가했지만, 다만 완전히 사회에서 불교를 배척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명대의 선종과 교종의 한계가 명확하게 나누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선승(禪僧)과 강승(講僧) 또한 그렇게 분명하게 나누어 진 것도 아니었다. 주원장 본인은 원래 꼭 불교를 없애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원했던 것은 당시 불교에 대한 병폐 내지 혼란한 상태를 정리 개정하려고 했던 정책이기도 하다. 단지 그가 원했던 것은 스님은 스님답고, 절은 절답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으며, 각기 승려들이 각자 맡은바 책임을 다 해주기를 기대했고, 동시에 통치자로서 본인의 통치를 유리하게 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때문에 명대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고승대덕은 여전히 존경과 예우를 받았는데, 예를 들면 혜담(慧瑗)·종늑(宗莘)등이 있다. 사실 주원장의 종교정책으로 인해서 타격을 입은 승려들은 모두 비교적 하층에 속하는, 배움이 적은 선승들이었고, 특히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높은 교육수준을 구비했던 선승들은 제외됐다.

그림, 강병호

 

명대에 선종은 강남지역의 임제종이 가장 활약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 가장 일찍 영향력이 있었던 계통은 원수행단(元北行端)의 계통에 속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주원장은 홍무3년(洪武3年ㆍ1370)에 금릉(지금 남경)의 천계사(天界寺) 30여 명의 고승을 초청을 했을 때 3분의 1은 모두 원수문하의 인물들이었다(出元北之門者, 三居一焉)고 한다. 또 소은대흔(笑隱大訴) 계통의 혜담(慧曇), 종늑(宗莘) 등은 일찍이 조정의 칙명으로 서역지역 각국에 선법을 전파하기 위한 출사(出使ㆍ출장)를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갈래의 선법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명나라 중엽에 선종은 쇠퇴를 막아보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였지만, 실천수행보다는 이론에 치중하는 선사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도리어 교학에 대한 강설을 이용해서 자신을 높이는데 열중하였고, 새롭게 선법을 개정 혹은 새로운 수행의 안목도 돌출해 내지 못했다.

이후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성조주체(成祖朱腰ㆍ영락제)가 수도를 연경(현재 북경)으로 옮긴 후 선종의 침체, 염불선의 유행, 선사들의 정토겸수 등이 유행을 하게 되었다. 한편 정치권에서는 당정 당파의 투쟁으로 인해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약화되었다. 이때 중앙정부가 선종에 대한 제한적인 정책이 점점 느슨해지면서, 선종으로 하여금 부활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이 부흥운동은 먼저 선종의 지역구인 강서(江西)·절강(浙江)일대에서 흥기하기 시작하였으며, 오래지 않아서 광활한 남방에 각지에 퍼져 나아갔다. 임제종·조동종 할 것 없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세력을 확장해 나아갔다. 예를 들면 임제종의 소암덕보(笑岩德寶) 계통의 환유정전(幻有正눈ㆍ1549-1614) 제자 계통, 조동종의 운문계(雲門系) 및 수창계(壽昌系) 등을 꼽을 수가 있다. 이 두 계파는 모두 간화선을 계승 발전하였지만, 이 두 계파는 상호 투쟁과 편견이 매우 심했던 관계로, 상호 약점인 허물과 비밀을 들춰내서 공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사회가 불안정했던 관계로 사회의 인사들이 종종 은거(隱居)방식으로 입선(入禪)하는 자 및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선문(禪門)에 입문하는 자가 많았다. 이 가운데의 어떤 이들은 조정의 당파 투쟁 중에 세력을 잃고 출가한 문인사대부가 적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선종은 차츰 거대한 세력이 형성 되었고, 선종은 또 다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선종은 자연스럽게 무식한 집단의 오명을 벗어나게 되었고,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선법을 전수할 수 있는 법력(능력)을 가진 선사가 천여 명이 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명나라 말엽의 사상계는 삼교합일사상이 보편적으로 유행을 하였다. 불문의 고승들도 외전을 겸해서 배웠다. 명나라 말엽 4대 고승들도 모두 유학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연지주굉(蓮池?宏 혹은 雲棲?宏)은 본래 유생이었으며, 감산덕청(벱山德헌)은 청소년 시절에 습거자업(習휿子業ㆍ주자가 주석한 사서의 내용)을 익혔으며, 우익지욱(藕益智旭)은 불교에 입문하고도 유교 도교와 관련된 책을 짓기도 했다. 자백진가(紫柏廬可)도 삼교합일을 주장하였으며, 자백진가(紫柏廬可)의 문집인 〈長松如退〉 서언 중에서 자칭 유, 불, 도를 출입(出入)한다고 적고 있다. 위의 네 사람 즉 운서주굉(雲棲?宏), 자백진가(紫柏眞可), 감산덕청(벱山德淸), 우익지욱(藕益智旭) 등을 역사적으로 명말 ‘사대고승(四大高僧)’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외도 명대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거사신앙이 유행했다. 많은 거사들이 대장경을 열람하는 풍조를 이루기도 했다. 유학자들도 덩달아서 대장경을 열독하고 불경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했다. 한편 선종은 물론이거니와 기타 종파도 승속을 막론하고 삼교합일 및 선정합일(禪淨合一)이 사조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조는 명대 ‘사대고승’들의 저술, 어록 사상 등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전형적인 예로서 명대의 유명한 정치가 사상가 철학가인 왕수인(王守仁)의 사상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는데, 그가 말한 ‘격물치지(格物致知) 및 심즉리(心卽理), 심외무리(心外無理), 심외무물(心外無物)’ 등의 관점은 선종의 즉심즉불(卽心卽佛) 내지 심성학(心性學)은 선종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특히 그의 유명한 ‘사구교(四句敎)’는 유식과 깊은 연관이 있다. 물론 이외도 멀리로는 육구연(陸九淵), 이정(程?程顥), 주희(朱熹) 등도 선종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이들이다.

결론적으로 명대 말엽 선종은 이미 쇠퇴시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쇠퇴의 원인을 살펴보면, 우선 과거 선법수행의 방법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고, 선법 실천수행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보충 및 선법의 실천에 대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지도 못했다. 더욱이 시대의 환경에 알맞은 새로운 수행법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명대의 종교정책으로 인한 엄격한 규제가 가해지면서, 명대 선종은 점점 더 침체되어 갔다. 명대 말엽에 한 번의 부흥운동이 이어졌지만, 불씨는 활활 타오르지 못하고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제종파의 융합은 명나라 말엽 불교의 특색 가운데 하나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선종의 선승들은 실천보다는 이론에 치중하면서, 불교융합을 바탕으로 부흥을 추진한 경향이 있었다. 이 점은 청나라 이후 불교의 기본적인 발전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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