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대로 법이고 그대로 묘법이고 그대로 활공법이다!
우리가 그대로 법이고 그대로 묘법이고 그대로 활공법이다!
  • 대행 스님
  • 승인 2018.12.14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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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딱따구리가 나무 쪼듯 쪼아서 뚫고 들어가 앉듯이 해야

 

날씨가 추운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자리를 해 주시는 여러분을 볼 때에 정말 100% 벗어나서 세세생생에 삶의 보람을 가지고 자유인으로서 영원토록 살 수 있는 모두 그런 분들인 것 같습니다. 추우나 더우나를 떠나서 이렇게 물주머니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음들을 가지셨으니 얼마나 갸륵하십니까? 정말 고개가 숙여집니다.

하여튼 그 어항이라는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공부를 생활 속에서 내가 함이 없이 할 수 있게 여러분께서 잘 알아서 행하시도록 노력하십시오. 아무리 부처가 된다, 벗어난다 할지라도, 안다 하더라도 돌다리를 두드려 가면서, 아는 것도 물어 가면서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개별적인 여러분은 없습니다.
개별적으로 혼자 하고, 혼자 살고, 혼자 했고, 혼자 벌었고 이런 게 없습니다.
그런 원리가, 물리가 터져야 우리가 공(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내가 단식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리고자 합니다. 나중에 여러분이 질문하십시오. 알아도 질문이고 몰라도 질문이니까 여러분이 한자리에서 같이 공부하시기 위해서 몰라도 해야 하고 알아도 해야 합니다, 같이 동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단식에 대해서 얘기하기 이전에 진리라는 것이, 불상을 만 불(萬佛)을 모셔 놔도 하나가 빠지게 되는 것이 아마 상례일 것 같습니다. 왜 그 하나가 빠지는지, 또 원효 대사가 설총이더러 쓰레질을 하라고 그랬을 때에 말갛게 쓰레질을 해 놓으니깐 한 무더기 집어서 훌훌 끼얹어 놓은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 까닭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 손 들어 보십시오. (잠시 사이) 죄들, 죄들 부처가 다 되셨어. 부처가 다 되셔서 손 들 것도 없고 안 들 것도 없다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광주에 있는 운주사에 불탑이, 석탑이 천 불(千佛)이 모셔져 있고 뭐, 어떻다고 그러는데 이 공부한 사람들의 의견은, 하나가 있어도 천 불이고 하나가 있어도 만 불이고, 삼십 개가 있어도 삼천 불이 될 수 있고 삼만 불이 될 수 있고, 삼 불이 될 수 있고 삼십 불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와불(臥佛)도 있고, 모두 이렇게 앉아 계신 분, 서서 계신 분, 목이 잘린 분, 다리가 잘린 분, 코가 떨어진 분, 이렇게 모두 다양하게 계신 원인은 이 산중에도 병든 나무 또 죽은 나무, 비뚤어진 나무, 올바른 나무 다 서 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네들의 살림살이에 속합니다. 그 모든 석불들이 그렇게 돼 있는데 말입니다. 아까 원효 대사가 한 움큼 집어다가 끼얹었다고 하지 않습디까? 그러니 완성해 놓은 거는 없어요. 완성이라는 건 없어요. 항상 흐르면 또 들어오고 흐르면 또 들어오고 이렇게 쳇바퀴 돌아가듯 돌아가는 것이 진리지, 완성해 놨다 이러고 벌써 그건 끝이다 이런다면 그 끝이라는 거는 있을 수가 없죠. 그래서 모자라도 모자람이 아니고 잘해도 잘함이 아닌 거죠.

옛날에 제가 어느 모퉁이를 돌아가다 지쳐서 쓰러졌는데 엉금엉금 기어가서 물이 조금씩 흐르니까 그 물을 마시는데, 한 모금 마시니까 삼천 모금을 마셨다는 겁니다. 허, 그래서 또 한 모금을 먹으니까 두 모금을 마셨다는 겁니다. 또 한 모금을 먹으니까 세 모금이 아니라 삼세(三世)의 그 모든 물을 다 마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 ‘가도 없는 것이고 와도 없는 것이고, 마셔도 없는 것이고 마시지 않아도 없는 것이구나. 이 없는 것 가운데에 아주 선명하게 그렇게 나와 있구나. 그 모두가 같이 돌아가지만 모습이 다 달라서 천차만별로 각계각층으로 차원이 되고 그렇게 모두 다 다르구나.’

다르면서도 그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법이 돼서 바깥 현상으로 나오게 되고, 현상으로 나오면 그것을 우리가 법이라고 합니다. 그 모두가 이렇게 되는 마당에서 끝을 마치려고 하지 마시고 ‘꼭 이것을 알아야겠다.’ 하는 마음도 한 찰나에 놓고, 그다음에 또 알아야겠다 하더라도 놓고 놓고 하루살이로, 한 찰나로 사셔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지루하지 않고 항상 멋진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항상 공부하는 사람들이 “단식, 단식” 그러는데, 단식이라는 게 밥을 굶고 먹을 걸 안 먹어서 단식이 아닙니다. 본래는 단식이라는 그 구절이 왜 나왔느냐? 모든 스님네들이 공부를 할 때에 ‘너는 단식하는 법을 알아야 된다.’ 이랬습니다, 선지식들께서 말입니다. 그래 단식이라 함은 공양을 먹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고 끊는 것을 단식이라고 간단하게 생각들을 하지요. 그런데 그런 게 단식이 아닙니다.

근본 단식은 바로 우리가 먹어도 먹는 사이 없이 먹는 것이 단식입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여러분이 아무 생각 없이 걸어왔기 때문에 그것도 단식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이 왔기 때문이지 만약에 발걸음을 걷는 대로 내가 움켜잡고 왔다면 그건 단식이 아니죠. 그리고 항상 먹는 거니까 먹는데 이걸 먹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고 먹습니까? 그냥 먹게 되면 먹는 거죠. 또 똥을 누는 데도 ‘이걸 눠야 될까, 안 눠야 될까.’ 하고 똥을 눕니까? 하하하. 일상생활이 그대로 단식이며 그대로 활공법(活空法)이며 그대로 하고 계십니다, 지금 전부 그렇게 돌아가고 있죠.

그런데 본래 가지고 있는 거를, 활용하면서도 여러분의 마음이 관습이나 그 착, 욕심 이런 것에 끼여서 말갛게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볼 수가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발을 떼 놓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모르시는 겁니다. 우리가 그대로 법이고 그대로 묘법이고 그대로 활공법이다 하는 것을 제대로만 안다면 아마 그대로 넉넉할 겁니다. 그래서 이 단식이라는 것이 ‘닥치는 대로 먹되 먹은 사이가 없다’ 할 때 단식입니다. 단식이란 말도 안 하고 지금 우리는 단식을 하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이해가 가게 하기 위해서 몸속에 많은 자생중생들이 있는 것이 바로 자기니까, 자기가 그렇게 많이 있으니까 혼자 먹는 게 없다 이렇게 말을 해 드렸습니다. 혼자 먹는 게 없고, 혼자 보는 것도 없고, 혼자 듣는 것도 없고, 혼자 가고 오는 것도 없고, 혼자 만남도 없고, 혼자 돈 버는 것도 없고, 혼자 망한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여러분은 여여하게 걸림 없이 이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돼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지수화풍이 본래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그 바탕으로 인해서 광력이나 자력, 통신력, 즉 전력, 이 모두가 갖추어져 있는 겁니다. 못났든 잘났든, 부자든 가난하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본래 가지고 있습니다.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항상 얘기하기를 잘되는 것도, 비유해서 구정물이라면 새 물로다가 바꿔 놔야 하는 거죠. ‘구정물이 나오는 거라면 새 물도 나오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대치를 해서 바꿔서 거기 놔라 이겁니다.

구정물이 나오게 입력이 돼 있으면 구정물만 나옵니다. 아주 똑같이 말이에요. 그거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에서 나오는 거라면, 그 뭇 의식들이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거라면 바로 대치를 해서 ‘그것도 한마음 속에서 구정물이 나오는 거니까 그 속에서 새 물이 나오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대치를 해서 거기다 놓는 겁니다. 이게 굴려 놓는 거라고 합니다.

이 주인공을 믿기는 하되 굴려 놓지 못한다면 바로 생활에 지장이 있는 것도 타파를 못합니다. 생활에 지장을 주고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것을 어찌 다 타파를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 마음으로 하는 거는 돈이 드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자유스럽게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물리가 터져야 되고 지혜가 생겨야 되니까, 항상 딱따구리가 나무 쪼듯 쪼아서 뚫고 들어가 앉듯이 해야 하는 거죠. 항상 바깥으로 믿고 이름을 찾는 것 말고, 안으로만 믿고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 너만이 낫게 할 수 있다. 너만이 이끌어 갈 수 있다. 너만이 깨치게 할 수 있다. 너만이 물리가 터지게 할 수 있다. 너만이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다.’ 하고. 매사 것, 일거일동 자기가 움죽거리고 하나하나 걸음 떼어 놓는 것까지도 거기에서, 자기 주인공 뿌리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거죠.

여러분께서 이 도리를 배우시면서 체험하고 자꾸자꾸 발전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마음의 발전이 돼야 지혜도 생기고, 창조력도 생기고, 마음의 발전이 돼야 넓게 시야를 볼 수가 있다. 넓게 들을 수가 있다. 그리고 넓게 들을 수 있으니까 한 걸음 떼어 놓을 수도 있고 한 걸음 벗어날 수도 있다. 이 모두가 이렇게 반복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시점을 따라가는 게 아니고 쫓아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이 자유스럽게 삶을 살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 설해 드린 겁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를 보아도 상대에게 기도를 하고, 상대에게 원을 세우고, 상대를 믿고 스승을 삼고 이렇게 합니다. 그것은 아니 됩니다. 석존이 여기 계시다 할지라도 석존의 고깃덩어릴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을 세워야 석존의 마음이 내 마음을 통해서 바로 내가 됐다 석존이 됐다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말입니다, 여러분은 몰라서 그러실지 모르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꽃도 내가 되고 나도 꽃이 되고, 석존도 내가 되고 또 내가 석존이 되는 겁니다. 또 수많은 중생들 이 안에서도 내가 됐다가 그네들이 됐다가 맘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우리들한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한생각 하기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어느 스님이 와서 묻기를 “스님!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길래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생각하시면 없는 겁니다.” 하니까 “올해는 잘 보는 사람이 그러는데 물에 빠져 죽을 운수라고 하면서 물가에 가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없습니까?”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스님이 만약에 물귀신이라면 물귀신한테 말려서 죽을 거고 선자라면 물귀신하고는 멀 겁니다. 스님의 마음이 물귀신이니 물귀신한테 말려 죽을 수밖엔 더 없지 않습니까?” 하니깐 고개를 끼우뚱하고 가십디다.

그러고 나서 몇 달 후에 다시 오셨어요. 연세가 많이 드신 분인데 누군지 난 이름도 모릅니다마는 아니, 물가엘 안 나가려고 아주 애를 썼는데 초대를 받고 가다 보니깐 그 초대받은 집에 계단이 이렇게 있는데 거기를 물로, 스님이 오시니까, 말짱히 씻어 놨던 모양입니다. 고무신을 신고 올라가시다가 물에 미끄러져 가지고는 그냥 곤두잡이를 쳐서는 허리를 다쳐서 몇 달을 못 일어났다고 하십디다. 그래도 물귀신이 없느냐 이겁니다. “아, 이렇게 봉변을 당했는데도 없습니까?”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스님이 물귀신한테 말려서 죽을까 봐 애를 쓰는 마음이기 때문에 물귀신한테 말린 거지, 스님의 그 마음이 물귀신이지 다른 게 물귀신이 아닙니다. 스님 마음이 물귀신이기 때문에 그 마음에 바로 몸이 말린 겁니다. 그래도 알아들으셨는지 못 알아들으셨는지 그냥 그러냐고 그러고 가십디다. 그리고 여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돌아가셨는지 모르죠.

그랬듯이 이게 어줍지 않은 말 같지만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금방 이 장사가 망해서 훌떡 넘어가게 생겼는데 한생각을 몰아서 그냥 쫙 해 버리니까 활기를 띠고 일어났답니다. 이 한생각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여러분은 한생각을 우습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지만 한생각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한생각이라는 것은 공덕을 말합니다. 한생각이라는 것은 여러분의 한생각 속에 이 내면의 의식들이 한데 합해 주고 외부의 모든 일체제불의 마음이 한데 합쳐 주는 한생각입니다.

개별적인 여러분은 없습니다. 개별적으로 혼자 하고, 혼자 살고, 혼자 했고, 혼자 벌었고 이런 게 없습니다. 그런 원리가, 물리가 터져야 우리가 공(空)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공해서 내세울 게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가 항상 생활 속에서 발을 떼어 놓고 움죽거리고 눈을 뜨고 귀를 떠서 듣고 이렇게 살아도 혼자 그렇게 듣고 보는 게 아니라는 거, 내가 혼자 그렇게 봤다 들었다 산다 할 수가 없다는 거, 그런 생각이 든다면 바로 이 속에서 ‘어허! 너 아집도 참, 꽤 많구나.’ 이렇게 아마 되풀이할 겁니다. ‘내가 이렇게 작용을 해 줘서 네가 다니는 줄 모르고 허, 나를 갖다가 무시하고 네가 이렇게 했어?’ 하고 아마 ‘너 그러면 좀 망해 봐라.’ 이럴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아집을 갖지 말고 공심(共心)으로, 공용(共用)으로, 공체(共體)로 공식화(共食化)하고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서 알면 모두가 유해집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갈고리를 쥐고 찍으려고 하더라도 아주 상대방까지 유해지고 찍는 것이 슬며시 놔진다 이 소립니다. 모두 악해졌던 마음들이 선해져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 화(化)해서 바뀐다 이 소립니다. 그러면서 나도 이익하고 상대도 이익해져서 인과응보에서 벗어나고 또 유전성에서 벗어나고 영계성에서 벗어나고, 모든 게 한마음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세균성에서도 벗어나고, 이 일체 업보 속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자유스러워진다 이겁니다. 누구가 “자유스러워라. 자유스럽지 마라.” 이런 억압적인 일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자유스럽게…, 이쪽으로 가면은 구덩이에 빠질 건데도 불구하고 스스로서 안에서 이쪽으로 가게 해서 스스로 잘 이룩하게 만드는 자동 컴퓨터에서 나오는 그런 자유스러운 생활 말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 어떻게 상대를 모두 원망 안 하고 내 탓으로 돌리면서 돌아가느냐? 어떤 사람은 내 탓으로 돌려라 하면 “내가 뭘 잘못해서 내 탓으로 돌립니까?” 합니다. 그러나 잘못하고 잘하고 이걸 떠나서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벌써 내 탓이죠. 항시 얘기합니다마는 소가 가다가 언덕이 없으면 비비지 않습니다. 언덕이 있기 때문에 비비죠. 그런 까닭에 우리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이 태어난 자체가 바로 탓입니다. 잘못하고 잘하고 간에 말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질문하기로 작정을 했으니까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남) 질문을 적어 왔습니다만 할까 말까 했는데 스님이 앉으시면서 질문하시라 하고 용기를 주셔서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께서 평소 ‘말이 한데 떨어지고 있다’고 애타하시는 말씀을 자주 하시고, 항상 말이 법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알고 있기로는’ 하신 후 없는 나를 앞세우신 후 설법하심을 보여 주시며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공부를 하여 참자기를 만나면 비밀이라는 용어가 탄생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고 싶어 여쭈고자 합니다.

세간에서 악담이나 비방은 당장 따귀 한 대라도 돌아오니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지만 한마음 공부를 하여 마음의 힘이 생겨 자신의 말이 무심코 법이 됨을 모르는 경우가 많고, 또 알지 못하므로 공든 탑이 무너지듯 잘될 것도 안 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렇게 봅니다. 어떤 때는 남을 위한다는 말이 외려 화가 되는 경우도 있고, 지나친 충성은 역적이 될 때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간사한 말이나 남을 헐뜯는 경우, 그 대가는 즉시 알 수 없고 그게 사실인 것으로 아는 부화뇌동한 사람들에게까지 공통 업을 만들지만 이를 알지 못하고 지냅니다.

옛날 부처님께서 신선으로 수행 중에 무심코 한 번 화를 내었더니 그곳 고을에 삼 년이 가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고초를 당하고, 이런 일로 인하여 내생에는 사슴의 몸을 받아 축생으로 보낸 일도 있다는 기록을 옛날에 읽을 때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가 다 있나 했으며, 부처님을 이상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큰스님의 뜻을 따르다 보니 깊은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있을 땐 부처가, 생각을 내면 왜 법이 되고 법신(法身)이 되어 말이 업이 되는가를 명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저 등 너머 산이 또 있는 줄 몰랐더니 큰스님께서 “법은 행이 따르는 거야.” 하시는,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닌 도리를 말씀하심에 한생각에 따라 영계성, 윤회성, 업보성이 나타나고 십이인연이 생김을 이해하게 되니 생각이나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음에 놀랐으며 제법무아(諸法無我)의 뜻과 계(戒)·정(定)·혜(慧)를 다시 한번 되새겼습니다.

제가 여기서 여쭙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이고 대수롭지 않은 말임에도, 길잡이가 못하게 할 때가 있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것도 비밀을 지켜야 됨은 무슨 도리가 있기에 그러하며 이러한 것을 두고 천기누설이라고 하는 것인지요? 그리고 업식에 속아 자승자박하는 경우가 한데 떨어지는 것이라면 유(有)의 행은 하되 유위에 젖지 않는 가르침을 구하고자 합니다.

큰스님 말 다했소?

질문자1(남) 예.

큰스님 하하하. 아니, 그게 무슨 질문이오? 용건만 딱 얘기하라는 거지.

질문자1(남) 일반적이고 대수롭지 않은 말임에도 길잡이가 못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비밀을 지켜야 된다는 그런 뜻인지 그걸 알고 싶습니다.

큰스님 다시 한번 말하겠소?

질문자1(남) 일반적이고 평상적인 이야기 같은데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마음에서 못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건 비밀을 지켜야 된다는 뜻인지 그걸 알고 싶습니다.

큰스님 아, 못하게 하는 것도 자기요, 하게 하는 것도 자기니까 그건 자유스럽게 그 가운데서 알아서 말하는 거지요. 그리고 행하는 거지. 그 비밀도 비밀 아닌 것도 그 속에 다 있어요. 그것을 말로 가르쳐서는 가르칠 수가 없는 거고, 하여튼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들어서 안 되는 게 있고 들어서 될 일이 있고, 들어서 새길 일이 있고 들어서 할 일이 있고, 봐서 할 일이 있고 보았으면서도 보지 않게 버리는 게 있고, 이렇게 자유스럽게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게끔 돼 있지 않습니까?

질문자1(남) 예. 스님 법문 중에 생각을 내어서 맡겨야지, 그냥 맡기면 그 집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어 심부름꾼이 심부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가르침에 처음에는 유위적으로 이해가 되었고 저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어 소상히 알고자 합니다. 즉, 내가 없는데 누가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되는지요? 금전적 걱정이 날 때 생각을 내어 보면 길잡이가 아예 마음조차도 내지 못하게 하여 건성적 생각만 할 뿐 마음으로 굴릴 수 없어 맡길 것도 없고 생각 내는 그 자체가 오히려 둘이 되는 것 같아 퇴보함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납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문제가 부닥치면 생각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내게 하는 놈을 관(觀)해 보면 생각 내는 놈이 없고,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면 그 이름조차도 둘이 되는 것 같이 느껴지고 군더더기가 되어 거부감이 듭니다.

큰스님 이, 묻는 거를 그렇게 길게 물으면 어떡합니까? 하여튼, 그 말뜻은 우리가 배우는 측에 있어서 맡겨 놓는다. 이렇게 맡겨 놓는 그 선을 세워야 우리가 마음이 안유가 되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러나 걷지도 않고 뛰려고 한다면 안 돼요. 지금 말하는 거 보니까 걷지 않고 뛰려고 하거든요. 내가 진짜 걸어 보고 내가 뛸 수 있어야 뛰는 것이지 걸어 보지도 않고 뛰려고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돼요. 댁이 그 뜻을 알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렇게 묻질 않아요.

내가 “놓을 것도 없다. 놓을 것도 없는 데에 놔야 된다.” 이런 것은 뭐냐 하면 “돌려놔라. 돌려놓지 못하면 입력된 게 그대로 나온다.” 입력돼서 나오는 거는 피할래야 피할 여지가 없어요. 그러니까 입력돼서 나오니까 그것을 다시 바꿔서 입력을 해라 이 소린데 이 세상은 굴리면서 살고 구르면서 살고 끝없이 바로 이어져요. 굴림을 모른다면 바로 나라는 게 세워지기 때문에 동참을 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 아는 게 있기 때문에, 당신이 세울 게 있기 때문에, 놓을 게 없다고 하는 것은 세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놓기는 뭐를 놔요. 그건 벌써 나라는 거를 세우는 거라고요. 한번 다시 정립해서 놓을 게 없든 놓을 게 있든 몰락 놔요. 이게 틀리다, 이게 옳다 이러지 말고 말이에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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