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원대 선종의 특징

선·교·율 중 敎 우선
북방은 조동중 남방은 임제종

원나라는 중국내 소수 민족인 몽고족이 세운 나라다.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대부분이 티베트 불교 즉 라마교를 신봉했다. 때문에 많은 종교 가운데 라마교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반면에 중국불교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화됐다. 하지만 중국불교는 인구비례로 볼 때 여전히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 원나라 초에 북방에서 중국불교인 선종(조동종)과 도교가 격렬한 논쟁이 발생한 적이 있는데, 이 논쟁은 한족불교도들과 도교의 신자들 간에 ‘노자화호(老子化胡)’를 중심에 놓고 발생한 논쟁이다. 선종 측에서는 조동종 소림사의 설정복유(雪庭福裕ㆍ1203~1275) 장로와 도교의 이지상(李志常)이 원나라 헌종(憲宗)의 면전에서 변론을 진행했다. 변론의 결론은 선종이 승리를 거두면서 불교가 기타 종교보다 우위를 점유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방불교계 내부에서 선과 교가 충돌했는데, 교는 천태, 화엄, 법상 등 삼종이고, 선은 선종으로, 논쟁의 초점은 선과 교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지위가 높은가를 결정하는 논쟁이었다. 선, 교, 율 삼가(三家)가 역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1215~1294, 원 세조 제5대 칸)면전에서 자기들의 의견을 충분히 발표하였다. 결과는 교가 선종을 이겼다(使敎冠于禪之上). 때문에 선종은 교(敎) 다음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 선종이 비록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서 사회에서 선종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강남지역에서 선종은 여전히 유행했다. 다만 교종(敎宗)의 지위가 높아졌을 뿐이다.

당시 북방의 한족불교는 연경(지금의 북경)을 중심으로, 많은 선승들이 운집해 있었고, 자연스럽게 선종 위주가 되었으며, 연경에서는 여전히 임제종과 조동종이 유행했다. 먼저 임제종의 상황을 살펴보면, 임제종의 해운인간(海云印簡ㆍ1202~1257)은 일찍이 원나라 태조(太祖), 태종(太宗), 정종(定宗), 헌종(憲宗) 등 황제들에게 예를 받았으며 신칙으로 승통(僧統)이 되기도 했다. 또 해운인간은 명을 받들어 주지를 살 때 승가고시를 치르게 되었는데, 원대 헌종(쿠빌라이)은 그로부터 보살심계(菩薩心戒)를 받기도 했다. 따라서 북방의 임제종은 조정의 관계 및 보호 하에서 큰 불편함이 없이 발전하였고 동시에 쇠퇴하지도 않았다. 조동종도 역시 금원(金元)시기에는 만송행수(萬松行秀ㆍ1166~1246)의 계파가 대표가 되는데, 그의 제자 임총종륜(林泉從倫ㆍ1223~1281)은 원대 세조를 위해서 선(禪)을 강의하고, 공안 및 해답을 침착하고 여유롭게 해서 세조로부터 호감을 얻었다. 그 후 그는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불교와 도교의 변론에 참가하였고, 도교의 경전을 분소(焚燒ㆍ태우다)하는 활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의 스승인 만송행수와 조동종의 송고(頌古)에 대해서 논평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이들의 이러한 여러 가지 활동으로 인해서 원대 북방 선종에서 조동종의 발전에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그림, 강병호

 

원대의 남방 선종은 단연코 임제종의 세력이 가장 강했으며, 대체로 대혜종고 계통의 간화선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남방 선종은 대부분 임제종에 속하였다. 즉 대해종고와 호구소룡(虎丘紹隆)등 양대 파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남방의 임제종은 네 종류의 지파가 존재했다. 대혜종고 문하에 속하는 영은지선(靈隱之善ㆍ1152~1235)과 북간거간(北磵居簡) 등 두 지파와 호구소륭(虎丘紹隆)문하에 속하는 송원숭악(松源崇嶽)과 파암조선(破庵祖先) 등 두 종류의 지파가 존재했다. 영은지선의 제자 원수행단(元北行端ㆍ1255~1341)은 경산(徑山)을 거점으로 선법을 전파하였는데, 〈행단탑명(行端塔銘)〉에 보면 “그 법을 이은 제자가 오, 초, 민, 오, 촉, 한 등지에서 동시에 선법을 전파하는 이들이 약 천인(千人)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영은지선 계통의 선법으로 주로 남방의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행하여졌던 것 같다. 이 파는 당시 네 종류의 지파 가운데 가장 세력이 우세했던 파이기도 하다. 북간거간 계통의 선사들은 비교적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소은대흔(笑隱大訴ㆍ1284~1344)은 북간거간의 손상좌로서, 소은대소는 총림청규와 선중교육을 중시했으며, 역시 원대의 선사인 덕휘(德輝)가 수정한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에서 소은대소의 사상을 엿볼 수가 있다. 특히 덕휘(德輝)선사가 편집한 〈칙수백장청규〉는 백장회해의 〈선문청규〉 이래로 총림에서 계속해서 사용되어 왔고, 선종역사에서 〈칙수백장청규〉는 선종의 규칙과 제도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사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이 외도 각안(覺岸)은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 4권을 지었으며, 상은(常念)은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22권을 지었으며, 〈불조역대통재〉의 대부분 내용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과 남송 때 조수(祖琇)가 편찬한 〈융흥불교편년론(隆興佛敎編年論)〉 및 남송, 금(金), 원(元)대의 불교사를 보충한 것이다. 이렇듯 거간파(居簡派)에서는 걸출한 선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호구소륭(虎丘紹隆)의 두 지파 가운데 하나인 송원숭악(松源崇嶽)의 계파인 숭악파(崇嶽派)의 중요한 인물은 고림청무(古林淸茂ㆍ1262~1329)와 담방수충(曇芳守忠ㆍ1275~1348)등이 있다. 이들의 중요한 활동 무대는 강소(江蘇)일대로서, 모두 금릉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파암조선(破庵祖先)의 계파인 조선파(祖先派)는 원대의 남방 선종 중 남방의 백성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던 계파이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고봉원묘(高峰原妙ㆍ1219~1293), 무견선도(無見先睹ㆍ1265~ 1334)는 중봉명본(中峰明本)과 함께 남방에서 영향이 가장 컸던 선사이다. 고려 때 태고보우선사가 선법을 수학하고 법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석옥청공(石屋淸珙ㆍ1272~1352)은 일찍이 고봉원묘(高峰原妙)에게서 3년 동안 수행했던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조선파(祖先派)에서도 인재가 많이 배출되기도 했으며 민간에 영향도 컸다. 특히 이 중에서도 고봉원묘는 계율을 엄격히 지키는 것으로 유명해서, 많은 이들이 그로부터 계를 받았다고 한다. 또 그의 가풍은 자비가풍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칭 그를 ‘강남고불(江南古佛)’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외도 이 지파의 또 다른 선사인 중본명본은 당시 강남불교에서 원대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공안을 문자로 전석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고증식의 참선방법을 비평하기도 했으며, 간화선을 다시 새롭게 회복하기도 했다. 동시에 오대, 송대 이래로 활발발했던 선의 정신을 재현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다. 영록대부(榮祿大夫)인 조맹부(趙孟?)는 자칭 그의 제자라고 하기도 했다. 이외도 조정관료 및 지방의 절도사 등이 모두 그를 가까이 하면서 참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원대불교는 송대불교의 특징인 선교 융합사상인 선교합류(禪敎合流), 유불도 삼교합일 선정합일(禪淨合一) 등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대부분 선사들의 선법사상에 공통된 기조가 되기도 했다. 설암조흠(雪岩祖欽ㆍ?~1287)은 유석일치(儒釋一致)를 발의하면서 말하기를 “제가 성인의 도와 여래의 도를 관해보니, (모두)동일한 도이며, 일찍이 둘이 아니다.(함觀聖人之道與如來之道, 同一道也, 未嘗二也)”고 하였다. 중본명본은 유석조합(儒釋調合)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선교일치, 선정융합(禪淨融合)을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정황을 사계절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즉 “밀종은 봄이고, 천태, 현수, 자은종 등은 여름이고, 남산율종은 가을이며, 소림이 단전(單傳ㆍ한 스승의 학설만 전하다)한 종은 겨울이다”고 하면서 “사종은 함께 일불의 뜻을 전했다.(夫四宗共傳一佛之旨)”고 하기도 했다. 초석범기(楚石梵琦ㆍ1296~1370)는 교선일여(敎禪一如)를 말하면서, “교는 부처님의 입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다”고 했다. 이와 같이 원대의 많은 고승들은 선교융합을 주장하였는데, 사실 이러한 기본적인 사상은 모두 오대송초 영명연수가 일찍이 〈종경록〉에서 주장했던 선교일치, 선정일치, 삼교합일에 대한 주장을 계승 발전한 것이다.

원대불교는 중국불교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선종이 많은 발전을 하지 못한 시기이다. 선종은 송대를 거치면서 세속화가 심화되었고, 원대에 이르러서 이미 당나라 때 성행했던 선종의 황금시대는 이미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물론 각 시대마다 각기 다른 형태의 부침을 거치기는 했지만, 그것은 작은 범위 안에서의 부침이었을 뿐이었다. 이미 지나간 세월 속에서 휘황찬란했던 선종의 위력은 다시 재생되기 쉽지 않았다. 따라서 원대의 선승들은 나름대로 역사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기세등등하고 위세가 드높았던 선종의 과거를 되돌리기 위해서 청규를 재정비해보고, 선(禪)과 교(敎)의 논쟁도 해보았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 어떤 선사들은 기봉봉갈(機鋒棒喝ㆍ꾸짖거나 때리고 소리치는 것)을 빌미로 해서 함부로 선경을 모방해 도리어 좌선수행을 소홀히 하는 등 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돌출해내면서, 결국에는 교종의 지위를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또 어떤 선사들은 이러한 선종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조하고자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는 한편, 동시에 유불도 삼교융합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을 되돌리려는 의도를 품기도 했다.

이외에도 원대는 백성들을 9등급으로 나누어서 관리를 했는데, 그것은 통치자들이 백성들의 쉽게 관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 한족(중국인)의 지위도 그리 높지 않았다. 게다가 원대는 라마교를 신봉하면서, 라마승들은 국사라는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고, 중국불교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선사들은 조정과 원만한 관계를 이어가면서 황실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남방의 선사들은 대체로 조정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생활을 했으며, 심지어 어떤 선사들은 의식적으로 조정과 거리를 두기도 했고,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기도 했다. 결국 원대의 통치자들도 영구집권을 꿈꾸면서 종교 및 백성들을 등급으로 통치를 하려 했지만, 결국 시대적 현실 상황을 통찰하지 못하면서 역사의 무대에서 역할을 마치게 되었다. 종교도 또한 역사로 비추어 볼 때, 시대적 상황을 간파하지 못하고, 시대와 소통하지 못하면 결국은 장구한 역사 속에서 단역만을 맡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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