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眞實)과 허망(虛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망을 허망이라고 깨닫는 그것이 곧 진여(眞如)이고 여래장(如來藏)이다. 공(空)을 통하지 않고, 허망의 도리를 깨치지 못하고서는 불도를 이를 수가 없다. 망령(妄靈)된 마음이 허망인 줄 깨달으면 허망한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며 해탈을 이루게 된다.

삼라만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거짓인 가(假)이며 색(色)이다. 그것은 모든 현상은 인연에 따라 연생연멸(緣生緣滅)하는 것으로, 공(空)에서 이루어지고 만유만사가 공에서 연기하며, 영원불변의 실체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인 것이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기 때문에 공이다. 비록 실체가 없는 가(假)이지만, 그 속에 공(空)이 있음을 보고 공에서 가를 보면서 자유자재로 쓰는 것을 중(中)이라 한다. 예로 술이 발효돼 식초가 되지만 그 바탕은 술이다. 그러나 식초에 술은 보이지 않지만, 그 가(假)속에서 공(空)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中道)이며 연기법(緣起法)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알고 설명하는 모든 것들은 마음이 만들어 낸 환영(幻影)일 뿐이고, 영혼(靈魂)이나 신(神) 윤회(輪廻)도 마음이 만들어 낸 관념(觀念)일 뿐이다. 나(我) 라는 것도 진짜 나(我)가 아니라, 아상(我相) 아집(我執) 아만(我慢)이라는 허망한 그림자를 진짜 나 인줄 착각(錯覺)하고 있을 뿐이다.

생사(生死) 또한 하나의 환상(幻想)이다. 진실(眞實)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불법은 만법(萬法)이 모두 생각(生覺)이고, 관념(觀念)이며 식(識)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도 일체가 심식(心識)에 의지해서 빚어낸 ‘허먕한 업(業)의 그림자’일 뿐이다.

암(識)이 본래 스스로 아는 앎이 없건만, 중생이 허망(虛妄)한 생각을 붙잡아서 나의 마음(識)으로 삼음으로써 무명(無明)이 벌어진 것인데, 일단 이것을 실체(實體)로 오인(誤認)하고 집착심(執着心)을 일으키는 것이다.

참된 수행이란 이 허망한 한생각이 떠오를 때 즉시 알아차리고 ‘이 뭣고’로 그 뿌리를 잘라 버림으로써 다생겁래에 걸처 쌓아 제 8아뢰야식에 저장된 아타나란 미세망념의 인습(因習)을 재현(再現)을 차단(遮斷)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업장소멸(業障消滅)을 시키며 생활속에서 반야지혜를 굴려쓰는 것이 ‘이 뭣고’이다. 

인연따라 생멸 변화하는 일체의 사물은 허망한 인연이 화합해서 마치 몽(夢) 환(幻)처럼 이루어 지는 것으로, 이 모두가 실체성(實體性)이 없는 것인데, 중생들은 눈앞의 온갖 현상(現象)을 실유(實有)로 오인해 분별하고 집착함으로서 이 세간의 모습이 ‘있음’이 된 것이다.

또한 삼계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생사도 역시 환영이며 물거품이며 그림자이며 꿈속의 일이다. 현상의 제법은 일심이 인연을 따라 발생했을 뿐 마음자체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연연으로 발생한 만법은 본래 무생의 본무이기 때문에, 만법이 소멸한다 해도 인연이 사라졌을 뿐 마음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본무일심(本無一心)은 인연의 화합을 따라 제법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인연의 분리를 따라 사라지지도 않는다.

연생연멸(緣生緣滅)이라, 나도 남이 없고 멸해도 멸함이 없는 것이 연기성(緣起性)이다. 간화선 ‘이 뭣고’는 이 연기성을 깨닫고 공적영지한 본래 성품자리를 증득하는 것이다.

비유해서 땅은 생(生)이 없는데 콩(豆)의 종자(種子)를 심으면 콩이 나오지만 땅에 의(依)해서 나기 때문에 이 생(生)은 우리가 육식으로 밖으로 보면 형상이 있는데, 연기성이기 때문에 무생(無生)이며, 이 무생이 화중생연(花中生蓮)이며, 불가운데 연꽃이란 불덩어리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며, 거북털이니 토끼뿔이 공성(空性)이다. 불이 시뻘건 화로서 연꽃이 핀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간격이 없는 동시(同時)인 시무애(時无涯)이고, 작금(昨今)이 바로 영산회상이며 부처님과 나와 자타의 간격이 없는 처무애(處无涯)이며 도솔천 내원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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