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맡겨 놓으면 어떤 애고든 불타 버린다

(지난 호에 이어서)

질문자1(남) 옳다 틀리다가 아니고 생각을, 내가 생각 자체를 내면은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아, 그래.’ 하고 던져버리는데 스님 올 초 법문에 그런 게 있어서 혹시 내가 이걸 뭐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큰스님 잘못한다도 없고 잘한다도 없어요. 왜냐? 그건 나무가 바람에 쓸리고 또는 눈에 맞아서 흩어지고 비가 와서 비를 맞고 이렇게 해도, 또 공기, 태양열 이런 것이 많이 흡수가 돼도 이 나무는 말이 없어요. 왜냐? 뿌리만이 올리고 내리고 하기 때문에요. 그래서 항상 순환을 하죠. 맡길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대로 여여하게 맡겨지는데 그때까지 우리가 넘어서야 할 그런 단계가 있기 때문에 지금 그렇게들 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나무는 그대로 흡수돼서 밑으로 내리고 뿌리에서 올리고 태양열, 공기 모든 거를 흡수해서 내려보내도 그 내려보내기 위해서 참, 때로는 비에 젖고 때로는 눈에 젖고 때로는 바람에 젖고 때로는 뜨거운 태양에 젖고, 이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다 흡수해서 내려보냅니다. 또 밑에서는 수분이나 또는 지기나 황열, 철분 이런 모든 거를 흡수해서 올려보낸단 말이에요. 그래 영양을 섭취해서 푸르르게 살고 있고 그러면서도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닥치는 겁니다. 그래도 자기가 뿌리 있는 거를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겁내지 않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놓을 게 없다느니, 아까 그랬지요? 놓을 게 없는데 놓는다, 생각을 한다, 생각할 것도 없다 이랬죠? 그런데 생각할 게 없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데에서 이게 잘못되고 잘되고 이렇게 돌아가니까, 예를 들자면 ‘맹물에다가 무엇을 넣어야 이건 내 몸에 좋을 텐데. 기침이 나는데 뭐를 넣어야 기침이 안 날 텐데.’ 하는 생각을 해야 돼요. 생각이 없다면 목석이 돼서 무효예요. 생각을 못하면은 목석이 돼서 무효고, 또 생명이 없으면 무효고, 또 이 육체가 없으면 보이지 않아서 무효고요. 그러니까 이건 삼 단계가 하나로 지금, 집합이 돼서 돌아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주인공이라고 이름해서 붙였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유를 그렇게 많이 붙여서 하지 말고 요다음에는 아주 간단하게 용건 하나만 가지고 해결을 하면 다 해결이 나요. 그러니까 용건 하나만 해요.

질문자1(남) 제가 표현하기가 어중간해서 좀 길게 한 겁니다. 생각을 안 내서 안 내는 게 아니라 생각을 내버리면 아예 제가 야단을 맞으니까, 길잡이로부터요. 그래서 생각을 안 낸 겁니다.

큰스님 야단을 누가 칩니까? 야단을 치는 놈도 없고 야단을 안 치는 놈도 없어요. 그 가운데서 자유예요. 아직 더 공부하세요.

질문자1(남) 예. 다시 관(觀)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스님 아는 게 많으면 그렇게 이유가 많아요. 이유가 많으면 문이 닫히거든요.

질문자2(남) 큰스님, 한마음법을 항상 가르쳐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마음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안다는 것과 마음을 본다는 그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을 주십시오.

큰스님 안다는 것도 아니고 또는 봤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살 때에, 아까도 얘기했지만 똥 눌 때 똥을 눠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눕니까? 또 먹어야 하나, 안 먹어야 하나 하고 먹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생활을 그대로 이렇게 스스로서 마음이 내키는 대로 보고 듣고 스스로 그냥 하고 있죠? 말과 행과 뜻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르니깐 “참마음을 찾아라.” 하는 거죠. 그러니까 현재에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있다는 증겁니다. 아주 증거죠. 자기 참마음과 몸이 둘 아니게 그냥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거죠.

질문자2(남) 감사합니다.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체가 없는 참마음은 성품의 작용에 의해서만이 볼 수 있습니까?

큰스님 음, 참마음이라, 그거는…. 지금 뭐라 그랬죠?

질문자2(남) 실체가 없는 참마음이요.

큰스님 실체가 없어서도 아니 되고, 이 실체가 없이는 참마음이라는 게 없어요. 실체가 있기 때문에 참마음이라는 게 있죠? 그러니까 참마음과 실체가 둘이 아닌 까닭에 그대로 동시에 동일하게 움죽거리는 그 자체가 그대로 실체며 그대로 참마음에서 나오는 움죽거림이죠.

질문자2(남) 상대성 원리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큰스님께서 마음 길을 항상 말씀하실 때 첫째, 내가 죽어야 하고 두 번째는, 너와 나와 더불어 죽어야 하고 세 번째는, 더불어 나툴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과, 유(有)가 유를 죽이면 무(無)가 되고, 유·무를 동시에 죽이면 역시 중도이자 공(空)이 되며, 유가 무를 살리고 무가 유를 살리면 그 활공법이 큰스님 전자의 말씀과 같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큰스님 유·무를 같이 동시에 놔서 함이 없이 한다면 그것이 활공법이죠. 그러니까 그것도 이름해서 활공법이지 그대로 우리가 활공법이죠.

질문자2(남)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런데 아까 나를 죽여야 나를 본다 이랬죠?

질문자2(남) 예.

큰스님 내가 죽어서 모든 것을 놔서 나를 발견한다, 내가 탄생했다 하더라도 갓 난 어린애와 같아서 모든 거를 또 상대와 둘 아니게 죽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첫 번에 ‘내가 죽어야 된다’ 하는 거는 내 자생중생들하고 둘 아니게 죽어야 되거든. 내 자생중생들을 둘 아니게, 동일하게, 나와 더불어 둘 아니게 만들어야 그것이 나를 깨닫는 법이요, 내가 탄생하는 법이죠. 두 번째, ‘둘이 아니게 더불어 죽어야 한다’ 하는 거는, 외부의 모두 나와 둘 아니게 죽어야 하는 것이, 그 도리를 알아야 하는 것이 이제 둘 아닌 도리에 죽어야 둘 아닌 도리를 안다는 거고. 셋째는, ‘둘 아닌 도리를 알기 때문에 둘 아니게 나툴 줄 알게끔 또 거기서 죽어야 한다’는 거죠.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처음에도 죽어야 하고 두 번째도 죽어야 하고 세 번째도 죽어야 한다. 나라는 것이 혼자, 나라는 게 세울 게 없다, 이게 죽는 거예요. 나라는 걸 세울 게 없어요. 모든 것에 고개가 숙여져요. 둘 아니게 고개가 숙여져요. 둘 아닌 도리에 의해서만이 여래(如來)라는 이름이 나왔고 부처라는 이름이 나왔지, 각각 너는 너고 나는 나다 하고 ‘내가 잘 배웠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부처가 될 수가 없고 여래가 될 수가 없고 둘 아닌 도리의 나툼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자유스럽게 말입니다.

질문자2(남) 감사합니다. 큰스님께서 법당을 오르내리실 적에 자명등이 서 있습니다. 그 자명등에 불을 붙여 주시면 그 불이 꺼지지 않게 영원한 자명등이 될 것입니다.

큰스님 이 자명등이 석등(石燈)에, 이 석등이 (대중들을 두루 가리키시며) 너무 많아서 여러분이 전부 석등이죠. 그런데 석등에 불이 원래 켜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움죽거리지요. 하하하. 본래 켜져 있으니 그 본래 켜져 있는 광명의 빛을 바로 자기가 응용해서 보고 비추고, 또 켜고 끄고 하는 것이 없이 켜고 끄고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명등에 불을 켰다 안 켰다, 켜 주고 이런 게 없이 본래 켜져 있습니다. 활활 타고 있습니다. 영원토록 간직하고 활활 타고 있는 건데 타고 있는 그 불을 못 보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못 쓰는 것뿐이고 꼭 그 불은 여러분 앞에 자유스럽게 쓸 수 있게끔 돼 있다는 겁니다. 아까 얘기했죠? 광력·전력·자력·통신력이 충만히 주어져 있다고. 그것이 바로 광명등입니다.

질문자2(남) 잘 알겠습니다.

큰스님 그러니까 석등에 불이 켜지셨습니까?

질문자3(남) 지난달에 스님께 말씀드리고 돌아가면서 ‘나도 이 공부를 하고 중생 구제를 하겠다.’라고 생각은 했는데 진짜 중생 구제란 무엇일까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됐습니다. 내가 진짜 무슨 원력을 갖춰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도 참된 것이 되겠지만, 그게 과연 올바르게 한 것일까를 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스님께 고통을 호소하고 하소연하는 그분들이 스스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걸 확신시켜주고 그게 길고 어려운 길이지만 그 힘을 자신이 스스로 밝혀내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도록 그렇게 이끌어 주시니 ‘중생이 부처임을 알아서 부처가 되도록 이끄는 것이 참된 중생 구제구나.’ 하는 걸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쭙고 싶은 건, 아무튼 그날 가서 스님께 직접 말씀을 듣고 좀 더 확신을 가지고 제가 제 실생활에 한번 체험을 해 보기 위해서 주위의 아픈 분들이나 저의 부모님 같은 경우도 믿고 맡겼습니다. 그런데 잘 안됐습니다. 하지만 한두 번 안된다고 해서 물러날 나도 아니고 내 평생토록 해서 다 맡긴 게 다 안된다 하더라도 나와 둘이 아닌 그 역대 조사들이 피눈물을 흘려 가면서 입증을 해 놨고 대행 스님도 이 땅에서 지금 활활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 놨는데 잘못이 있다면 내가 잘못을 했겠지, 그 마음 도리가 잘못됐다고는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과연 무엇이 모자랐고 내가 뭐가 부족했을까? 그래서 그것을 고쳐 가면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스님께 여쭙고 싶어서 말씀드립니다.

큰스님 맹물이 싫다고 할 때는 설탕을 가미하든 소금을 가미하든 어떤 가미를 해야 잘 먹일 수가 있겠지요? 그러니까 슬쩍 가미를 하라고요. 왜냐하면 때에 따라서는 불을 켜려면 이것도 이어야 되고 저것도, 소켓도 달아야 하고 이러지 않아요? 그런데 그냥 무조건 불을 켜려고 그러면 켜져요, 그게? 허허. 그러니까 가미를 해요. 하나로, 슬쩍. 이 스님도 때에 따라선 끌어다가 쓰라고요. 가미를 해서 줘야 이것이 제대로 먹혀 들어갈 수 있잖아요? 잘해 봐요.

질문자4(여) 큰스님, 반갑습니다. 저는 질문드리려고 이 자리에 선 게 아니고 큰스님에게 단지 감사의 말씀 드리려고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제가 새 생명을 얻어 다시 환생하여 큰스님 앞에 서게 됨을 큰스님께 감사드리며 주인공께 감사드립니다.

지난번 봄, 저는 교통사고가 나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산산조각으로 다 부서졌습니다. 어깨뼈, 갈비뼈 14개, 장 파열과 콩팥 파열, 또 골반뼈 구석구석 다 으스러진 상태에서 병원을 찾았으나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며 다른 병원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병원을 옮겨 그 병원에서 최선을 다해 보자며 두 차례 수술을 하였습니다. 두 차례 걸쳐 수술을 하였어도 저는 회생될 기미가 없었습니다. 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혈구 수치는 3만까지 올라가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부산지원의 스님들과 그리고 회장님의 주선 아래 저의 처사님이 큰스님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친견하고 온 후, 제 몸은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고 백혈구 수치도 조금씩 내려갔습니다. 저는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큰스님을 얼마나 찾고, 주인공을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큰스님! 제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가게 해 주십시오. 주인공! 당신이 있다면, 정말 당신이 있다면 아내로서의 임무와 엄마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당신만은 그렇게 하고 갈 수 있잖아!’ 하면서 주인공을 소리 없이 얼마나 아우성을 치며 불렀는지 모릅니다.

큰스님, 제가 제 고통과 아픔으로 인해 제 이웃의 아픔을 알았고 만물만생의 아픔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큰스님, 저는 누워 있는 동안 너무나 많은 체험을 했습니다만 시간 관계상 그 많은 체험을 말씀드리지는 못하고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에게 매달린 의사들이 분야별로 흉부외과 뭐, 정형외과, 외과, 이비인후과 이렇게 네 분이나 됐는데 그분들 모두 한결같이 저를 지극 정성 보살폈고 또 항상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간호사들도 역시 천사의 손길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제 주인공의 나툼임을 알았습니다. 다른 환자들은 저에게 그랬습니다. 어쩌면 의사들이 아줌마한테만 유독 저렇게 지극히 간호를 하느냐고. 바로 제 주인공의 나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골반뼈 수술을 해야 되는데 골반뼈 수술은 철사로 얽어매는 작업이었는데, 제가 백혈구 수치가 너무나 높아 그걸 못하기 때문에 그게 어느 정도 진정이 되면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래, 주인공! 당신이 이 몸을 병신을 만들든…’, 제가 기침을 하면 그 뼈의 조각조각의 움직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의사한테 말씀드리니 의사가 “그 뼈의 조각들이 골반에 들어갈 수도 있고 자궁에 들어갈 수도 창자를 뚫고 들어갈 수도 있으니 항상 조심하라고 조금만 수치가 낮으면 수술해야 되니 그렇게 작정하십시오.” 하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주인공 이것도 당신이잖아. 당신이 하는 거잖아.’ 그런데 아니, 제가 기침을 하면 이게 자유자재로 그냥 뼈가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옆이. 그리고 며칠 후 제가 손을 살며시 옆의 그 골반뼈를 만져 보니 이 주위가 딱딱하면서 올라와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제가 기침을 하니까 뼈가 움직이질 않습디다. 그전에 기침을 하면 근육에 따라 뼈가 움직였는데, 그래서 의사 선생님한테 제가 말씀드렸더니 “아, 뼈가 제자리로 들어갔는가 보다.” 하셔서 다시 사진을 찍고 진료를 해 본 결과 “아줌마, 안심하십시오. 뼈가 제자리에 다 제각기 찾아 들어갔으니 수술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케이스입니다.” 그래서 천만다행으로 제가 수술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병원에 들어올 때는 모든 사람, 모두 다, 의사들도 가망이 없다 했고 모든 일가친척 주위 사람들이 전부 다 가망이 없다 하는 제가 너무나 급속도로, 정말 급속도로 빠르게 낫기 시작하자 의사들은 제가 화젯거리고 또 관심거리였나 봅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아줌마, 우리가 의술 배운 데 대한 보람을 아줌마한테서 느꼈고 아줌마가 그렇게 참아 주시고 그렇게 해 주신 데 대해서 우리는 참 아줌마가 대견스럽습니다.” 그리고 간호사들도 “아줌마, 아줌마는 기적이고 운이 좋은 겁니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랬습니다. 그래, 당신들이 어찌 이 법을 알겠느냐고. ‘이 광대무변한 이 묘법을 어찌 당신들이 알겠느냐.’ 하면서 제 주인공에게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큰스님, 살지도 못한다는 제가 2개월 만에 퇴원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제가 큰스님에게 그리고 법우들에게 많은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너무나 말이 막혀 말이 나오질 않습니다.

큰스님 그래, 그만해요, 이제.

질문자4(여) 아니, 큰스님. 조금만 말씀드릴게요. 우리 부산지원의 스님들과 그리고 우리 회장님 또 우리 수많은 법우들 저와 함께 항상 한마음으로 저를 이끌어 준 데 대해 너무나 큰 감사를 드리고요. 무지한 저에게 또 이 법을 가르쳐 주신 큰스님께 너무너무 큰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덤으로 얻은 이 육신은 오직 보살행을 하기 위해서 큰스님 법 열심히 따르며 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큰스님, 감사합니다,

큰스님 몰라서들 그렇지, 이 뿌리만이 나무를 맘대로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뼈가 퉁그러진 것도 제자리에 가서 앉을 수 있고, 태(胎)가 잘못 앉아도 제자리에 가서 앉아서 임신을 제대로 하게끔 될 수도 있고 일체 몸을 맘대로 움죽거리게 하는 것은 자기 뿌립니다. 자기 주인공의 뿌리만이 움죽거리게 할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그거를, 아주 더 쉽게 말을 하자면 내 몸속에 있는 의식, 생명, 모습들만이 내 몸을 모두 바꿔 놓을 수 있는 겁니다. 내 몸 안에 들어 있는 의식들이 바로 내가 주인공의 모든 것을 진실로 믿고 맡길 때에 통신이 되는 겁니다. 통신이 되면 그 안에서 통신을 받아 가지고 전부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몸체가 바꿔질 수도 있고, 이렇게 둥그러질 수도 있고 좁아질 수도 있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닥치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순서대로 자기 닥치는 대로 거기에 모든 것을 맡겨 놓으면 어떤 애고든지 불에 타 버린다 이런 게 있습니다. 불에 타 버린다.

질문자5(여) 스님, 저는 부산지원에서 왔습니다. 오늘 스님께서 제일 처음에 단식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신다고 하시기에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단식이 체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고 마음에 관한 이야기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스님께 한 번 더 체내에서도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것이 여쭤 보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큰스님 단식이라는 게 마음의 단식이지, 그 모든 것을 집어먹으면서도 먹는 사이가 없어야죠. 우리가 밥을 먹고도 먹는 사이가 없이 먹었죠. 왜냐하면 내 몸속에 있는 그 모든 생명체들이 같이 먹었으니까 혼자 먹은 게 없죠. 안 그래요? 그러니까 당신 혼자 먹은 게 없어요. 그래서 단식이야.

질문자5(여) 예. 그런데 제가 어떤 인연이 닿아서 그런지 몰라도 올 여름방학 때에 저도 단식을 일주일 해 봤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주일 단식을 하고 난 다음에 어떤 분이 단식에 관해서 여쭈어 보길래 제가 단식한 방법대로 단식을 해 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분은 간암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간암 환자인데 단식을 한다기에 제가 덜컹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단식을 좀 더 전문적인 분한테 여쭈어 보고 하지, 왜 저한테만 물어보고 그렇게 하려고 합니까?” 하니까 꼭 자기 마음대로 꼭 그 방법대로 하고 싶다 하기에 “한번 해 보세요.” 그랬거든요.

그래서 그분이 3일 동안 물만 먹고 그다음에 21일 동안 단식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포도를 조금씩 먹어 가면서 단식을 했는데 그분이 단식을 하고 난 다음에 건강 상태가 좋아졌는지 안 좋아졌는지도 모르는데 계속 꼭 저하고만 이야기를 해 가면서 자꾸 매달리고 있는데, 제가 그 환자를 낫게 해 줄 힘도 없고, 제가 아는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연에서 그런지 몰라도 자꾸만 저에게 이야기를 하고 또 저하고도 마음이 통해 가지고 환자가 지금 치료 과정에 있는데 마음의 치료는 지금 안 되었습니다. 스님, 그분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열 수 있는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큰스님 허허! 그거야 당신 마음대로 해요. 관하는 법을 가르쳐 주든가 또는, 이게 마음의 단식이라는 것은 100%의 규정적인 단식이에요. 이 마음의 단식이라는 것은 몸 안에서 전부 작용을 해 주는 그 묘법의 단식이고, 그냥 음식을 끊어서 단식하는 거는 우리 상식대로 좀, 모든 것을 비워서 병이 낫게 할 수 있다 하는 데서 오는 단식이죠. 그러니까 단식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몸을 위해서 한번 해 보겠다는 단식이고, 이 단식은 마음의 단식이기 때문에 모든 그 전체 마음의 단식에 의해서 전체가 거기 붙어 돌아갑니다. 그러니깐 이 몸속에서 모든 그 단식의 신호가 들어간다면 모든 것이 다 작용을 스스로 해 주게 돼 있으니까요. 그래서 마음의 단식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예전의 부처님들께서도 마음의 단식을 주장했지 몸뚱이의 단식, 먹는 걸 끊어 가면서 단식하는 걸 주장하지 않았어요.

여러분, 열심히 하셔서 자유스럽게 사십시오. 우리는 지금 정신계와 물질계의 교차로에 섰다고 봅니다. 지금 현 시점에서 본다면 말이에요. 그러니까 교차로를 넘어서서 둘 아니게 응용하신다면 앞으로 살기에 억울함이 없이 아마 편안하게, 공심(共心)으로서 공용(共用)을 하고 사실 겁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3년 12월 19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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