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례자에게도 열려 있는 禪房

죠만지는 선원이 중심인 사찰이다. 대중스님의 안거나 수행기간에 따라 숙박이 불가 할 수 도 있다.

지난밤 묵은 죠만지(城뼖寺)는 일본 조동종 역사상 9번째로 세워진 사찰이며 시코쿠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찰이다. 일본 조동종에서 태조(太祖)로 존경받는 케이잔 선사(瑩山禪師,  1268~1325)가 생애 최초로 개산한 선사(禪寺)이자 시코쿠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인데, 전국시대에 병화로 소실되어 약 350년간 그 터만 남아 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중요성과 지역 주민들의 신심에 힘입어 다시금 절이 세워진 것이 약 20여 년 전. 지금은 고요한 옛 모습을 다시 되찾았다.

처음 죠만지를 찾았을 때는 2012년 여름이었다. 88개소에 속하지 않은 사찰을 일부러 찾아가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순례자로서 뜬금없이 하룻밤 재워주시길 청하러 가는 것이라 더욱 긴장됐다. 작은 강을 건너는 다리에서 저 멀리 누가 봐도 사찰의 모습을 한 건물들이 보였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넓게 자리한 가람은 그동안 보아온 88개소와는 또 다른 고즈넉한 멋이 있었다. 따로 담장도 두르지 않고 드문드문 자리한 가람은 그야말로 ‘적정처’라는 말에 어울렸다.

日 조동종 역사상 9번째 사찰
소실됐으나 지역민에 의해 복원

순례길 하룻밤 청하며 공동생활
새벽좌선 참여… 단 오름 허락도
예불서는 ‘수증의’ 읽으며 참회를

주지이신 타무라 코야 스님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입적하신 법전 스님께서 계실 때엔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정기적으로 강의를 하신 적도 있다. 그 덕에 한국어도 유창하고, 사찰 여기저기 한국 물건도 보인다. 한번은 빨랫대에 널린 한국 승복을 보곤 한국 스님이 여기 머무나 했더니 코야 스님의 승복이었다. 해인사에서 강의하실 때 일본 승복이 너무 눈에 띈다며 어른스님들께서 해주신 것이라신다.

죠만지에 묵는 순례자들은 모두 사찰의 청규에 따라야한다. 하지만 순례자들에게 청규 준수를 엄하게 강요하지는 않아서 좌선과 예불, 운력 등의 필수적인 오후 일과 외에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선방에서 좌선을 해도 되고, 사찰 뒷산으로 산책을 가도 된다. 코야 스님은 “다른 사찰들은 예불 후에 좌선을 하고 공양을 들지만, 죠만지는 좌선을 먼저하고 공양을 든 뒤에 예불을 모신다”라며 죠만지의 청규가 조금 특별하다고 귀띔을 해주셨다. 이 절을 처음 세운 케이잔 선사께서 세우신 청규를 따른 순서다.

며칠전 젠콘야도에서 잘 자지 못한 채 한참을 걸어온지라 몸은 그야말로 기진맥진. 코야 스님은 “걷느라 힘들었을테니 새벽좌선은 참가하지 않아도 좋다”했지만 새벽 타종에 눈이 번쩍 뜨였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요사 앞으로 나가니 대중 스님께선 가사장삼을 이미 다 수하고 법랍에 따라 서 있었다.

조금 망설이고 있으니 지객 스님이 조용히 뒤로 서라고 말했다. 코야 스님을 선두로 선방으로 이동했다. 조금 쌀쌀한 새벽의 산 속, 울려 퍼지는 범종소리를 들으며 자박자박 선방에 들어갔다. 선방의 가운데 문수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 스님의 모습으로 좌선을 하고 있는 성승문수(聖僧文殊)였다. 이는 부처님의 지혜를 찾는 선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옛 중국 당송시대 선원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지금도 일본과 중국의 많은 선방은 성승문수를 모신다.

일본의 선방은 우리와는 다르게 좌선을 하는 단상이 있어 그 위에서 좌선을 하고, 좌선 사이에 포행은 단상에서 내려와 문수보살상을 중심으로 요잡하는 것을 포행으로 삼는다. 어떻게 앉아야 하나 곁눈질로 두리번거리니 옆자리에 계신 스님이 단에 오르는 법을 알려주셨다.

먼저 벽을 등지고 좌복에 앉은 후 신발을 정리하고, 몸을 돌려 면벽을 한다. 좌복이 쿠션같이 둥글고 높았는데 가부좌를 하고 앉으니 매우 편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원래 전통적인 청규에서 재가자는 단에 오를 수 없다. 대신 단과 비슷하게 마련된 다른 자리에 앉아 좌선하는데 이곳 죠만지는 재가자들도 단 오름을 허용하고 있다.

그날 단에 올라 좌선한 재가자는 나를 비롯해 3인. 전날 같이 묵은 일본인 순례자와 근처에 사는 거사였다. 코야 스님이 문수보살에 삼배를 올리고 향을 살랐다. 수좌 스님이 좌선 중이라는 패를 거신 후 소종을 타종하면서 새벽 좌선이 시작됐다.

정말 오래간만의 좌선이었다. 처음 시코쿠를 순례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어디 좋은 곳엔 잠시 앉아서 좌선을 하거나 기도를 해야지’하곤 생각했었다. 하지만 매일 목적지를 잡고 기를 쓰며 걷다보니 그런 마음의 여유는 오간 데 없었다. 밤이 되면 지쳐 잠들기 바쁘니 ‘걷는 것이 곧 수행’이라며 자위할 뿐이었다.

조용히 호흡에 집중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시 보리심에 대해 명상을 했다. 왜 보리심을 일으켜야 하는가? 왜 보리심이 중요한가?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찰나 졸음이 솔솔 몰려들었다. 때마침 뒤에서 들리는 경책소리에 놀라 다시 정신을 다잡으니 이번엔 발에 쥐가 났다. 졸음과 저리는 발의 고통 사이에서 마음을 놓고 헤매다보니 좌선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선방에 앉은 그 자리에서 아침 공양을 받았다. 스님들은 각자 당신들의 발우를 펴고, 재가자들 앞에는 발우와 크기를 맞춘 그릇들이 나왔다. 아침 공양은 흰 쌀죽에 무장아찌, 물 한 사발의 단출한 식단이다. 코야 스님이 한국어로 일본의 발우공양법을 설명해 주셨다. 한국과 비슷한 점도 있고, 상이한 점도 있다. 지레짐작으로 우리네 발우공양처럼 짠지 한 조각으로 발우를 닦으리라 생각해 장아찌 한 조각을 남겼더니 웬걸, 일본은 발우를 닦아 먹는 도구가 따로 있었다. 조금 당황해서 남은 장아찌를 대충 씹어 퇴수에 삼켜버렸다. 

선방을 나와 잠시 요사에 들렀다. 제대로 세수를 하고 쥐가 난 발을 열심히 주무르다 예불을 알리는 운판소리에 불당으로 향했다. 예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본존으로 모셔진 불당에서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시작됐다. 스님들이 부처님께 차와 마지를 올리고 예불집의 순서에 따라 경을 읽어 나갔다.

일본 조동종에선 매일 조석예불에서 읽는 글이 있다. 바로 <수증의(修證義)>다. 조동종의 개조인 도겐 선사(道元禪師, 1200~1253)가 저술한 <정법안장(正法眼藏)>에서 가려 뽑은 글로 총 5장 31절의 산문이다. 매일 한 장(章)씩 번갈아 읽는데 이날은 제 3장 ‘수계입위(受戒入位)’였다. 스님들을 따라 특유의 음으로 읽어나가는데 첫 머리부터 먹먹하게 다가왔다.

“생을 바꾸고 몸을 바꾼다 해도 삼보를 공양하며 공경해 모시길 발원할지니라.”
불제자의 시작과 끝은 바로 귀의에서 비롯된다. 다시금 12번 쇼산지를 오를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나의 얄팍한 신심이 부끄럽게 느껴졌는데 이 글을 읽고 있노라니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어 계의 중요함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만 울컥하고 목이 메어 한동안 소리 내어 읽지를 못했다.

“세존께서 명확히 일체중생을 위해 보이셨나니, 중생이 부처님의 계를 받는 것은 곧 모든 부처님의 자리에 들어 대각(大覺)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모든 부처님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이를 무위(無爲)의 공덕이라 하며, 이를 무작(無作)의 공덕이라 하며, 이를 발보리심이라 한다.”

이 아름다운 순례길을 걷고, 따뜻한 사람들과 만나는 모든 일들에 부처님의 은혜가 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또 시코쿠 순례를 올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이 순례는 그저 성지들을 방문하고 참배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과 아름다움을 배우는 길’이라는 생각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아침예불을 마치자 코야 스님께서 보여줄 것이 있다며 불렀다. 불당의 조명등에 제비집이 달려있었다. 곧 어미가 먹이를 물고오자 둥지에서 새끼 제비들이 아웅다웅 고개를 내밀었다.

“작년 봄에 제비가 집을 짓더니 올해도 돌아왔어요. 덕분에 법당 창문을 못 닫고 살아요.”
“저렇게 집을 지으면 불도 못 키겠는 걸요?”
“작년에 잘 모르고 그냥 불을 켰더니, 예불을 마치면 새끼제비들이 전등 열에 지치기에 지금은 전구를 빼놓은 상태에요.”

새끼 제비들은 무슨 복으로 매일 아침 경을 들으며 부처님과 함께 사는지! 아침예불을 하며 느낀 감사함과 아름다움이 다시금 잔잔히 몰려왔다. 제비가 깃드는 법당. 아름다운 하나의 시구 같지 않은가.

요사로 돌아와 다시 배낭을 꾸렸다. 흰 옷을 입고 지팡이를 챙겼다. 순례자로 돌아갈 시간이다. 스님이 여유롭게 더 묵었다 가도 된다고 하셨지만, 토쿠시마현이 끝나가는 길이라 다시 힘을 내서 걷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평소 같으면 늦었다며 허둥지둥 댔겠지만 조금은 여유롭게 짐을 쌌다. 그날 느낀 그 아름다움을 좀 더 음미하고 싶었다. 길을 나서겠다고 알리자 대중 스님이 모두 나와서 배웅을 해주셨다. 이 보잘 것 없는 순례자 하나 보내주신다고 대중이 모두 나오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

“다음엔 오헨로상이 아니라 참선자로 오도록 해요. 죠만지 선당(禪堂)은 항상 열려있어요.”

수행에 힘내도록 격려해주시는 말씀을 들으며 다시 순례길로 나섰다. 날마다 좋은 날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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