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인- 전재성(66)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1953년 출생. 서울대를 졸업했고,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13년차 회장을 역임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석·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독일 본대학에서 인도학, 티베트학을 연구했다. 독일 본대학과 쾰른 동아시아 박물관 강사, 동국대 강사, 중앙승가대 교수, 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한국불교대학(스리랑카 빠알리불교대학 분교) 교수, 충남대 강사, 가산불교문화원 객원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대표를 맡고 있다. 1999년 총11권의 〈쌍윳따니까야〉 완역을 시작으로 〈맛지마니까야〉·〈앙굿따라니까야〉·〈디가니까야〉 등 4부 니까야 전체를 우리말로 옮겼다. 또한 〈법구경〉·〈우다나〉·〈숫타니파타〉·〈이띠붓따까〉·〈율장대품〉·〈율장소품〉·〈율장 비구계〉·〈율장비구니계〉 등 역경 결과물들을 세상에 내놨으며, 〈빠알리어 사전〉·〈티베트어 사전〉을 한국 최초로 편찬하기도 했다.

불교가 시작된 곳은 현재의 인도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펼치신 가르침이 동진(東進)해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까지 전해졌다. 수많은 시간과 지역을 거쳐 불교가 전해지기까지는 경전이라는 매개체가 있기에 가능했다. 이런 불교 경전의 전파는 여러 루트가 있었겠지만, ‘역경(譯經)’이 함께 해서 이뤄질 수 있었다.

불교 역사를 살펴보면 뛰어난 역경사(譯經師)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구마라집은 경전 35종 294권을 번역했고, 인도에서 유학했던 현장은 74부 1,335권의 경전을 한역(漢譯)했다.
한국불교에서도 삼국시대에는 원측, 승장 등이 역경사로서 역할을 했고, 조선시대 훈민 창제가 이뤄지면서 우리말을 통한 역경이 이뤄졌다. 근현대기에도 한역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 용성·운허 스님 등을 통해 진행됐다.

21세기를 넘어오면서 한국불교는 다른 변화를 맞이한다.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초기불교 경전이 우리말로 역경·발간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대중서점에서 만날 수 있는 우리말 초기불교 경전은 한 사람의 원력에서 비롯됐다. 바로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66)이다.

초기불교 경전 한글화의 효시
1989년부터 30년간 역경 매진
4부 니까야·율장 등 완역 성과
세계 최대 어휘 빠알리어 사전
한국 최초 티베트어 사전 편찬
초기불교 대중적 관심 이끌어

역경 작업은 ‘성실·정확’이 생명
매일 평균 6시간씩 역경에 몰두
현재 역경·사전원고 13만매 분량
세계 번역물 섭렵·대조 역경 노력
번역 일관성·문맥 적용성도 유의
“역경, 자기 마음 탐구하는 작업”

초기불교 대중화를 견인하다
기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불교에서 초기불교의 흔적은 흐릿했다. 동국역경원이 초기불교 경전에 해당하는 한역 〈아함경〉을 한글로 역경했지만 애초 한역 과정의 변형이 있었고 이를 감안해 역경할 학계 역량도 부족했다.

그런 이유로 초기불교는 ‘소승’이라는 타이틀에 묻혀 한국불교 안에서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다. 이 같은 흐름은 전재성 회장의 역경 불사가 바꿔 놓았다. 1989년 시작된 그의 역경불사는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재성 회장은 1999년 총11권의 〈쌍윳따니까야〉 완역을 시작으로 〈맛지마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디가니까야〉 등 4부 니까야 전체를 우리말로 옮겼다. 또 〈법구경〉 〈우다나〉 〈숫타니파타〉 〈이띠붓따까〉 〈율장대품〉 〈율장소품〉 〈율장 비구계〉 〈율장비구니계〉 등 역경 결과물들을 세상에 내놨다.

또한 그가 편찬한 〈빠알리어 사전〉과 〈티베트어 사전〉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간된 빠알리어와 티베트어 사전이다.

올해에도 11월에는 〈청정도론〉을, 7월에는 〈앙굿따라니까야 전서〉를 발간하며 역경 불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역경의 결과물은 모두 전재성 회장의 노력에서 비롯된다. 역경 불사를 시작한지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그는 아침 5시에 기상해 사무실로 출근한 후 평균 6시간 정도 역경에 매진한다. 하지만, 번역량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루 번역량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정신이 맑아지면 많은 양을 번역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하루가 그냥 흘러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보통은 다른 일보다는 경전 번역하는 과정이 저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탐구하는 일이고 거기서 희열을 느끼기 때문에 하루도 빠짐없이 번역에 매진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전재성 회장의 부지런함은 그간의 역경서의 원고 분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200자 원고지 분량으로 〈쌍윳따니까야〉는 3만 4000매, 〈앙굿따라니까야〉는 2만 6,000매, 〈맛지마니까야〉는 1만 3,000매, 〈디가니까야〉는 1만 1,000매, 〈쿳다까니까야〉는 3만 1,000매, 〈빠알리어사전〉은 1만 7,000매에 달한다.

그간의 저작물들을 모두 합치면 총 13만매 가량의 원고를 썼다. 일반교양서가 200자 원고지 1,000매 정도임을 감안하면 약 130권 가량의 분량이다.

이 같은 전재성 회장의 역경이 갖는 의미는 대부분의 역경물이 ‘복원번역’을 통해 이뤄진 점이다.

“대부분 빠알리본 자체가 정형구의 생략본이기 때문에, 현행 영문번역본도 대부분 생략본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상용화된 이후에는 빠알리본도 복원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제가 번역한 것은 대부분 복원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복원번역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원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불교에서의 법률체계를 다루고 있는 율장의 완전복원입니다. 율장은 계율변수가 워낙 많아 완전복원은 불가능하고 대체적으로 ‘완전복원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율장의 마지막 한권인 율장부수를 지금 번역하고 있는데, 그 방대함과 논리적 정교함 때문에 완전복원 자체가 불가능해 보입니다. 해석학적 원칙에 입각한 생략본을 부분적으로 해명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전재성 회장은 초기불교 경전 역경불사의 원력을 높게 평가받아 2001년 조계종 포교대상 원력상을 수상했다.

역경서 중요한 것은 ‘성실성’
이내 역경 작업에서 가장 유의하고 있는 점이 궁금해졌다. 전재성 회장은 번역의 일관성과 문맥상 적용성이라고 했다.

“번역의 일관성과 문맥상 적용, 두 가지가 항상 번역과정에서 충돌합니다. 여기서 적절한 중립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담마 또는 다르마는 한역에서는 ‘법’이라는 일관성을 가지고 번역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장이 너무 형이상학화되고 난해해집니다. 문맥상으로 적용성을 가지고 때로는 ‘진리’ 때로는 ‘원리’ 때로는 ‘사실’ 때로는 단순히 ‘것’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한 성실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실제 그는 경전 번역에 있어서 전 세계 역경의 결과물들을 참조한다.

“초기 경전을 역경할 때에는 빠알리 원전뿐만 아니라 다양한 번역본들을 함께 참조합니다. 한 가지 번역본을 우리말로 옮기면 오류가 많을 수 밖에 없죠. 한역 경전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만 백화문이나 일본 번역도 연구하고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본을 함께 봐야 제대로 된 역경이 이뤄집니다. 바른 번역은 성실성과 정확성을 담보해야 합니다.”

“초기는 나무·대승은 꽃… 佛法 구조 알아야”

민중불교론 제시, 고난의 청년기
화상 트라우마로 학창 시절 어려움
중학교 은사에게 참선 배우며 극복
서울대 농대 입학 후 ‘農佛會’ 창립
1977년 〈대화〉에 ‘민중불교론’ 게재
80년대 민중불교운동 이론적 토대

독일유학기 평생 스승을 만나다
수차례 수감으로 몸·정신 피폐해져
수행하며 ‘영적체험’하고 獨 유학길
유학 시절 페터 노이야르 만나면서
초기불교 관심… 역경불사 원력 세워
1999년 저서 〈거지성자〉 출판하기도

‘민중불교’ 주창 그리고 고난
한국불교 지형을 바꿔놓은 역경불사 원력을 세우기까지 전재성 회장은 굽이진 고갯길을 넘고 넘어왔다. 그 인생의 고갯길은 한국사의 아픔과 궤를 같이한다.

전재성 회장의 부모님은 한국전쟁 1.4후퇴 당시 원산에서 월남해 부산에서 정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재성 회장이 태어났다. 4살 때에 전신화상을 입었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사춘기 시절 많은 고민과 방황을 했다. 그런 방황 속에서 만난 것이 불교다.

“중학교 시절 생물을 가르쳤던 유응렬 선생님이 참선 지도를 했는데, 선생님께 참선을 배웠죠. 사춘기 때의 방황 속에서 잠시 고요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대학에서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1972년 서울대 농화학과에 입학한 전재성 회장은 서울대 농대불교학생회(농불회)를 창립해 회장을 했고,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총무부장과 13년차 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유신독재의 엄혹한 시절, 당시 대학생이 그러했듯이 전재성 회장도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6년 완주 송광사에서 열린 1600년 대회에서 처음으로 ‘민중불교를 위한 소론’을 발표한 그는 이를 보완해 1977년 월간 〈대화〉에 ‘민중불교론’을 게재하게 된다. 

양극화돼 가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의 삶을 자각하고, 민중불교운동의 필요성을 불교사적으로 고찰한 이 소고는 후일 1980년대 법난 이후 민중불교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됐지만, 전재성 회장에게는 고난의 요인이 됐다. 시국사건들에 휘말리면서 여러 차례 구금됐던 전재성 회장의 몸과 정신은 피폐해져 갔다.

“우선 건강이 매우 안 좋았어요. 폐결핵과 늑막염을 앓았죠. ‘민중불교론’ 집필 이후에는 서울대나 동국대에서 데모를 한다는 소문이 돌면 사전에 구금될 정도였습니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평생 스승인 페터 노이야르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

스승 ‘거지성자’를 만나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극한의 상황. 그를 삶이라는 공간에 붙잡아 놓을 수 있던 중력은 수행이었다. 우연하게 만난 한 시인이 건넨 빠라마항사 요가난다의 영문 저서를 접하고 인도의 정통 수행원리를 알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수행을 했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던 어느 날 안양천변에서 영적 체험을 하고 삶의 전환을 맞이한다. 공부를 이어가겠다는 결심을 한 전재성 회장은 동국대 대학원에 입학해 인도철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 유학에서 전재성 회장은 자신의 평생 스승을 만나게 된다. 바로 ‘거지성자’ 페터 노이야르다.

“독일 유학을 가자마자 호숫가를 배회하다가 만난 사람이 페터 노이야르였습니다. 당시에 다른 사람에게는 누더기 옷을 입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였지만, 저에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서 삶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성자였습니다. 라인 강변의 긴 산책로에서 벤치에 앉아 누더기를 기우며 들려준 초기경전의 구절들은 부처님이 살아계신 듯, 정말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감동스러웠던 경험을 모아서 쓴 것이 1999년 발간한 〈거지성자〉입니다.” 

페터 노이야르 선생의 영향으로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전재성 회장은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198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갈 때에도 페터 노이야르 선생은 그에게 초기불교 경전을 번역을 권하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온 한국에서 그는 빠알리대장경 〈쌍윳따니까야〉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지인의 소개로 돈연 스님의 경전연구소에 들어간 전재성 회장은 〈빠알리어 사전〉과 〈범어문법학〉 집필에도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2년 후 어느 날, 연구소는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가 된다. 그가 입은 가장 큰 손해는 영국 빠알리성전협회에서 수입한 빠알리대장경과 독일에서 가져온 많은 불교문헌, 일본에서 수입한 대장경들이 모두 불에 탄 것이다.

“그 때만해도 컴퓨터가 없어서 원고지에 육필로 번역을 했습니다. 불은 이른 새벽에 났고, 아침에 도착했더니 건물이 전소돼 있더군요. 화재현장을 둘러보다가 한 곳을 파보니 제가 번역하고 있던 〈쌍윳따니까야〉 첫3권이 일부만 불타고 남아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부처님 가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원고뭉치를 가슴에 꼭 품고 집으로 돌아왔죠.”

화재로 인해 경전연구소는 문을 닫게 됐지만, 전재성 회장은 1992년 스리랑카 빠알리 불교대학 한국분교 전임 교수로 부임했다. 이것도 잠시였다. 1997년 IMF 여파로 학교는 폐교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전재성 회장은 1997년 故 고익진 교수가 주석하던 광주 광륵사로 내려가 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설립하고 다시 초기경전 번역에 매진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경전연구소 시절 자신이 번역한 원고를 책으로 내려고 해도 출판비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도법 스님을 만났는데, ‘왜 책을 번역해 놓고 10년이 지나도록 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솔직하게 ‘출판비가 없다’고 답했고, 그 이후 도법 스님은 뜻 있는 스님들과 함께 제작비를 그에게 지원해줬다. 그렇게 역사적인 〈쌍윳따니까야〉 발간 불사가 시작됐고, 2002년 전 11권으로 완간할 수 있게 됐다.

광주 광륵사에서 열린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발족식 모습.

왜 초기불교인가
2000년대 들어 한국불교에는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다. 초기불교를 알고자 하는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초기불교 수행부터 경전까지 그 수요가 높아지면서 초기 경전 번역도 활발히 이뤄졌다. 그 포문을 연 것이 전재성 회장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 21세기 대중들은 초기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을까. 이를 전재성 회장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식’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역사적으로 시대변화에 대처한 불교가 새로운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때에는 본래의 뿌리로 돌아가 다시 사유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파불교도 생겨났고, 대승불교도 생겨났죠. 대승불교 안에서 경전들도 시대가 지나면, 그러한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초기불교가 건강한 나무라면, 대승불교는 그 나무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초기불교 경전이 사유구조를 이해하는 데 용이하고 배운 즉시 효과가 있는 가르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초기불교 경전을 통해 대중들이 부처님께서 설한 가르침의 정확한 개념적 구조를 알아가길 바랐다.

“불교를 오래 공부한 사람도 물어보면 기초적인 개념의 구조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생활세계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우선 자애(慈)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행복하길’하는 마음이고, 연민(悲)이라는 것은 동정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고통에서 벗어나길’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권하고 싶은 초기 경전의 경구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곧바로 두 가지 경구들이 흘러나왔다.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
(Dhp. 183)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 같이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 닦게 하여지이다.
(Stn. 149)

〈법구경〉과 〈숫타니파타〉의 저 경구. “전자는 율장·경장·논장의 구조를, 후자는 모든 생명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은 한량이 없음을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부처님 말씀을 쉽게 한글화하는 것”이 목표라는 전재성 회장. 그는 오늘도 경전의 바다 속에서 부처님 원음을 찾아 우리에게 전달하는 작업을 한다. 그의 역경 불사는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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