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기수 정기환

실수로 살인을 저질러 무기수가 된 정기환 씨 이야기다. 그는 아내의 뒷바라지로 출소까지 할 수 있었다. 정 씨는 우여곡절 끝에 새 삶을 사는 듯했지만 출소 1년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석방을 도운 선의가 오히려 정 씨를 죽음으로 몬 셈이 됐다.

나는 1986년부터 전남 장흥교도소로 교화법회를 다녔다. 해당 지역은 오지였기 때문에 재소자 개개인의 사연이 소문을 통해 속속들이 알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1급 모범수 정기환 씨는 특히 더했다. 정 씨 사연을 들은 교도소장이 그를 돕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눈물겨운 옥바라지 사연 감동해
구명운동 직접 부탁한 교도소장

언론 통해 아내 이氏 소식 확산
각계서 모인 성금 및 탄원서 전달

감형 뒤 15년차 부처님오신날 석방
선행 베풀다가 경운기 전복, 사고사


“스님, 장흥에 참 불쌍한 무기수가 있습니다. 저는 교도관인지라 재소자를 위해 어찌 할 수도 없습니다만, 스님께서 저를 대신해서 그이 구명운동을 좀 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교도소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지만 교도소장이 재소자를 직접 가석방시켜달라고 간청한 경우는 없었다. 나는 놀란 기색을 감추고 교도소장에게 정 씨의 사연을 들었다.

장흥에서 태어난 정기환 씨는 관호마을서 방앗간을 운영했다. 정 씨는 마을이장, 예비군 소대장을 맡으면서 주민들과 사이가 좋았다. 정 씨는 이막례 씨와 중매 결혼을 하고 삼형제를 낳았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가족과 마을을 위해 봉사하며 살았다. 

착한 성품을 지닌 그는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정 씨는 우연히 채무자를 만나 빌려준 돈을 받으려다 죄를 저질렀다. 정 씨는 변호사를 선임할 비용이 없었다. 정 씨는 “술에 취해 잘 모르겠다”는 불리한 진술로 상해치사 혐의가 고의살인으로 변경됐다. 정 씨는 1975년 8월 무기형이 확정됐다.

남편이 기약 없는 복역을 시작한 탓에 부인 이 씨는 세 아들을 떠맡아야 했다. 이 씨는 하루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이 씨는 돼지와 닭을 기르고 남의 집 품을 팔아 돈을 벌었다. 이 씨는 아내로서 정 씨의 옥바라지는 물론이고, 어머니로서도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 쉼 없이 일했다. 

그 결과 큰아들은 부산대에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그리고 이 씨는 장한 어머니상·효부상 등 5차례나 상을 받았다. 농촌에서 땅 한 평 없이, 아이들을 잘 키운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 씨의 옥바라지 사연을 소문으로 들은 교도소장은 감동했다. 교도소장은 정 씨에게 특별 귀휴까지 줬다. 가족들과 회포를 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례적으로 7일의 귀휴를 줬지만, 교도소장은 또 한 번 놀랐다고 했다.

정 씨는 일주일 내내 돼지우리를 짓고 교도소로 복귀했다.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서였다. 그 소식을 들은 교도소장은 어떻게든 정 씨를 돕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정 씨는 나를 만난 후 참회하며 더욱 불심이 깊어갔다. 내가 만난 정 씨는 한 눈에 봐도 선량한 사람이었다.

교도소장의 말을 듣고 정 씨를 직접 만난 뒤, 나는 본격적인 구명운동에 나섰다. 나는 법무부에 정 씨의 감형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탄원서를 내고, 이 씨의 눈물겨운 옥바라지와 정 씨 소식을 언론에 알렸다. 

모 일간지를 통해 ‘쇠창살마저 녹인 이 씨의 옥바라지’가 세상에 알려졌고, 정 씨 부부를 위해 전국에서 기업가, 주부, 회사원, 학생, 재소자 가족 등이 600만원이 넘는 성금을 보내왔다. ‘고난의 일생, 이 여인을 돕자’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캠페인도 일어났다. 실제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린 가수 윤수일 씨가 디너쇼 수익금 전액을 이 씨를 위해 내놓기도 했다.

마침내 정 씨의 형기도 줄었다. 언론의 영향력이 대단했다. 정 씨는 1988년 노태우 前 대통령 취임특사로 20년으로 감형됐다. 이어 정 씨는 수감 15년 만인 1989년 5월 부처님오신날 가석방됐다. 그해 12월 말, 나는 기쁜 마음으로 관호마을에 내려갔다. 나는 대표로 이 씨에게 성금을 전달했다.

출소 이후 정 씨 내외는 서울 자비사로 나를 찾아와 “스님 덕분에 출소도 하고 성금으로 아들 등록금도 낼 수 있었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정 씨가 아내의 덕으로 새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다.

출소한 지 1년 만에 정 씨는 이 씨를 홀로 두고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 인사를 하고 간 뒤 며칠 지나지 않은 때였다. 정 씨 내외가 읍내에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경운기에 타고 있던 두 사람은 5살배기 아이와 마주쳤다. 부부는 어린 아이 혼자서 길을 걷는 것을 보고 측은지심이 생겼다. 정 씨는 길을 잃은 아이를 경운기에 태웠다.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집이 어딘지, 부모님이 누구인지를 물으며 아이를 바래다주던 중이었다. 정 씨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길에 깊게 파인 깊은 구덩이를 보지 못했다. 세 사람이 탄 경운기는 전복됐다. 뒤집힌 경운기에 깔린 정 씨는 그 자리서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씨와 아이는 살았다. 참 기구한 운명이었다.

나는 사고 소식을 접한 뒤 한동안 실의에 빠졌다. 만약 길 가던 아이를 경운기에 태우지 않았다면, 착한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정 씨는 살 수 있었을까. 더 이전에 정 씨가 가석방되지 않았다면, 내가 구명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탄원하지 않았다면 정 씨는 5년 뒤 만기복역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 씨 가족들은 출소만 기다리며 희망을 품고 살았을지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책임감이 무거웠다. 재소자를 위해 구명운동에 나선 것이 회한으로 남았다. 지금까지도 정 씨와의 인연은 내게 아픔으로 남아있다. 
 

삼중 스님이 전개한 구명운동으로 각계서 성금 약 600만원이 모연됐다. 출소 후 새 삶을 살 줄 알았던 무기수 정기환 씨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진은 삼중 스님이 정 씨의 아내 이막례 씨에게 성금을 전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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