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분이 수가 없이 많다 하더라도 한 불바퀴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기둥에 대해서

질문 큰스님 법문 중에 어느 소녀가 홀로이 배고픔도 이기지 못하고 추움도 이기지 못해서 닥치는 대로 먹고 닥치는 대로 불을 지펴서 그 불씨는 그대로 불기둥이 돼서, 천 길이나 되게 불길이 솟았고 그 둘레는 만 둘레나 되니, 오고 가는 사람이 모두 두루 옷을 벗고 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꺼지지 않는 불기둥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가르침을 얻고자 합니다.

경을 보고 배우는 것도 자기의 마음 다스림에 의해서 결부돼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경만 읽으면 잘되는 줄 알아서는
도저히 부처님의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변 요거 한마디를 더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과 땅을 꿰고 뚫어서 인간 주처 자체하고 결부된 이 자체를 바로 전력이라 해도 좋고 에너지라고 해도 좋습니다. ‘요걸 어떻게 해야 여러분이 잘 알아들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에너지가 불타고 있듯이 있는데, 그것을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능력을 배출시킬 수 있는 그 무한의 기둥, 불기둥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지 않는 데 이 마음으로써 거기다가 만약에,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병이 났으니 이 병을 너밖에 해결할 수 없다!’ 하면 그 불기둥에서 자연적으로 약사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빈손이 하나 나와서 병이 난 사람한테 결부가 됩니다. 바로 한 찰나에 결부가 돼서 한 찰나에 그 병을 없애 줍니다. 예를 들어서 불기둥에서 나간 거니까 불로다가 그냥 제거시키는 거죠. 어떤 거든지 막론하고 제거가 되는 거죠.

그러면 거기에 빈손들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많겠습니까? 빈손이 말입니다. 우리가 거기에다가 ‘명이 짧으니 명 좀 길게 해 주십시오.’ 한다면 칠성부처의 빈손이 나오게 돼 있거든요. 칠성부처라는 그 이름이 빈손에 쓰여 있어요. 허허허…. 그래서 그 칠성부처의 빈손이 나와서 한 찰나에 결부가 돼서 그 명을 다소나마라도 이어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죠. 그것뿐이 아니라 지장보살의 빈손도 있고 산신의 빈손도 있고 주해신, 주림신 뭐, 모두 우리가 연결할 수 있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내 앞에 닥치는 대로 그 불기둥에 넣으면 자동적으로 빈손의 그 이름이 탁 나오면서 자기와 결부가 되는 거죠. 과학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원자의 그 기둥 안에서 입자가 수만 개가 있는데 그 입자가 나올 때는 바로 입자 하나에 칠성부처니 지장이니 뭐, 전부 헤아릴 수가 없이 그렇게 나와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응신이 돼서 찰나에 이끌어 주신다 이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처님의 한생각이 아촉이요, 한생각이 아미타요, 한생각이 지장이요, 한생각이 관세음이요, 한생각이 그렇게 천차만별로 나툽니다. 그거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응해 주는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니 물에서 죽게 됐을 때는, 즉 말하자면 해신으로서 생각을 하게 하면 금방 용신이 돼 버립니다. 용신이라는 것은 작용을 하는 걸 말합니다. 생각만 하고 작용을 안 한다면 무효죠. 그래서 부처님의 한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한생각을 내시지 않는다면 법신이 없고, 법신이 없다면 바로 보현신이 없어요, 작용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대로 우리에게 지금 생명의 근본, 그 뿌리인 근본이 있고, 생각을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법이고, 작용하는 것이 바로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작용하면서 지금 살고 계시는 생활 속에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부처님도 계시고 도심도 있고 도도 있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부처님을 찾고 경전을 보기 이전에 내 마음부터 그렇게 단련을 해 가지고 경전을 한번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싱그럽고 광대무변한 것인지를 아실 겁니다. 경이라는 것도 교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다스리면서 배우고 나갈 수 있는 교입니다. 그 경을 보고 배우는 것도 자기의 마음 다스림에 의해서 결부돼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경만 읽으면 잘되는 줄 알아서는 도저히 부처님의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마음대로 못하고 대치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차원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릇으로 비유한다면 종지가 있고 접시가 있고, 조그만 게 있고 큰 게 있고, 사발이 있고 대접이 있고 큰 자배기가 있고 이렇듯이 말입니다. 사람도 종지와 같은 차원의 그릇이라면 간장밖에 담을 수 없습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여러분의 차원이 접시라면 그저 나물 무친 거밖에는 놓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이 바다가 되라 이 소립니다. “그 불기둥에 놔라. 놔라.” 하는 것은 한바다에 물 몇 그릇 붓는다고 두드러지지도 않을 것이고, 물 몇 그릇 퍼낸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맑은 물, 더러운 물, 구정물, 흙물, 핏물, 고름물 할 거 없이 다 들어가도 다 바닷물일 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가라앉혀서 그대로 양식이 돼서 만생을 다 먹이고도 남을 수 있게끔 되는 것이 바다의 이치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넓고 광대무변한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이 마음 하나가 지금도 여러분의 집을 점프해서 갔다가 올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밥통에 밥해 놓은 것도 볼 수 있고 자기 가정에 무엇을 해 놨는지 볼 수 있듯이, 공부를 하면 그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무엇을 해 놓고 살고 있고 무엇을 어디다 두고 한 것까지도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보고 계시죠? 그렇다면 빛보다 더 빨리 가서 보고 오신 거 아닙니까? 그러니 말입니다, 이 공부를 하게 되면 그냥 아무 데나 보이는 게 아니라, 내가 그쪽 것을 보고자 해서 그것이 찰나에 봐질 때, 한 귀퉁이만 보는 게 아니라 전체 첨보해서 보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귀중한 공부입니까?

제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질문 저는 공부한다고 놓고 가는 과정에서 매일매일 무엇이 튀어나올 때, 놓는 게 너무나 귀찮아서요, 어느 날 ‘아이, 그러면 한꺼번에 몰락 놔 버리지 왜 이렇게 하나하나 놓느라고 고생을 하는가.’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몰락 놔라.” 하는 소리를 계속 외치고 다녔거든요. 그랬더니 갑자기 제가 사라지는 거 같았습니다, 느낌에요. 그래서 그게 두려워서, 없어지면 안 되겠다 싶어서 막 소리치고 다시 나왔습니다. 그랬는데 최근에 한 6, 7개월 전에도 놓고 놓고 가다 보니까 갑자기 제가 사라지는데 ‘이거 이러다 내가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답변 죽어야 본다고 그랬는데 왜 나와요? 하하하…. 아니, 지금 죽으나 요다음에 죽으나 늙어서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진데 말입니다. 내 몸뚱이가 공해서 없다는 사실은 알고 계세요? 그렇지만 알면 뭘 합니까, 실천을 못하는데. 내가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 때문에. 허허허…. 스스로 마음이 걸림 없는 데로 도달을 못했지 않습니까? 사람이 생사를 버린다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어요. 내가 죽든 말든 그냥 버렸는데…. 본래 진리가 버리고 가는 겁니다. 본래 버려져 있어요. 본래 내가 없고 버려져 있는 겁니다. 주인공의 시자로서 몸뚱이를 움죽거리면서 다닐 뿐이지 내가 아니다 이겁니다.

그런데 살아 있을 때 내가 아님을 알고, 참나가 내가 아닌 나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참나’는 정신계고 ‘가짜 나’는 물질계란 말입니다. 이 물질계가 보이지 않으면 또 무효예요. 보이지 않아도 무효고, 정신계가 없고 이 물질계만 있어도 또 무효예요. 보이긴 해도 그것은 안 보이는 거나, 못하는 거나, 중생으로 그냥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살겠다’ 하지 말고요, 그대로 정진력을 길러서 부지런히 뛰세요. 하되 함이 없는 것이니까요. 의욕적으로 무슨 일을 내가 어디까지 해야겠다 한다면 그냥 ‘주인공, 너만이 그렇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뛰세요. 내가 의욕이 없으면 ‘의욕이 있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웃으면서 속으로 그럭하고선 의욕 있게 생각하게 만들고, 화가 나면 ‘화 안 나게 할 수 있는 것도 너 아니야!’ 그렇게 하고 가고, 몸이 피곤해서 드러누워서 일어나지지가 않걸랑 ‘일으키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일어나고요. 아, 그렇게 자유롭게 살지, 왜 고달프게 살아요? 내가 쓸모가 없다면 그만 옷을 벗겨 갈 거고 쓸모가 아직 있다 하면 벗기지 않고 좀 더 둘 거고요. 새 옷을 입히듯이 말입니다. 지금 여러 말을 했는데 가늠이 됩니까?

다 함께 마음을 내시는지요

질문 이 지구상에 마음공부 하시는 분이 또 있으리라고 전제하고 여쭤 보겠습니다. 가령 그런다고 할 때, 세계적인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면 그분들은 다 함께 그 일을 하시게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잘 물으셨습니다. 이거는 ‘마음을 낸다, 안 낸다’ 이런 언어도 붙지 않습니다. 내가 항상 이렇게 말했죠? 우주와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과도 가설이 돼 있다고요. 우리 각자 개개인이 자가발전소라면, 종합된 발전소가 있습니다. 이거를 바로 불바퀴라고 합니다. 법바퀴라고도 하죠. 그럼 또 이런 말을 한마디 더 해야겠습니다. 깨달은 분이 수가 없이 많다 하더라도 한 불바퀴입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돼 있어요. 낱낱의 물방울이 수천수만이라고 하더라도 물방울이 여기 이 물컵에 다 들어가면 한 그릇입니다. 한 그릇! 진리라는 게 자동적으로 돼 있습니다.

그래서 벌써 이런 일이 생겨서 퍼뜩 알았다 할 때, 모두 불바퀴에 본래 직결이 돼 있으니까 한 찰나에 통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사람이 마음을 내면 스위치가 올려지는 격입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그러면 거기에서 한 찰나에 회의가 벌어지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것도 자동적입니다. 회의가 벌어졌다가 그 모든 응신(應身)들이 거기에서부터 다, 가설이 된 대로 그냥 자동적으로 전력이 나오듯이 이렇게…. 이거 이해가 갑니까?

짐작이 가라고 하는 건데, 그럼. 허허허…. 발전소에서 발전소로 하달이 돼 가지고, 그때는 그냥 그대로 전력을 뽑아 쓰는 겁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에 또 마음을 낸다, 안 낸다 할 것도 없죠. 보고 들었으면 그대로 감지가 돼서 그대로 그냥, 그대로 자동적으로 가는 사이 없이 오르고 내려서 오른다 내린다 하는 언어도 붙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그거를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직결이 돼 있는 것도 모르고, 가설이 돼 있는 것도 모르죠. 위로는 직결이 돼 있고 아래로는 가설이 돼 있으니까 그냥 자기의 그 한자리에, 가설이 돼 있는 자리에 놓으면 될 텐데, 그 가운데 스위치만 올리면 될 거를, 그거를 몰라서 자기한테 불이 들어오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있다, 없다’ 이런 것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텔레비전에서나 뭐, 이런 데서 방송이 되면, 할 것은 하고 또 과거와 현재 미래를 딱 한데 놓고 한생각 하면 컴퓨터에 그것이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 가지고 자동적으로 나옵니다. 한생각만 넣으면 그냥 그냥 자동적으로 나오듯이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항상 하는 말입니다. 모든 거를 용광로에 넣는 작업만 한다면 생산돼 나가는 것은 자동적으로 생산이 돼 나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거기다 놔라 이런 말입니다. 이런 뜻도 다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뿐만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생겼다 하면 벌써 태양계로 은하계로 다 통하게 돼 있고 그것은 뭐…. 그래서 대천세계, 소천세계가 한데 합쳐져서 중천세계입니다, 우리 사는 데가. 이러니 모두가 종합돼서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뭐, 어디에 깨달은 사람이 많이 있어서 같이 마음을 내 주는지 어쩌는지 하는데, 같이 마음을 내다 보면 그것이 어떻게 찰나가 됩니까? 그리고 같이 어떻게 마음을 낼 수가 있습니까? 인간이 마음 내는 거는 사량적입니다. 인간 이전에 ‘참’, ‘참 진(眞)’이 거기 한데 모여서, 직결되고 가설이 돼서 모두 그렇게 마련이 돼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얘기한 대로 한 불바퀴에 모든 것이 직결돼 있기 때문에 딱 스위치만 올리면 거기에서 응신들이 출발을 해서, 이 사바세계에 어떠한 문제가 있을 때, 즉 말하자면 그 나쁜 마음 속에 전부 응신이 돼서 들어갑니다. 응신이 돼서 들어갔다가 한 찰나에 나시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그 마음들이 다 바꿔집니다. 그러니까 몸, 활동도 바꿔지죠, 마음이 바꿔지니까.

여러분 몸뚱이 속에 수십억의 그 중생들이, 만약에 이런 공부를 각자 하신다면 천백억의 화신(化身)으로 화(化)한단 말입니다. 그 중생들이, 업식이 그냥 화해서 화신이 돼 버려요. 화한다고 그래서 ‘화신’인 겁니다, 바꿔진다고 해서. 그런데 또 상대방한테 들어가서…, 돼지가 만약에 응해 달라고 하면 돼지한테로 들어가야죠? 돼지가 돼 줘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응신이라고 합니다. 법신(法身), 응신(應身), 보신(報身) 이렇게 합니다. 그것은 한 찰나에 들고 나기 때문에, 예를 들어 미국에서 “스님! 이러이러합니다. 지금 피가 멈추지 않습니다.” 또 중국에서 “어이구, 이거 피가 멈추질 않아서 오질 못합니다.” 그럴 땐 응신이 아니고는 아니 되죠. 가고 옴이 없이 한 찰나에 들어야죠? 한 찰나가 아니라면 그거는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응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을 건지는 데는, 돼지가 사람을 보면 둘로 보지만 돼지가 돼지를 볼 때는 하나로 봅니다. 그래서 저항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돼지뿐이 아닙니다. 꽃이나 무정물이나 식물이나 짐승들이나 나는 짐승들이나 또 곤충이나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접근을 하면 의심을 하고 돌아가죠? 아는 사람이라면 아주 재깍 접근이 되죠.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으로 변신을 해서 접견하는 거죠. 이것이 바로 화신이자 응신입니다. 그와 같이 그 모든 일은 그렇게 직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직결돼 있는 데는 모든 자가발전소가 한데 합쳐진 자가발전소요, 지금 가설이 된 데는 현재 세상이란 말입니다.

원식을 공식이라 하시는 이유

질문 큰스님의 법문 중에 “수·상·행 이것이 식이 따로 없이 식이 식으로, 원식으로 들어가요. 그게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한데 합쳐서 이렇게 해서 원식이 됩니다. 경전에는 원식이라고 하지만 나는 공식이라고 합니다. 그냥 ‘공식’ 이렇게 하면은 이게 공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공용이 공용으로 화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을 여기에서 한데 합쳐서 작용을 해 주는 거죠. 중용으로 작용을 해 주는 거죠.”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혜가 부족해서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원식을 공식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저희들의 삶과 연결해서 쉽게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우리가 보통 살아나가는 데 그런 생각들을 안 하시고 살죠. 우리가 공생으로 삽니다. 공생으로 살죠? 우리 몸뚱이 하나를 보더라도 공생입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그 까닭에 공심입니다. 그리고 또 공체입니다. 얼마나 그 생명들의 체가 많습니까. 공체입니다. 그리고 이 움죽거리는 것도 공용입니다. 모두가 분야 분야를 맡아서 움죽거리는 겁니다. 그런데 분야 분야 맡아서 움죽거리는 자체를 공용으로 합니다. 움죽거립니다. 그런데 그 공용으로 움죽거리는 거를 원식에서 이렇게 모든 거를…, 이게 말하자면 공식으로서, 공식이라고도 하고 원식이라고도 합니다마는 이게 이 모든 거를 이렇게 해 나가는 데는 우리가 이 살아 있는 모습으로서는 이렇게 집어먹는 데도 시간이 가고 그러지만, 하나를 집어먹어도, 전체를 집어먹어도 이거 집어먹는 사이가 없이 집어먹게 되고, 함이 없이 하게 되고, 주는 사이가 없이 주게 되고, 모든 게 무너지는 것도,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도 한 찰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공식. 원식이 공식입니다, 즉 말하자면. 공식으로서 우리가 해 나가는 데는 그 여러 가지 공생, 공심, 공체, 공용이 한데 모두 어우러져서, 즉 말하자면 원공이죠. 원식이죠. 그게 어우러지지 않는다면 도저히 그거는 할 수가 없는 거죠. 동떨어졌으니까. 그래서 공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포함해서 전부.

또 천도재를 하는 것도, 그렇게 해 놓지 않아도 할 수 있지만 여러분들이 배우는 까닭에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보이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집에서도 그렇게 간단하게 한다면 아주 제사가 돌아와서 뭐, 일 년에 몇 번이니 몇 번이니 하고 괴롭게 생각 안 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원은 또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살아가면서 살던 그 습이 있어서 죽어도 자기가 죽은 줄 모르고 사는 거예요. 자기가 죽은 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먹는 거를 생각하고 입는 거를 생각하고 사는 집을 생각하고 이렇게 하게끔 돼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친척들로, 인연 있는 집들로 이렇게 돌아치고 하는 문제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거를 그대로 부처님 가르친 대로 그대로 이렇게 일러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그 모두를 볼 때…, 우리도 부처님 한 분만 모셔 놨죠. 이 한 분에서 족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는 보살이라는 이름이 없었단 얘기죠. 부처님의 그 제자 되시는 분들하고 이렇게 서로 묻고 서로 대답하고 이렇게 하셨지 보살이라는 이름을 내놓질 않았단 얘기죠. 그 후에 보살이라는 이름을 씌워야 모두 가르치겠다 해서 씌운 겁니다. 그게 부처님의 마음을, 즉 말하자면 할 일이 많으니까 “이 부서는 이거 지장으로 이름을 지어서 맡아라. 이 부서는 관세음으로 맡아라. 이 부서는 칠성으로 맡아라.” 이렇게 여러 가지로, 가지가지로 맡고 자기의 진짜 보살은 보살이 아니라 연등불이다, 자기 자성불은. 자성불은 연등불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연등불이라고 한다면 연등불이 자기한테 뜻을 내린 것을 우리가…, 부처님께서도 나를 석가가 되라 이렇게 하셨다고 그랬죠? 그러한 모두를 이렇게 주신 것이 바로 자기가 자기한테 주신 거라 이겁니다.

그래 깨친 분들은 다 얼굴만 쳐다보지 않아도, 말만 들어도 벌써 몇천 리, 몇만 리, 몇천 년이 지났어도 알고 있단 얘기죠. 그렇게 되니까 뭐, 걸림이 없죠, 모두가. 그러니까 한 분으로, 이 진리는 하나니까 수십만 명이 깨친다 하더라도 한 분입니다. 일 불입니다. 일 불이 천체 허공에 꽉 차려도 차고 일 불이 아주 좁쌀 알캥이만 하게도 될 수 있고 아주 모습이 없을 수도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부처님이 없는 것이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너무나 광대해서 저렇게 가만히 앉아 계신데도 우리들 몸과 둘이 아니요, 우리들 마음과 둘이 아니요, 우리들의 생명과 둘이 아니요, 우리들과 둘 아니게 항상 이렇게 굴리신다.

그러니까 우리의 이 마음이, “항상 너희들의 마음이 지장이 되고, 너희들의 마음이 관세음이 되고, 너희들의 마음이 모든 부서에 이름을 다 가지고 너희들 자유스럽게 쓰는 대로 써라.” 지장으로 될 때는 지장으로 되고, 아버지로 될 때는 아버지로 되고, 또는 부인으로 될 때는 부인으로 되고, 남편으로 될 때는 남편으로 되듯이 보살이 지장이다, 관세음이다 이러더라도 내가 거기에 맞춰서 쓸 거는 그냥 그럭하면 지장이 자동적으로 돼요. 또 그 부서의 용도에 맞춰서 하면은 그냥 관세음이 되고 그렇게 자동적으로 돌아가요. 그런 거를 갖다가 멀리만 생각하고 여럿으로만 생각하니까 도무지 배울 수가 없는 거죠. 이건 우리가 간단하게 배울 수 있는 도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교리로서의 경전을 이렇게 한 거는 우리가 살면서 그 도리를 알아 가지고 자연스럽게 쓰는 겁니다. 그래서 경과 선이 둘이 아니다 이런 겁니다. 우리가 몸뚱이와 내 불성이 둘이 아니다. 배와 선장이 둘이 아니듯이 운전수와 차와 둘이 아니듯이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질문하는 데 대해서 이렇게 얘길 하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서 이렇게…. 그러니 따로따로 보살을 찾고 따로따로 부처를 찾고 그러지 마시고 부처는 자기 내면의 한군데 있으면서…, 우물이 하나 들었다고 그러세요. 내 가슴속에 우물이 하나, 샘물이 있는데 그 샘물 속에서 그 샘물을 퍼 가지고 그 천차만별로 쓸 수 있다 이런 뜻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