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절도단에 희생된 성보문화재들

현재도 도난 중인 영산회상도. 1811년 작품이다.

경상북도 서북부에 위치한 문경시는 1995년 문경군과 점촌시가 통합한 지역이다. 문경읍 조령산 부근을 문경새재라고 부르는데, 예로부터 서울과 영남을 이어주던 고갯길로, ‘새재’ 혹은 ‘조령(鳥嶺)’이라고 불렀다. 조령산은 높이 1,017m로, ‘새도 날아서 넘어가기 힘들다’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김룡사는 일제강점기 31교구 본사로, 문경·예천·상주·영천 등에 위치한 많은 말사(末寺)를 거느렸다. 특히, 문경을 대표하는 사찰은 대승사·보덕암·운암사·봉암사·혜국사 등이다.

의상 대사 창건한 문경 운암사
한국전쟁 당시 폐사됐다 중창돼

도굴꾼의해 불상·불화 5점 도난
모 관장 검거되며 불상만 회수
신중도·현왕도 사진없어 아쉬움

이 가운데 작지만 아담한 사찰이 불정동 재악산(宰嶽山)에 위치한 운암사이다. 사찰은 조계종 제8교구본사 직지사(直指寺) 말사로, 677년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으며, 그 뒤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는 문헌기록이 없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6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1658년에 영준(靈俊) 스님이 요사채를 짓고, 1679년에 해특(海特) 스님이 극락전을 중건하였다. 이후 1785년에 인월(印月)이 사찰을 중창하고, 1811년에 불화승 수연 등이 영산회상도·신중도·현왕도를 조성하면서 목패를 제작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9년에 칠성도와 독성도를 새로 봉안하였다.

사찰은 한국전쟁으로 폐사되었다가 1972~1975년까지 중창했고, 1981년에 삼성각과 안양문을 지었으며, 1986년에 극락전을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전각은 극락전, 산신각, 요사채, 삼성각, 안양문 등이 있다. 경내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1점, 불화 3점, 목패 1점, 석조부도 2개가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다.

도난됐던 문경 운암사 목조관음보살좌상(사진 왼쪽)과 목조대세지보살좌상(사진 오른쪽)의 모습. 지난 2016년 회수될 수 있었다.

20세기 전반 운암사에 소장된 불교문화재는 1920년을 전후해서 작성된 재산대장(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1932년 12월 10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귀중품 대장이 남아있다. 우선 1920년 전후에 작성된 재산대장에 의하면 운암사에 봉안된 성보문화재는 23건 112점으로, 불상 4점, 불화 5점, 부도 2점, 나머지는 전적과 공예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운암사는 20세기 전반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과 지장보살을 봉안한 삼존불과 45㎝ 석조아미타불좌상(또는 소조아미타불좌상)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불화는 1920년대 후불도가 2점이었다가 1930년대 전반 1점으로 줄어들고, 나머지 신중도, 현왕도, 산신도는 남아있다. 현재 운암사에서 문화재청에 도난 신고를 한 성보문화재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목조대세지보살좌상, 영산회상도(1993년 1월 9일부터 10일 사이 도난)이지만, 조계종 총무원에는 위의 3점 이외에 신중도, 현왕도(1991년 3월 21일 도난)가 사진 없이 신고되어 있다.

운암사에서 도난당한 3점의 도난문화재 가운데 보살상 2점이 2016년 11월에 환수되었다. 당시 보도된 기사 내용에 따르면 서울의 모 사립박물관 前 관장이 은닉해오고 있던 불교문화재 가운데 운암사 보살상을 포함해 총 11점을 찾아냈다.

이 보살상은 운암사 극락전에 봉안되었던 목조아미타불좌상의 협시보살로 추정된다. 목조보살좌상은 높이 80㎝의 중형 보살상으로, 손모양만 반대로 되어 있을 뿐, 크기나 형태가 거의 유사하다. 보살상은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방형의 얼굴에 둥근 눈썹을 그리며, 짧은 목 아래로 삼도를 표현했다.

보살상의 보관은 머리에 비하여 큰 편으로, 화염문과 꽃문양 등의 금속판이 빽빽이 장식되어 있다. 착의법은 여래상처럼 오른쪽 어깨에 편삼을 입은 변형우견편단으로 걸치고 있다. 보살상의 가슴 아래로 승각기가 보이고, 무릎 아래로 결가부좌한 발목 위에서 내려오는 몇 줄의 간략한 옷주름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이 두 보살상은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나 착의 방식 등에서 각승과 마일이나 금문의 계보에 속한 조각승이 17세기 후반에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소재 파악이 되지 않은 후불도는 크기는 세로 316㎝, 가로 254㎝로, 도난 이전 조사된 불화의 화기는 “嘉慶十六年辛未四 月日靈山會聖幀造 成于聞慶地宰岳山 雲巖庵奉安于極 雲巖庵奉安于極 樂殿〈중략〉畵員比丘守衍 有審 禪峻 定敏 達仁 奉玉 順定 曄 永玉〈후략〉”으로, 1811년 4월에 문경 재악산 운암암 극락전에 봉안하기 위해 영산회상도를 불화승 수연·유심·선준·정민·달인·봉옥·순정·정엽·영옥이 조성하였다.

이 영산회상도는 일제강점기 작성된 재산대장에 비단으로, 도난백서에 종이 위에 채색된 것으로 나와 있다. 후불도 화면 가운데 본존이 취한 수인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내려 항마촉지인을 취하여 석가불임을 알 수 있다.

여백 없이 화면 가득 본존불을 중심으로 사천왕과 여래의 권속인 보살상을 삼단으로 도열하듯 배치하고, 화면의 가장 상단에 아난과 가섭 등 제자를 빼곡히 그려 넣어 19세기 전반 불화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외 도난당한 신중도와 현왕도는 사진이 남아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불화인지 알 수 없고, 도난신고도 종단 밖에 되지 않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에 제대로 신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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